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구로동에 산다는 것. 사춘기 소녀에게 그것은 형벌이었다. 집집마다 방 하나 부엌 하나에 ‘공중변소’를 쓰던 서울의 변방. 오직 생존만을 위해 분투하는 도시빈민들의 집단 서식지. 성공하면 황급히 떠나는 동네. 마치 탈옥을 꿈꾸는 죄수처럼, 소녀는 오직 구로동 떠나는 꿈을 꾸며 자랐고 부모로부터 합법적인 탈출을 위해 간호학과를 택했다. 간호사가 되어 ‘전혜린의 나라’ 독일로 가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셈이었다. 오직 떠나기 위해 살아온 곳, 구로동. 구로동 사람이란 꼬리표가 창피함에서 자부심으로 바뀐 것은 운동권대학생이 된 이후다.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 가득한 구로동은 자랑스러운 역사적 현장이었다.
2003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영국에서 발도로프교육을 공부한 그는 대안학교 교사로 살며 창의적인 일을 하려했다. 하지만 숫기가 없어 어디에도 나 좀 써달라고 이력서 한 장 내밀지 못했다. 그즈음 제안이 왔다. 교사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구로동의 한 공부방을 맡아달라고 했다. 흔쾌히 응했다. 사적인 욕심이 컸다.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긴 싫었고 홈스쿨링을 할 자신은 없었다. 내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키우면 혼자 키우는 것보다는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집에서도 가까웠다. 여러모로 마음 편히 비빌 언덕은 나의 살던 고향 구로동 밖에 없었다. 7년 째 구로동 ‘파랑새나눔터’를 지키는 성태숙 선생의 얘기다.
공중변소 냄새 나는 추억의 구로동으로
“처음 왔을 때 엄청났죠. 말이 공부방이지 골목을 막아서 천막 치고 주방으로 쓰고 있었어요. 애들은 시커멓고. 첫날에 5분 정도 앉아 있다가 급한 볼일 있다며 도망치듯 나왔어요.(웃음) 다음 날부터 근무했는데, 제가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이랬대요. 너희들 정말 안 되겠구나!”
구로동 일대에 철거가 한참이었다. 어수선한 틈에 아이들은 방치됐다. 어느 날 집에 가보면 아이만 두고 가족이 다 이사를 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자주 싸웠다. 거칠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밤새 공부방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똥을 싸놓고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새로 온 계모에게 앙갚음 하듯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일을 저질렀다. 아무려나, 그의 새로운 교육과정은 시작됐다. 여름이면 세숫대야에 물 받아 뿌리고 놀고, 전국노래자랑을 열었다. 대학로에 공짜로 연극 볼 일이라도 생기면 보자기에 밥 싸서 애들을 소몰이 하듯 몰고 가서 꾸역꾸역 챙겨봤다. 아이들도 파랑새도 “점점 용이 됐다.”
지금도 지역 상황이 크게 나아진 건 아니다. 재개발로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구로동에는 허름한 집들이 섬처럼 군데군데 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한 부모 가정, 조손가정이 남아 있다. 이 아이들은 기형도의 시구처럼 ‘찬밥처럼 빈방에 담겨’ 긴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돌봄에서 소외된 아이들은 파랑새나눔터에서 함께 지낸다.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저소득 가정일 것, 둘째 부모가 있더라도 양육이 부족할 것. 현재 20여 평의 공간에서 초1부터 고2까지 33명의 아이들이 성태숙 선생과 2명의 교사, 밥해주는 분, 공익요원 등이 산다.
“찌질해서 모였다. 여기서도 찌질하게 살면 바보다”
“예전에는 못 먹고 못 입는 절대빈곤이었다면 요즘은 상대빈곤이에요. 오백원 천원짜리 옷도 있잖아요. 이젠 어떤 옷을 입느냐, 어떤 밥을 먹느냐, 어떤 핸드폰을 쓰느냐의 문제거든요. 무엇이 빈곤인가 묻곤 하는데, 사회적 배제와 고립, 중심에 접근하는 통로가 차단 된 것이 진짜 가난이라고 생각해요.”
파랑새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었다. 어릴 때는 무탈하게 자라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될 무렵이면 불만이나 욕구를 거칠게 분출했다. 훔치거나 싸우거나 나가거나 따돌렸다. 얼마 전에는 한 아이가 자원봉사자의 노트북과 핸드폰을 몰래 가져갔다. 이런 사건이 생기면 그는 한 번에 돈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아이와 가족과 교사가 일정 부분씩 책임지고 수습하는 과정을 거친다. 자기의 문제가 생겼을 때 가족이 노력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자 함이다.
