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고 안 만나고 살았다. 조금은 의도적으로 납작 엎드려 지냈다. 이 세상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살고 나면, 사십대의 황지우가 그랬듯이 ‘하루를 저질렀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러고 싶을 땐 그래야 한다. 마음에 쏙 드는 나의 개인기. 직감에 민감하다는 것.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홑겹 인생인지라 느낌 대로 사는 게 몸에 배인 편이다. 강의 하러, 세미나 하러, 회의 하러 일주일에 세 번 연구실만 댕겼다. 시내를 지날 때는 유혹에 흔들렸다. 시청에서 지하철을 타면서 핸드폰을 꾹 쥐고는 <북촌방향> 유준상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할 거다.’
충무로 방향. 얼굴 안 보고 일을 처리하려고 ‘용건만 간단히’ 메일을 보냈다가 께름칙해서 전화를 넣었다. 충무로에 들렀다. 예전에 셋이 자주 뭉쳤던 그의 후배랑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추억의 삼자회동. 나를 위해 남겨두었다는 쭈꾸미불고기 몇 점을 먹었다. 입에서 녹는 맛. 오가는 정담. “누나를 마지막으로 본 게 신촌이야. 돈가스 사줬잖아. 그 집 아직도 있더라. 얼마 전 여자 친구랑 지나가면서 그 때 얘기 했거든...” 기억의 복원. 80년대 명동 경양식집 분위기 물씬한 구닥다리 카페. 정직한 공간구획과 낡은 소파가 좋아서 애연가 친구들과 자주 가던 곳이다. 후배의 얘기를 들으면서 누군가에게 나는 붙박이 장처럼 장소와 함께 기억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을지로 방향. 2차로 노상 테이블에서 북어포에 오백한 잔 비우고는 10시 무렵 자리를 파했다. 저지르기 전에 일어나려는 나, 다음 날 아침부터 일정이 빡빡한 그들까지. 합이 맞았다. 충무로 역에서 3분 거리인데 곧장 환한 지하철로 들어가기 싫었다. 빗발이 오락가락 흩날리는 밤거리를 통과하자. 후배는 가고 선배와 나는 을지로 3가 방향으로 틀었다. 곧 바로 다음 골목에서 갈라지려다가 한 블록을 더 동행했다. 이제 잘 가라고 인사를 나누는 찰라, 호프집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일군의 무리와 맞닥뜨렸다. 상엽작가님이랑 우리 연구실에서 사진세미나 하는 분들이다. 반가운 조우 혹은 잔인한 우연.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가려는데 그 사이 하얀 거품 피어나는 얼음장처럼 시원한 맥주가 앞에 탕탕 놓였다.
광화문 방향. 모처럼 잘 팔리는 책을 만든 편집자와 2년 묵은 원고를 넘긴 번역자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 흘러왔다. 셋이서 체부동 국수집에서 잔치국수와 비빔모밀, 감자전에 소주 2병을 비웠다. 서울지방경찰청 건너편 경희궁의 아침 건물 1층 나무사이로. 커피와 초코케이크와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스페셜 원두로 내린 커피를 한잔 더. 리필했다. 떠들기보다 먹기에 충실했다. 세종문화회관 정류장으로 갔다. 목덜미로 찬바람이 파고든다. 광화문의 밤은 이미 가을. 그녀가 횡단보도를 건너며 말한다. “휴가철에 동아리에서 놀러 가면 남학생들이랑 좋은 감정이 생기고 그랬잖아. 무더위가 가시고 지금처럼 찬바람이 불면 그 여름날 설렘이 아주 오래된 일처럼 확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경험과 몸의 분리에 관한 증언. 멋져라. 줌 아웃되는 삶. 살다가 문득, 시간 감각이 뒤엉켜 삶을 낯설게 감각하게 되는 순간, 그 때만 우리는 살아있는 거다.
북촌방향. 유준상은 ‘정말 영호형만 만나고 갈 거야. 어떤 새끼도 안 만나’ 라고 결심하지만 그는 북촌 일대를 맴돌며 친구, 선배, 후배, 동료들과 엇비슷한 만남을 반복적으로 겪는다. 서울에서, 특히 북촌과 인사동이라면 극중 영화평론가인 그가 예정된 새끼만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운치와 안락과 참맛이 보장된 낭만파 어른들을 위한 술집이 구석구석 남아 있는 동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내용이 광석이형 노랫말만큼이나 친근하고 예측가능한 장소. 고만고만한 욕망의 조물락거림이 눈꼴 신 곳. 삶에서 약간의 사치를 원하는 인간들의 서식지다.
그들의 만남이 우연일까? 이념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고 욕망이 비슷한 사람들은 살면서 자주 만나게 되어 있다. 치부욕이 있는 사람은 증권회사에서 만나고, 명품욕 있는 사람은 백화점에서 만나고, 출세욕 있는 사람은 입시설명회에서 만나고, 변혁욕이 있는 사람은 희망버스에서 만난다. 눈이 싸륵싸륵 내리고 잔마다 술이 철철 넘치고 지식인 남성의 구라가 판치고 아는 남녀가 천연덕스럽게 몸을 섞는, 홍상수 인격의 영화 <북촌방향>은 삶속에 스민 그 ‘우연성’의 실루엣을 드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이 우연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이런 대사도 나온다. '여자들은 극단을 짚어주면 다 넘어온다'고. “당신은 겉으로는 쾌활해 보이지만 안에는 굉장히 우울한 정서가 있네요” 이렇게 말하자 송선미가 “어머, 제가 정말 그래요. 잘 맞추시네요”라며 그 신통함에 정말 눈물 글썽이며 홀딱 넘어가는 장면. 웃기고도 애처롭다. 인간이란 외로운 존재같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펼쳐진 감정의 스펙트럼에서 외줄타기 하는 삶. 내가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며, 그 무지는 불안을 초래한다. 그래서 붙잡을 팔뚝과 하찮은 위로가 필요한 거다. 또 유준상은 하룻밤애인과 헤어질 때 “잘 살라”며 세 가지 지침을 일러준다. 첫째,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것, 둘째 술 취하지 말 것, 셋째 세 줄이라도 일기를 꼭 쓸 것. 그렇다. ‘얌전하고 깨끗하게 통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은 제대로 하고 살면서’ 삶을 가로지르는 것.
여러모로 유익한 인생사용설명서가 제공되는이 영화를 보고서 어렵기만 하던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이 어렴풋이 이해될 것 같았다. 현재화된 사건들은 '인과관계'의 지배를 받는다. 잠재적인 의미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발생한다는 것인데, 그 잠재성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여러 시간성들이 모여 있는 시간을 뜻한다. 우연의 진원지 <북촌방향>에서도 ‘복합적인 시간 관계들의 집합’으로서 시간경험이 입체적이고 순환적으로 펼쳐진다. 뜻한대로 살아지지 않아서 어리둥절하지만 그래서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날들. 그러니 납작하게 엎드려 지내도 만날 사람은 만나고 일어날 사건은 저질러진다. 삶의 자장권 안에서 마주친 사람은 필연이고, 어느 날 우연히 기댄 등 뒤의 화살표가 삶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