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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맑스

노동자의 기계화 기계의 노동자화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 2권에 나온다.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가 된다'는 것. 돈이냐 시간이냐의 이중구속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현대인의 삶의 출구로 삼아야할 금언이 아닐런지. 버마의 소(음메)도 한나절 일하면 쉬는데 한국사람들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놀랐다던 소모뚜씨의 말이 생각났다.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가 되는 사회적 개인의 출현. 여기까지는 이해가능. 그런데 이 사회적 개인의 출현이 곧 부르주아 사회의 지양이 된다는 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독일이데올로기>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아침에 농사 짓고 오후에는 낚시 하고 저녁에는 비평하는 삶. 내가 아는 가장 고급한 삶이 우리들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 자본가는 왜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걸까

 

-기계의 도입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잉여가치를 증대.

생산성의 혁신은 노동일의 연장 없이도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

- 노동과정 실질적 장악 :

독립수공업자의 기계사용 - 기계를 전면적 장악. 근무량 작업시간 외면적 강제 (형식적 포섭)

대공장의 복합적 기계체제 - 노동자는 고유의 노동리듬 상실하고 전적으로 기계의 리듬에 맞춰 노동 (실질적 포섭)

- 노동가능한 인구층 증가 - 아동, 여성.

- 노동일의 연장 - 기계가 자신의 조수인 인간들이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생산 계속 가능.

- 새로운 기계의 발명은 튼튼한 옛기계를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에, 자본가로서는 투자비를 잃지 않기 위해 기계를 놀릴 수 없음.

- 기계는 노동자 저항 진압하는 수단 "기계는 자본의 독재를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주기적 반항인 파업을 진압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무기"

 

---> 기계에 의한 생산성 혁신이 노동의 절약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노동인구 확대와 노동일 연장으로 나타난다. 기계는 노동자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노동인구가 많은 곳에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들어온다.

 

= 자본가는 '온순하고 말이 없으며, 그러면서도 아주 강력한' 이 새로운 노예 속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를 발견.

노동자는 기계를 적대세력으로 발견 - 기계파괴운동

 

* '자본가가 출현시킨 기계'에서  '기계가 출현시킬 세계'로 관심 이동

 

: 자본가가 기계를 도입한 이유 - 기계의 도입이 자본주의에 초래할 변화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

: 기계와 노동자가 적대가 아닌 구별불가능한 지대로 이행해갈 수 있음

"기계는 어떤 관계에서도 개별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수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기계의 특유함은 노동자의 활동을 대상에게 매개해주는 데 있지 않다. 노동자의활동이 기계의 노동을 매개한다."

-> 노동도구는 노동자의 기교와 숙련에 의해 좌우. 그러나 거대기계장치 공장에서 노동자는 기계의 리듬, 기계의 역학법칙에 복종. "노동자는 생산과정의 주행위자가 아니다. 그는 기계의 한 관절에 지나지 않는다."

 

= 맑스는 노동자가 기계 장치의 부품이 되는 경향과 기계가 살아 있는 노동자처럼 되어가는 경향을 함께 기술한다.

"기계는 스스로가 기계에서 작용하는 역학법칙들로 자기 혼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지속적 운동을 위해 마치 노동자가 식량을 소비하듯 석탁과 기름을 소비하는 명인이다."

-> 기계야말로 종합하는 자, 통일하는 자

 

* 자본이 꿈꾸는 미래, 기계가 꿈꾸는 미래

 

- 자본이 골치 아픈 개별노동으로부터 독립하려고 시도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자본이 부의 창출을 개별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노동에 덜 의존하기 위해 만든 "사회적 교류와 결합,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의 소생"이 계속 자본의 가치축적을 위해 필요한 한계 내에 묶여있을 것인가. 자본은 꽤나 위험한 힘을 명부에서 소환하고 만 게 아닐까.

- 기계가 노동자들과 융합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적 신체를 구성함으로써 '일반지성'을 가진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질적 집합적 신체'가 탄생하는 건 아닌가.

 

-> 자본주의는 '고정자본'으로서 인간 자신의 발전, 다시 말해 다양한 능력을 가진 완성된 인간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 고정자본으로서 인간 자신은 부르주아 사회의 도달점이자 그 지양의 출발점이 되는 건 아닌가.

 

- 맑스의 인간해방 : 인간의 본래성 회복에 둔 청년기(1842)의 발상과는 반대로,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지대 속에서, 다시 말해 인간의 죽음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사회적 개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381)

 

"한편으로는 필요노동시간은 사회적 개인의 욕구들을 자신의 척도로 삼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빠르게 이루어져서 생산이 모두의 부를 목표로 해서 이루어진다 해도

모두의 가처분 시간은 증가한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부(잉여가치)는 모든 개인의 발전된 생산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코 더 이상 노동시간이 아니라 가처분 시간이 부의 척도가 될 것이다."(384)

 

"노동시간을 절약하는 것은.. 향유 능력뿐만 아니라 향유수단의 발전, 향유 능력은 향유를 위한 조건 즉 향유의 첫번째 수단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개인적 소질, 생산력의 발전이다."(388)

 

"우리에게 부르주아 경제체제가 점차로 발전되듯이, 이 경제의 마지막 결과인 그 자신의 부정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르주아 사회를 고찰하면 사회적 생산 과정의 마지막 결과로서 그곳에서는 언제나 사회 자신,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 자신이 나타난다."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