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여 명 아기, 빗물 같은 정으로 길러내 스무 살 무렵, 또래의 친구들이 좋은 사람 만나길 넌지시 소망하는 동안 황씨는 특이하게도 소록도에 가서 나환자를 돌보고 싶어 했다. 어떤 계기가 이었던 것은 아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러난 마음이었다. 그러나 신부님들이 힘에 부치는 고된 일이 많다며 극구 만류하시는 바람에 소록도의 소망을 접어두고 결혼을 했다.
"지방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는데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심심하고 무료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어요. 어느 날부턴가 지대가 낮은 우리 집에서 올려다 보이는 이웃집에 항상 하얀 기저귀가 널려 있는 게 보였어요. 그 집에는 나이 많은 분이 살고 있었는데 왜 기저귀가 있을까 궁금했지요. 알고 봤더니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되기 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일을 하시더라고요."
이 분의 소개로 황씨도 위탁모의 길을 가게 된다. 이즈음 황씨의 자식들은 중학생과 초등학생이었다. 그 때는 학교급식도 없었으니 아침마다 싱크대 위에 기차처럼 도시락 네 개가 놓여 있지 않았을까.
"도시락 쌌죠. 도시락도 싸고 아기 쌀미음도 직접 쒀서 먹이고 그랬어요. 친자식이랑 똑같아요. 기르면 정들어서 그렇게 돼요.”
처음에는 건강한 아이를 한 명씩 맡아서 키우다가 어느 정도 아이 돌보는 일이 몸에 익고 적응이 되자 그 때부터는 다운증후군 같은 장애아를 한 번에 두 명씩 맡아서 키우게 되었다. 홀트아동복지회에서는 위탁가정을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한다. 아이를 잘 돌보고 있나 살펴보고 가는데 황씨의 집은 처음에 한두 번 오더니 그 후로는 방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씨가 온갖 정성을 다해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이 믿음을 준 것이다.
“김성은이란 아이는 처음부터 약간의 사시와 소아마비 증세가 있었어요. 그 아이를 밥 먹이고 씻길 때 빼놓고는 계속 하루 종일 눈 초점 맞추는 연습을 하고 팔다리를 주물렀더니 증세가 점점 나아졌어요. 2년 뒤 정상으로 돌아와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게 됐지요. 아버지 될 사람이 출생 때부터 상세히 기록된 차트를 보더니 상태가 좋아진 것에 놀라면서 잘 키우겠다, 꼭 훌륭한 박사 만들겠다고 약속을 하고 데려갔죠. 한참 후 성은이가 잘 크고 있다는 편지가 한번 왔었는데 너무 반갑고 좋았어요.”
이렇게 성은이 처럼 기르던 아이가 입양되어 떠나고 나면 생살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허망하다. 그런 맘을 달래느라 다시 아이를 맡고를 거듭하는 동안 어느 새 9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간 황씨의 손에 길러진 아이들은 100여명을 넘었다. 마치 바다 위로 내려앉는 빗물처럼,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 맑은 정이 묵묵히 흘러 긴 시간의 강을 이룬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나를 유배시키다.
“제가 아기를 돌보는 동안 우리 아이들도 막내까지 성인이 되었는데 모두 바르게 잘 커주었죠. 그게 너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에요.”
매일 매일이 ‘체험 삶의 현장’ 이었을 네 남매의 성장환경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다. 언니의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치듯 아기를 업은 엄마의 등 너머로 생명존중을 배웠을 아이들. 바쁜 엄마를 둔 덕에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자립심이 키워졌고, 주위의 아픔을 연민으로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눈도 길러졌을 터.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했으니, 용하다는 족집게 선생도 가르치지 못할 삶의 귀중한 덕목들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식된 셈이다. 황씨는 대화 내내 “고맙죠. 고마운 일이죠”란 말을 추임새처럼 쓰곤 했다.
“이 한 몸 건강해서 일할 수 있는 게 고맙고, 어려운 자식농사를 잘 짓게 해준 것도 감사하고, 고속버스를 운전하는 남편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하고, 생각해보면 다 고마운 일이에요.”
