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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9차시 리뷰-몸으로 읽다 '소년이 온다' 앓이

소년이 온다 ‘앓이’를 했던 수업이었습니다. 타인의 고통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문학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참 귀합니다. 스크린을 통해 전시되는 무력한 피사체가 아닌 (혼령이 되어서도) 할 말 하는 주인공들을 만나는 시간. 그 꿋꿋하고 집요한 응시는 분명 손쉬운 애도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값진 게 아닐까요. 좋은 문학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고 있었다는 걸 일깨우는 작품이요. 아무튼 온몸으로 소년이 온다를 읽는 여러분들에게 많이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고마워요. 같이 있(읽)어주어서요.

 

오늑 

 

영화 <액트 오브 킬링> 내용정리가 명쾌하네요. 가해자의 말과 대비되는 피해자 증언으로 <소년이 온다>를 접근했습니다. 이 소설도 위의 영화처럼 간략한 요점 정리가 되어야 책을 안 읽은 독자들도 이야기를 따라가졌죠. 그리고 ‘역사 기록의 중요성에 있어 예술의 역할’에 관한 필자의 주장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다면체의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록은, 예술이든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아야 한다. 소설/미술/영화는 강력한 언론이다.’ 좋아요. 역사적 사건이 예술을 통해 변주되고 재해석 되는 작업의 의미와 가치를 다양한 논거를 들어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독자들을 계몽하려는 논조는 피해주세요. ‘독자들도 팩트라는 언론의 타이틀에 현혹되어 하나의 시선 속에만 스스로 고립시킬 게 아니라 다양한 매체로 역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필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당신도 좀 깨어나시오.’ 하는 뉘앙스를 줍니다. 이런 어투보다는 나는 다양한 매체로 역사를 받아들여 조금 더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되었다, 는 고백이나 아니면 다른 사례나 통계를 제시해줄 수도 있겠죠.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이 원칙을 기억해주세요. 마지막 문인과 예술가들의 (비참한) 삶 부분은 논점을 이탈하는 사족 같습니다. 이번 글을 보니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주제 싱크로율이 높아지네요. 공들인 흔적이 우러나고요. ‘상처의 피는 이야기 되어져야 마르지 않는다.’ 같은 표현은 참 좋습니다.

 

바람도리

 

‘국가, 자본가, 직장상사, 남자, 학교, 선생님처럼 내가 증오하던 모든 존재는 빈집의 아저씨다.’ 모든 폭력은 힘 있는 자, 생사여탈권을 쥔 자들의 일방적 횡포지요. 사적 경험을 폭력의 구조로 읽어 내고 공적 언어로 풀어보려는 해석과 시도가 돋보입니다. 폭력의 경험이 삶의 부정과 방기를 낳았고 알코올 의존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개연성이 있고요. 그런데 ‘성적 쾌락을 위해 자신의 성기를 어린 아이 몸에 대던 아저씨와 술이 주는 알싸함에 취해 토사물을 남기던 나는 다르지 않다.’는 부분은 무리한 동일화 같아요. 둘은 병치구조가 아니고, 인과관계입니다. 앞의 일로 뒤의 일이 발생한 것이니까요.

내 삶의 주도권을 ‘그 사건’에 두었다는 점, 고통스런 기억을 소화하지 못했다는 점, 그로 인해 계속 구토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점, 빈집의 성폭력을 곳곳에서 마주쳤던 점은 그 사건 이후 필자의 삶에 대한 아픈 진술이고 그 자체로 가치롭습니다. ‘괴물을 미워하다가 어느새 내 안의 괴물을 키웠다.’는 결론도 틀린 진단은 아니지만 정확하진 않아요. 누구라도 나에게 가해를 입힌 괴물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렇다면 괴물을 미워하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 부분이 질문으로 던져지면 좋을 거 같아요. 나는 왜 열 살 꼬마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질문과도 맞닿겠죠.

‘욕망에 중독된 자들은 질주한다.’ 이 정의는 맞는데요, 가해자의 (성적) 욕망과 피해자의 (알코올) 욕망은 달라요. 욕망이 타자를 파괴하는 방식과 자기를 공격하는 방식은 구분이 되어야 해요. ‘내 안의 악을 키우지 않겠다. 치열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사건에 대한 자기 정리, 자기 언어로 풀어보는 이 글이 악을 키우지 않는 용기 있는 좋은 시작이자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랄조

“컴컴한 바다 같은 놈들. 이런 넓은 데에서 어떻게 식을 찾아서 활용하라는 거냐.” 수학과 과학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다니요. 암담함에 처한 이의 심리가 그대로 읽혀요. ‘오르기에 익숙해진 큰 산과 물이 차다며 발만 담가보고 빼 버린 바다’도 그렇고요. 랄조가 쓴 글은 솔직담백하고 비유가 적절하고 웃겨서 읽는 맛이 있어요. 내가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걸로 착각한 게 아닐까 같은 부분도.^^; 이야기가 대략 진로와 적성을 고민하는 나. 점쟁이/부모님의 말에 흔들리는 모습이 담겼어요.

