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 전 일은 아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섞인 음악과 고색창연한 목소리 따라, 사람들은 추억의 거리를 헤매거나 못다한 사랑의 애잔함을 달랬다. 낭만을, 낭만인줄도 모르고 살았던 그 시절의 DJ 황인용. 이제 그는 작은 소리통이 아닌 헤이리의 커다란 공간에서 음악을 틀고 나눈다. 사람을 대하는 편안함과 온 얼굴로 웃는 선한 표정과 LP를 갈아 끼우는 손놀림은 여전하되, 그것들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향취는 더욱 그윽했다.
경기도 파주의 예술인 마을 헤이리.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 ‘황인용의 음악감상실 카메라타’가 있다. 벽면에는 거대한 30년대 웨스턴일렉트릭제 극장용 스피커와 앰프들, 그리고 1만 장이 넘는 LP음반이 빼곡하다. 평일 오후가 저물어 가는 시간. 천장 끝부분 채광창에서 한 무더기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대여섯 커플이 듬성듬성 앉아있다. 그들은 대체로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각자 책을 읽거나,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럽영화에나 나오는 듯한 자유스러운 공존의 풍경 안에 그도 숨은그림처럼 끼어 있었다.
“여기에는 거의 매일 옵니다. 일하러 나오는 부담은 없고요 순전히 음악 들으러 옵니다. 소리가 좋으니까 음악듣기가 좋아요. 들을 음반도 많고요.”
"클래식.. 시간 잘 가고 책도 보고 좋아요.”
"어려서는 음악을 들을 가정형편이 아니었다."는 그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방송을 통해서이다. 20여 년 DJ를 하면서 많은 음악을 접했고 장르와 장르의 파도를 넘어 자연스레 클래식에 이르렀다. 클래식은 처음에는 와 닿지 않는다며 듣는데 노력이 필요하다며 그는 말을 이었다.
“처음엔 막연히 좋다고 생각하고 들었었는데 맘 잡고 구체적으로 들어야겠다 싶더라고요. 음반을 사고, 속지의 설명을 관심 있게 읽고, 음악 관련 책을 읽고 등등 노력을 했습니다. 잘 듣는 것도 능력이거든요. 모차르트처럼 곡 만드는 창작자만 천재가 있는 게 아니에요. 좋은 음악 잘 느끼고 잘 골라내는 ‘듣는 천재’도 있어요. 전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겹겹이 주름타고 환한 웃음이 퍼진다. 하늘과 땅, 꽃과 나비, 남자와 여자처럼 그는 음악의 창작자와 수요자를 묶었다. 사실 듣는 사람의 행위는 만드는 이의 노력에 비해 소극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마련인데 그는 달랐다. 우열을 두지 않고 자연의 그것처럼 조화롭게 여겼다. 음악 또한 심각하고 열성적으로가 아니라 그저 구름에 달 가듯이 유유자적 듣는다고 말했다.
“클래식 좋은 점이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이 잘 가요. 심심할 사이가 없지요. 3악장짜리 음악 들으면 2-30분이 후딱 지나가는데 두 곡만 들어도 한 시간이 금세 가거든요. 음악 들으면서 책도 보고, 음반도 정리하고,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보고...생각도 정리하고 이것저것 소일합니다.”
‘클래식’은 분명 그의 인생 제2막에 등장한 새로운 연인이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위로’같은 간지럽고 거창한 의미부여보다 그저 삶의 배경으로 장판처럼 깔고 그 위에서 편안하게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카메라타, 고독한 존재의 섬이 되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듯 말하지만, 어쩌면 그러한 일상은 누구나 꿈꾸는 삶이기도 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모아놓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두루 나누고 사는 삶 말이다. 그는 예전부터 ‘음악실의 꿈’은 있었지만 추진력이 없어 손 놓고 있었는데 마침 헤이리 마을 공동체에 기회가 닿아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황인용의 음악감상실 카메라타는 지난 4년 동안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했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편히 쉬어 가는 사랑방으로, 큰마음 먹고 나들이 오는 문화공간으로, 사운드가 훌륭한 연주회장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또 얼마 전에는 바로 옆에 ‘아트스페이스 카메라타’라는 전시공간을 열었는데 미술사를 공부한 그의 딸이 운영한다. 현재 전시장에는 EBS에서 방영하는 제4회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을 하루 두 번 상영하고 있다.
“아까 낮에 클린트이스트우드의 ‘피아노 블루스’를 보았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 배우는 어떻게 그렇게 잘 늙어갈 수가 있지요. 아, 정말 멋있는 사람이에요.”
짧은 감탄사와 짧은 문장을 뒤섞어 긴 여운을 만들어내던 그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와 ‘밀리언달러베이비’ 등 아름다운 노배우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그는 잠시 상념에 젖은 채 가장 좋아한다는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고는 음악을 바꾸기 위해 뮤직 박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는 사진기자를 향해 고개를 들어 한 번 친절하게 웃어주고는 조심스레 LP를 뒤적거렸다.
“이거 보세요. 참 좋지요?” 속지에는 어느 음악가의 빛바랜 사진이 웃고 있었다. LP표지를 곱게 접어 이젤에 세워두고는 다시 커피가 놓인 자리로 돌아오는 길, 그가 옆 테이블 모녀커플에게 넌지시 눈인사를 건넨다. 모녀커플은 오래 전부터 ‘커피와 침묵’을 사이에 두고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대화도중 그들을 바라보며 “엄마와 딸 같은데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온정어린 눈길을 주던 참이다.
카메라타 안에서 저마다는 고독을 누리는 ‘존재의 섬’처럼 보였다. 음악은 파도다. 세차게 치고 가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가든 그저 몸을 내맡길 뿐이다. 그 역시 “설렁설렁 듣는다”고 말한다. 일종의 숨을 고르기처럼 편안한 모습이다.
주변의 설레는 것들에 낮은 음성으로 무심한 듯 애정표현을 하던 그는 어느새 금은보화처럼 쏟아지는 바이올린 소리에 마음을 실려 보냈다. 까만 뿔테 안경, 감색 셔츠와 연한 그레이 재킷을 걸치고 신문을 넘기는 중년신사의 모습. 그 주위로 따뜻한 광파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