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의 최전선

주관적인 글과 객관적인 글



11
차시 수업 전날 파티하쥐를 치렀다. 일주일 후 글쓰기반 엠티, 이틀 지나 R엠티까지 다녀왔다. 세 건의 행사가 잇달아 열렸다. 생체리듬의 교란. 하루를 동틀 녘에 잠들면 여파가 이삼일 간다. 일상의 보폭을 다시 맞추기가 쉽지 않다. 꼬박꼬박 쓰던 후기까지 밀렸다. 후기는 나 스스로에게 부여한 약속어음이다. 만기기일이 지나면 내가 나를 조여 온다. 사람 사이는 왜 친밀도가 높아지면 긴장이 사라질까나. 사유와 행동을 촉발하지 못하면 아름다운 인연이 아니다.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는 지속가능한 관계. 글쓰기반 동료들과 이루고 싶었던 꿈 아닌가.

11차시에 수잔손탁 책을 읽었다. <사진에 관하여><문학은 자유다> 일부분이다. 각각 본다는 것, 쓴다는 것에 관한 텍스트다. <사진에 관하여>현실은 늘 이미지에 기록된 대로 해석되어 왔다로 시작한다. 사진의 사회적 쓰임에 관한 예리한 통찰이 담겼다. 나는 사진 대신 글쓰기라고 넣어서 읽었다. 유익했다. 실제 어떤 작가는 카메라를 자신의 연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쓴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다. 지배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이미지로 뒤덮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오염되지 않는 눈을 가질 것인가.

관점과 변화

초롱샘이 밑줄을 그어왔다. “사진은 피사체와 닮았을 뿐 아니라 피사체에 대한 일종의 봉헌물이다.” 히틀러 사진을 모으는 수집광 남자. 히틀러 복장과 콧수염까지 따라한 그에게 히틀러는 세속화된 신이다. 그의 경우처럼, 우리는 사진을 통하여 피사체를 소유하고 지배하지만 거꾸로 사진에게 지배당할 수도 있다고 손탁은 말한다. 텔레비전이 우리를 지배하듯이 말이다. 글쓰기에서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로워지기 위한 글쓰기를 나는 추구한다. 어차피 모든 예술과 창작은 우리 사회의 통념과 상식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의 견고한 틀을 흔들어놓는 작업이다. 글쓰기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을  해방시키는 도구로 기능할 때 가치를 지닌다. 늘 자기 생각만을 공고히 하는 자기동일성강화 작업이  아니라 자기해체과정으로서의 글쓰기. 내가 좋아하는 글 <문학은 자유다>에 수록된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연설문 말의 양심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온다. 이 부분을 동료들에게 읽어주었다.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일입니다. 뉴먼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높은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살아가는 것이 변화하는 것이며, 완벽하기 위해서는 자주 변해야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 과정을 마치면서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글쓰기를 나르시시즘의 향유수단, 자아도취의 도구로 활용하지 말라고. 자기 내면에 갇히는 기록이 아닌 자기 외부로 열어두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변할수록 완벽해진다고.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감각을 확장할수록 글감이 풍부해진다고 말이다.

진실과 정의

손탁은 말한다. 작가가 가장 중요시해야할 일은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거짓과 그릇된 정보의 공모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 정신적 약탈자들의 말을 믿지 않게 만드는 것을 작가의 중요한 역할로 꼽는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덧붙인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들 가운데에는 공적인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 자기가 정당한 대의라고 생각하는 것(그 생각이 옳은 경우가 많았습니다)을 이루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데 공모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진실과 정의 가운데 선택해야만 한다면 (물론 그런 선택은 하고 싶지 않지만) 진실을 선택하겠습니다.”

초롱샘이 질문했다. 진실과 정의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비슷한 좋은 말인데 손탁이 왜 구분해서 썼느냐는 거다. 순간 당황했다. 나의 직감으로는 차이가 확연하다. 거칠게 나누자면 정의는 강자의 것, 진실은 약자의 것이기 쉽다. 진실은 초역사적이고 정의는 역사적이다. , 정의는 시대에 따라 바뀐다. 당대의 척도를 갖고 있다. 샌댈이 정의란 무엇인가, 물었을 때 정의는 미국이란 공동체의 이익에 복무하는 논리이다. 전태일은 삶의 진실을 추구하다가 죽었고 그의 죽음은 분명 정의롭지만, 그가 정의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고 말하면 진실에 어긋나지 않을까, 말했다.