받은 것을 되갚기 위해서는 계속 이 일 해야 했다고 말하는 황씨. 그는 결국 처녀 적에 보류해 두었던 소록도를 대신해서 안양에 있는 나환자 마을 ‘나자로’를 찾아갔다.
“거기 갔더니 제가 나이가 젊은 축에 속했어요. 그래서 제일 힘든 빨래하는 일을 맡았어요. 낡은 옷들은 가져다가 꿰매고 고쳐서 새 옷을 만들어다 주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무척 좋아하시는데 그걸 보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아이처럼 웃는 황씨를 보니 기쁨은 세상이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즐기는 데서 나온다는 말이 떠오른다. 만약에 저분들이 우리 엄마, 아빠라면 하는 생각을 하면 한 분 한 분 그냥 넘겨지지가 않았다고 한다. 휴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자연스런 감정이입은 18년을 견디게 한 힘이다. 나자로 마을은 처음에는 인원이 80~90명 쯤 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돌아가시는 분이 늘어났고 일손이 많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봉천동 복지관으로 터전을 옮겨 무료급식봉사를 하고 있다.
“주위사람들에게 부끄럽기도 해요. 할일 없어서 매일 나오는 거 같기도 하고... 실제로 어떤 할머니한테는 ‘끼니 때우러 여기 나오느냐’ 라는 말을 들었는데 좀 속상했어요.”
황씨는 아침이면 직장인처럼 출근 준비에 바쁘다. 개인적인 다른 볼일이 있으면 한 시간 먼저 가서 일을 해놓아야 직성이 풀릴 만큼 일처리가 완벽하다. 그런 스스로가 대견스럽다며 수줍게 웃는 황씨. 이런 당당함이 있기에 작은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내 인생의 훈장, 남편이 선물해 준 팔찌 그
궁금했다. 황씨의 끝없이 솟아나는 봉사와 희생정신의 광맥은 무엇일까. 반평생 자신을 낮은 곳에 유배시키면서, 뜨거운 피의 재촉을 기꺼이 감내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 말이다.
“친정어머님이 좋은 일을 정말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엄마가 돌아가실 때도 너무 편안하고 곱게 돌아가셨죠. 늘 엄마의 그림자라도 따르고 싶었어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잘 느낄 수 있는 영혼’의 능력은 예술분야 에서만 발휘되는 게 아니었다. 황씨의 큰딸도 이제 곧 봉사의 삶을 시작하여 엄마의 동행이 되려한다니 아름다운 대물림이다. 그런데 아홉이 있으면 열을 채우고 싶고, 아흔 아홉을 가지면 백을 이루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황씨는 자신의 노동을 돈으로 환산해 본 적은 없었을까.
“왜요. 있었죠. 주위에서 이제 산후도우미 같은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게 어떻겠느냐 권유하기도 해요. 근데 그 돈 더 있어서 뭐해요. 내가 많이 배워서 남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많아서 돈을 척척 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으로 하는 일, 이거 밖에 없는 데 계속 해야죠.”
초연한 음성에서 빈방의 정갈함이 배어난다. 황씨는 말을 이었다. “애들이 명절에 주는 용돈을 모았더니 천만 원이 되었어요.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나중에 늙으면 내 말을 이해할 텐데) 남편이 불쌍해져... 그래서 남편에게 주었더니 좋아서 잠을 못자더라고요.”
남편은 또 그렇게 선물 받은 돈에서 발생한 이자와 용돈을 보태서 아내에게 순금 팔찌를 선물했다고 한다. 모든 선물은 준 사람에게 돌아가는 법. 처음부터 유독 눈에 띄었던 황씨의 팔찌는 열심히 살아온 아내의 착한 삶을 곁에서 지켜본 남편이 달아 준 훈장이었다. 반평생 봉사의 삶으로 이어온 황금례 씨는 이번 달에 환갑을 맞는다. 남편은 물론 네 남매와 며느리들에게도 친정엄마 보다 더 좋은 시어머니로 존경 받고 있는 황씨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이고 삶의 태도라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