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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세상

시흥 늠내길, 직립보행 본능 일깨우는 사색의 길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사상가 루쉰의 말이 요즘 우리네 삶에서 입증되고 있다. 제주 올레를 시작으로 전국 골골샅샅 잎맥처럼 길이 생겨나 현대인의 고단한 삶에 양분을 담뿍 제공한다. 경기도 시흥 늠내길도 ‘수도권의 걷기 좋은 길’을 표방하며 작년에 개장했다. 시흥은 주변 인천, 부천, 안산, 안양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었던 탓에 아직 자연부락이 많이 남아 있고 마을을 이어주는 옛길 또한 살아있다. 그 길을 엮어 숲길, 바람길, 갯골길, 옛길 등 총 4개 코스로 개발했다. 제1코스 숲길은 산자락과 산자락을 이은 길이다.


“길이 생겼다는 얘길 듣고 15년 만에 여길 왔어요. 이 근처에 친정이 있었거든요. 옛날엔 항상 군자봉까지만 왔다갔는데 길이 연결되니까 끊이지 않고 계속 갈 수 있어 좋네요.” 맵싸한 바람에 코끝이 발갛게 물든 이종옥씨(54). 맑은 공기를 쐬며 두 시간 걸었더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며 날아가듯 걸어간다.

그의 말대로 늠내길은 공원이나 산책로처럼 매끈하지 않다. 울퉁불퉁 투박한 흙길을 그대로이다. 가파르지 않아 주말에는 가족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장윤정씨(38)씨는 남편과 두 딸과 함께 나왔다. 어른들이야 산들바람만 불어도 가슴이 뻥 뚫린다지만 꼬마아가씨들은 십리도 못가 ‘내 다리 살려라’ 울상이다. 반은 걷고 반은 아빠 품에 안기고 그래도 힘들면 초콜릿 먹고 힘내서 뒤뚱뒤뚱 뛰어간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약속하는 걷기가, 아이들에겐 천연보약이다.

오붓한 캥거루가족이 사라진 길에 자전거 부대가 나타났다. 옥녀봉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다리쉼을 하는 이들은 산악자전거동호회 회원들이다. 무슨 인연인지 이곳 시흥시 하중동 지명과 이름이 똑같은 하중동씨(38). 어디로 가는 길인가 묻자 철학자처럼 읊조린다. “길을 가면서 왜 길을 묻는가! 하하. 농담입니다. 그냥 가는 거죠. 이 길이 험하지 않고 북적거리지 않고 자전거타기가 좋아요. 산책은 느리게 걷는 맛이 있듯이 자전거는 스피드를 즐길 수 있죠. 온 신경을 집중하여 눈앞에 돌부리나 비탈길을 피해야하고요. 스릴 있어요. 인생이랑 똑같아요. 능력껏 타야지, 너무 과속하면 안 되고 속도를 잘 조절해야하거든요.”

길 위에 서면 누구나 지혜로워진다. 가벼워진다. 평안해진다. 한결 젊어진다. 무슨 마법이 길래, 잡목과 들풀 우거진 길을 그저 갈 뿐인데 왜 그런 걸까? 이 물음에 홍성훈 씨(69)는 온 생애로 답한다. 그는 걷기전문가다.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동료와 병원을 운영하며 한 달에 2주일은 일하고 나머지는 걷는 데 쓴다.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걷다보니 취미가 본업이 됐다. 한반도는 물론이요 지구촌 곳곳을 거쳐 갔다. 늠내길은 그가 산책하듯 부담 없이 찾는 곳이다.

“여긴 아기자기한 맛이 있죠. 어느 계절에 걷느냐 누구랑 걷느냐에 따라 길은 달라지거든요. 자주 와도 매번 새롭죠. 저는 길에 대한 설렘이 있어요. 사람들이 언제한번 가자~ 가자~ 하고는 안 가잖아요. 저는 진짜 가요. 3-4년 전에 산티아고가 좋다는 얘길 들었고 재작년에 갔죠. 2천리 정도를 34일 간 걸었는데 발에 물집 잡혀도 대중교통 한 번도 이용 안 하고 다 걸었어요. 힘들어도 걷게 돼요. 인간은 직립보행 하는 존재잖아요. 본능적 끌림이에요.”


홍성훈 씨는 원래 산사람이었다. 히말라야를 열한 번이나 갔고 설악산, 지리산, 소백산 등 좋아하는 국내산도 사오십 번을 오르내렸다. 그렇게 젊은 시절엔 산에 미쳐 살았고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져 길로 임한 것이다. 걷기는 가이드북의 어떤 공식대로 똑같은 곳을 가는 게 아니라 발길 닿는 대로 가고 하루 더 머무는 등 자유로워서 좋다고 한다. 길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은 덤이다.

“산에 다닐 땐 정상을 향해 한 줄로 가느라고 옆 사람이랑 말을 못했는데 걷기는 나란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산길 물길 들길 다 좋죠. 주변 경관에 감동도 받지만 사실 풍경을 보러 가는 건 아니잖아요. 걷다 보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아요.”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가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요령을 배우듯이, 그는 걷기를 통해 삶의 균형과 속도를 찾았다. “그 성격이 어디 간 건 아니지만” 명문학교만 나와서 제 잘난 맛에 살았는데 자연과 벗하고 길 위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삶의 자세가 변했다고 말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 창립멤버로 활동했으며 요즘은 북한의약품보내기 후원에 참여하는 등 물심양면 나누며 산다.

시흥시청에서 출발해 산굽이 돌고 들판 지나 200계단 넘어 다시 시청으로 돌아온 그. 백발성성한 귀밑으로 땀방울이 보석처럼 빛난다. 청년 같은 그의 표정은 말한다. 직립보행의 본능이란 곧 인간다운 삶의 추구였음을. 아마 곧게 뻗은 땅이란 뜻의 늠내길에 걷기행렬이 쉬이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의 걸음이 멈추면 생각도 멈출 것이므로.

* 야곱의 우물 20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