진실과 정의를 두고 조심스런 토론이 전개됐다. 집에 와서 위키백과 사전을 찾아보았다. 우리의 논의가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 작가는 굳이 택해야한다면 정의보다 진실에 복무해야 함이 확실해졌다. '진(眞實)은 사실, 거짓이 아닌, 왜곡이나 은폐나 착오를 모두 배제했을 때에 밝혀지는 바를 말한다. 정의(正義)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법이 포함하는 이념이다.'

주관과 객관

11차시 과제가 평론쓰기였다. 영화, 시사, 책 이야기를 써오는 것. 가연샘 글이 호응이 좋았다. 영화 <이토록 뜨거운 순간> 리뷰다. 그가 낭독을 마치자 하나같이 이 영화 꼭 보고 싶다영화 꼭 보겠다고 말했다. 대성공이다. 좋은 글은 목적을 이룬다. 간단한 논리인데 그게 고난도의 기술이다. 평론을 읽어도 내용파악조차 어려운 경우도 있다. 가연샘 글은 일목요연한 줄거리 요약과 자기만의 해석이 돋보였다. 자기 목소리와 애정관이 개입됐으나 감정의 치우침 없이 객관적으로 읽혔다. 모두가 부러움을 표했다.

재밌는 현상. 수업시간에 좋은 글이 나오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이글 쓰는 데 얼마나 몇 시간이나 걸렸어요?” 가연샘은 이틀 내내 낑낑댔다고 말했다. 확실히 많이 들여다보고 고친 글, 오래 붙들고 늘어진 글일수록 좋다. 쉽게 써진 글이 좋은 경우도 있지만 글은 땀을 배반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글을 쓰고 싶어요.” 정연샘이 바람을 터놓았다. 그는 엄마 음식의 기억과 벤야민과 프루스트의 글을 버무려 음식과 기억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런데 최초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지 않았고 글이 길을 잃어버렸다. 스스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소망했다. 자기 경험을 배제한, 정보 중심의, 문장이 아름다운, 그래서 고급한, 벤야민 스타일의 소품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또 물었다. 왜  글은 애초의 의도를 배반하느냐고. 감정이 배제된 객관적이고 품격 있는 글, 어떻게 써야하느냐고.

흔히 분류한다. 쉬운 시와 어려운 시. 객관적인 글과 주관적인 글. 그러나 나는 좋은 시와 나쁜 시, 좋은 글과 나쁜 글의 구분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열한 번의 수업시간 내도록 나는 자기경험, 자기가 본 것 느낀 것 경험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글을 쓰라고 강조했다. '나의 느낌에 집중하고 사유하라.'  이것은 과도한 자기노출을 뜻하는 게 아니다. 가령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며 등록금 내기에 허덕이는 대학생이 자기 일상을 기록한다면 그게 주관적인 글일까 객관적인 글일까. 워킹맘이 일과 가사노동과 육아에 허덕인다면 이게 단지 불운한 한 개인의 고민일까. 2차시에 지오샘이 쓴 20대 분투기는 더없이 사적인 경험을 다뤘지만 시대와 청춘의 우울을 꿰뚫은 글이었다.

결론은 이렇다. 나에게 직면한 문제를 심연까지 파고들 때 주관은 객관이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의 실체가 선명히 드러날 때 그걸 붙들고 글을 쓰면, 그 주관을 통해 객관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 고로 애초부터 존재하는 객관적인 글은 없다. 중도적인 글이란 개념은'환상'이다. ‘공중파 뉴스는 객관적인 사실을 결코 보도하지 않는다. 사실 자체는 없다. 언제나 해석된 사실만 있을 뿐이다. 누가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좌파 우파, 보수 진보는 얼마든지 달라진다. 자기가 선 곳에서 깊고 넓게 성찰하는 것이 중도이고 어제의 나를 극복하는 게 진보이다.

객관과 중도는 이르러야할 목표라기보다 내가 창출해내야 하는 삶의 영역이다. 그 과정이 글쓰기다. 일상적 평균적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삶의 윤리를 보여주는 작업이 '예술'이다.  '나'라는 주어를  벗어난 글쓰기가 불가능하다면, 자기 삶을 키워야 하고 인연의 배치를  넓혀야 한다. 더 많은 것과 관계 맺을 때 글도 함께 자라지 않을까. 자기 신체를 온갖 인연이 교차하는 장, 권력이 관통하는 장으로 볼 수 있을 때, 내 삶을 짓누르는 기존의 가치체계에 저항할 수 있을 때, 그 글은 자기해방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에게 삶의 영감을 줄 것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수업  (6) 2011.06.28
글쓰기의 최전선 2기  (8) 2011.06.20
시, 삶의 입구  (15) 2011.05.30
글쓰는 여성의 탄생  (7) 2011.05.27
쓰임새의 고통  (2) 2011.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