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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아멘> 신적인, 시적인, 선적인


영화가 끝났을 때 가슴이 아렸다. , 신음 같은 감탄사가 터졌다. 심오한 내용을 잘은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건 알겠는 기이한 체험. 신이 보이고 삶이 보이고 김기덕이 보인다. 제목이 <아멘>이다. 여주인공이랑 둘이 프랑스에서 만든 로드무비인데 대사가 거의 없다. 글씨 없는 그림책 같은 영화다. 한 시간 반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스크린이 회화적이다. 크레딧도 달랑 세 줄. ‘감독 김기덕’ ‘배우 김예나’ ‘촬영 김기덕 김예나그리고 END. 이건 거의 묵언수행이다. 김기덕이 열반에 들었구나, 그렇게 결론내렸다. 아무려나, ()적인 것이 신()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김기덕의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수년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려고 시도하다가 끔찍한 장면에서 그냥 꺼버리곤 했다. 미장센은 지독히도 아름다운데 상상초월 날 것의 장면에 눈 맞추기 힘들었다. 영화가 고행이자 고문이므로, 나는 눈 돌렸다. 그런 내가 변한 건가. 제아무리 영화가 끔찍해도 삶의 냉혹함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삶의 엄정함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김기덕이 새삼 위대해 보인다. 어느 평론가의 지적대로, 창녀가 여대생이 되는 허구적 설정으로 스토리를 치장하지 않는 점이 훨씬 윤리적인 것 같다.

이것은 시를 읽으면서 느낀 변화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삶의 절망을 또렷이 직시한다. 관념적인 언어로 덧칠하며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 삶에 가득한 모순과 역설을 끝까지 끙끙 앓으면서 가져가는 것. 그 노력. 그 사랑. 그 눈물겨움. 그것에 뜨겁게 위안 받는다. 언제부턴가 그런다.

다시 김기덕. <아멘>을 보고 나니 존경스럽다. 인생수업을 마치고 다른 층위로 등업한 자의 내공이 느껴진다. 어떻게 저렇게 깊게 군더더기를 제거해버리고 삶의 정수를 담아낼 수 있을까. (나의 짐작이지만 칸느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을 것만 같다.) 나이 들면서 깊이를 더해가는 예술가를 경험하면서, 무엇이 한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배신이 아닐까. '배신을 통한 성장' 아직 못 봤는데 <아리랑>에는 김기덕의 품을 떠나서 자본의 품으로 가버린 장훈감독에 대한 실명비판이 나온단다. 살기등등하다는 후문.

몇 년 전, 김기덕이 유명해졌을 때 본 인터뷰가 기억난다. 초년고생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림을 잘 그렸고 파리로 떠났다. 거리의 화가로 돈 벌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우리나라 미술계가 학력카르텔이 공고해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없겠다싶어서 방향전환했단다. 시나리오를 썼다. 어떤 공모에서 입상해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쓴 다음 작품이 <악어>다. 그 시나리오는 누구를 도저히 주기가 아까워 본인 스스로 감독까지 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비주류로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작품을 구축했고 세계 3대영화제 상을 받은 유일한 감독인데, 배신사건 이후 폐인 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현재 김기덕의 모습은 봉두난발 흰머리 흩날리는 야인 혹은 도인의 아우라가 물씬했다.

어디 제자의 배신뿐이겠는가. 영화필모그라피와 함께 상처도 첩첩 쌓였을 것이다. 고통을 통한 앎의 증대가 일어났으리라 짐작해본다.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 기존의 가치관이 다 무너진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다른 가치와 다른 언어를 발명해서 나의 세계관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 전전긍긍과 암중모색은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인간적 성숙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황지우도 그랬다. 87년 승리 이후 양김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고 이에 좌절한 그는 무등산으로 숨어버린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초조한 삶을 견디며 시를 쓴다. 그렇게 나온 <게눈 속의 연꽃>을 지난 주 시세미나에서 읽었는데, 김기덕의 <아멘>에서 황지우의 선적인 것이 겹친다.

시집의 첫 시가 <>이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로 끝난다. 닻이 덫이 되는 삶의 잔인함이 섬뜩하다. <눈보라>에서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이런 구절도 있다. 영화 <아멘>에서도 짐승 같은 바람소리가 줄곧 난다. 무엇보다 황지우의 시적 절정은 <산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
그러므로
,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황지우가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니까 김기덕이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만 같은 시구다. 삶이 배신당하는 장소에서 자기성찰이 싹트고 수작이 태어난다. 황지우가 그렇고 김기덕이 그렇다. '크나큰 사랑으로 사랑하고, 크나큰 경멸로 사랑하라(니체) 했거늘, 예술가의 고통이 대중에게는 기쁨이 되니,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