‘나도 모르는 내 모습과 내재된 가능성. 그것들은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점쟁이의 말을 계기로 자기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내용인데요, 그러기엔 근거가 약해요. 영화감독이 왜 되고 싶었는지, 그 직업을 회의하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밥 굶는다) 원래 꿈에 대한 내용이 더 들어가야 점쟁이의 이과진로 권유와 팽팽하게 대립되면서 글에 긴장이 생길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 사람에게는 좌뇌우뇌/이과문과 성향이 고르게 있다는 결론이 나면 랄조 고유의 글이 되지 않습니다. 무난해져요. 자기욕망으로 더 파고 들어보세요.

  소울리스

‘누구에게나 광주 같은 경험이 있다.’는 문장이 들어오네요. 이게 글의 주제가 되었으면 어땠을까요. ‘정치권력이 생산해내는 일상의 공포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던 정황을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드러내어 보여준 것’ 이라는 황현산의 말을 인용하고 나의 광주 경험, 즉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p.207)으로 광주를 풀어내는 겁니다. ‘광주가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건 좋은 질문입니다. 답이 없고 고민해야하는 부분이니까요.

학생 때 집회에서 본 분수대가 무자비한 폭력과 대비되어 인상적입니다. ‘소년이 온다’에도 나오고요. 그저 무구하게 제 본분에 충실한 분수대로 인한 죄책감을 더 풀어보아도 좋겠습니다. ‘자못 숙연해지’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마지막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와 연결을 짓는 게 다소 무리로 보여요. ‘일상에 만연한 폭력 앞에 올곧게 생을 이어온 사람들의 노력이 통하지 않는 현실’을 담담히 잘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단독의 좋은 글이 될 것입니다. 소울리스님은 풍부한 영화자원, 담백한 문장으로 좋은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빠서 영화 못보는 사람들을 위해 힘써주세요.^^

히나

 

책 한권의 분량의 강렬한 이야기가 두 페이지에 담겼습니다. 긴장감 있게 읽히고, 그래서 아쉽고요. 너무 놀랍고 가슴이 아프고 속상하고 답답하잖아요. 잘 요약된 시놉시스 같은데, 이걸 면회 장면이라던가, 필자에게 호소하는 부분이라든가 한 부분만 특화해서 생생하게 글로 써보세요. ‘그냥 참았기 때문에, 계속 참기만 했기 때문에, 자신도 상대방도 모두 괴물이 되었다는 말’ 이런 문장은 이 절실한 상황을 담기에는 너무 평이해요. 히나님은 이야기를 요약하고 읽히게 하는 능력이 뛰어난데 깊이 있게 치밀하게 들어가는 시도가 뒷받침 되면 참 좋겠어요. 책 한권을 쓴다는 심정으로 한 편씩 써보세요. 인간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나올 거 같네요.

 

스콜라스티카

 

나는 미안하지 않다. 제목과 문제 설정이 참 좋아요. 이런 관점에서 풀어가는 이야기를 보고 싶었어요. 저는 세월호 초기에 한동안 광화문이나 조문현장에 가지 못했어요. 헌화하고 끝낼 일이 아니고, 미안할 일도 아니고, 슬퍼할 자격이 없다는 죄책감 같기도 하고, 사건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이상한 느낌에서 살았거든요. 스콜라스티카님도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뒤엉킨 마음을 여러 갈래로 조각내어 보았는데 역시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오월 광주와 유년 시절과 친구 죽음과 세월호 라는 여러 요소를 한 궤로 꿰는 게 닮은 듯 어긋나네요. 하나의 꼭지마다 더 솔직하게 붙들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질문 하면서 써내려 가면 좋은 글이 될 거 같아요. 마음 바탕이 순해서 나를 치고 가는 느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게 스콜라스티카님의 장점인데 더 집요하고 치밀하게 밀고 가는 뒷심이 없으면 마냥 예쁜 글이 되고 말아요. 더 사유하면 밝고 환한 슬픔 같은 겹의 울림이 담긴 글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밀애

 

알곡 같은 삶을 진술해놓고 제목은 이물질 이라고 하다니요. 마지막 단락의 급마무리를 제외하면 글이 좋습니다. 초기에 비해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어지고 서사가 매끄러워요. 사회구조 속에서 나의 삶을 재구성해보는 작업, 근사하고 필요하고 유의미한 시도입니다. 이 글을 초고로 삼아 더 촘촘한 자아탐구가 이뤄질 수 있겠어요. 나는 왜 저항하는 신체가 되었을까. 나는 왜 타협하고 살지 못하는가에 대한 응답이 곧 밀애의 자기서사가 될 거 같아요. 이 글은 조금씩 이야기가 진척되려다 마는 느낌입니다. 각 연령대별 중요 사건과 사건 사이 밀애의 해석(사유)과 느낌으로 메워주세요. 멋있게 쓰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더 솔직해질 수 있을까, 이 긴장을 놓지 않을 때 좋은 글이 나오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