때로는 정공법을 택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 터놓고 얘기한다. 우리 공부방 정부지원금이 얼마고 급식비가 어떻게 쓰이는지, 너는 왜 이 돈을 받는지 말한다. 훗날 선생님이 늙었을 때 너도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훌륭하게 자라야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좀 폭력적인 말이지만, 그래도 해요. 여기는 학원이 아니다. 같이 변화를 원한다면 동료로서 함께 하고 일방적으로 도움받기 원하면 딴 데 가는 게 낫다고요. 또 한 아이가 소외될 때는 다 모아 놓고 얘기해요. 우리는 여기 찌질해서 모였다. 이 안에서 또 찌질한 일을 만든 건 진짜 바보다. 외롭고 서럽고 힘들어서 모였는데 밖의 일이 재현돼서는 안 된다고요.”
그 역시 파랑새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가난한 집 출신이다.” 지방에서 구로동으로 이사 올 때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돈을 몽땅 잃었다. 국수집 딸로 컸다. 그래서 지금도 국수를 못 먹는다. 여전히 가난하게 살지만 가난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소박한 삶이 개인과 지구에게 도움이 되는 생존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가난을 극복하라고 가르치진 않는다. 각박하고 인색한 궁핍상태가 아니라 ‘풍요로운 가난’을 위해 애쓴다. 3년 전 한화그룹에서 기금을 받아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문을 두드린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서당 없애주세요” 3년째 부동의 1위
“대학 때부터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수유너머가 생겼을 때부터 알고 있었죠. 계속 지켜보기만 하다가 우리 애들이 토요서당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연락했어요. 수유너머에서 선생님이 와서 주1회 논어와 현대시 등을 공부해요. 처음 1년은 아이들을 두들겨 패가면서 앉히는 게 급선무였어요. 대학로 가서 죽비를 사왔어요. 허리 만져 앉히다가 의욕이 과해서.(웃음) 앉히는데 1년 걸렸나 봐요.
본격 인문학 공부라기보다 ‘수련’의 느낌이에요. 저는 평소에 아이들과 놀러갈 꺼리가 생기면 다른 수업은 즉흥적으로 잘 빠지거든요. 그런데 서당은 안 빠지니까, 애들은 죽죠. 저 수업만 없으면 돼! 그러고, 자치회의에서도 ‘없애주세요’ 1위가 파랑새서당이에요. 그러면서도 뭔가 아는 거야. 태쌤도 어찌하지 못하는 게 있구나. 서당은 태쌤도 없애지 못하는 유일한 공부다! 하하.”
초등생과 중고생은 매주 1회 파랑새서당을 연다. 공자왈 맹자왈 소리 내어 읽는다. 청소년들은 ‘수유너머 구로’의 연구원과 별도로 로미오와 줄리엣, 이옥 같은 단행본을 읽는 고전세미나를 진행한다. 이밖에도 단기특강, 글쓰기 강좌, 보리서당 등 배움의 기회를 넓혀가고 있다.
성태숙 선생 역시 성실한 파랑새서당 3년차 학생이다. 현대시의 매력에 빠졌다. 그간 한 번도 읽지 않았던 문학책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시구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봄비처럼 촉촉이 젖어드는 느낌이랄까. 어느 날은 문득 궁금했다. ‘시인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지?’
“공부방 교사로 살다보니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 필요하더라고요. 책을 읽다가 은연중에 낱말이나 문장을 유심히 봐 놓는 경향이 생겼어요. 외워놓는 말이 결국 자기 생각의 근거와 바탕이 되는 거죠. 인간이 사는 게 창조적이어야 해요. 이런 저런 일에 대해 순간순간 재치 있는 판단이 필요하니까요. 자기 방향이나 자기 철학이 없으면 휩쓸려 판단하게 되고, 그래서 인문학 공부가 필요한 거 같아요.”
파랑새 아이들은 독서 기회가 적은 편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방은 유희에 찬 공간이면서 정치적인 공간이다. 공부방에 오면 살아 있는 장난감인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심심할 틈이 없다. 굳이 책까지 손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선행학습이 전혀 안 돼 있어 오히려 유리했다. 아이들은 고전이 뭔지 몰랐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니까 부담이 없었다. 오히려 뭘 좀 아는 교사들이 미리 주저하고 망설였다. 아이들에겐 어차피 만화책 이외엔 어떤 책을 들이대도 어렵긴 매한가지였기에 해보기도 전에 미리 손사래 치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이 지금은 인문학 공부를 싫어하고 뭐가 뭔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알 거라 생각해요. 어느 지점에 가면 자기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우고 자기 이야기를 만들고 싶고 그 때 자기 낱말이 필요해요. 애들이 필요할지 안 필요할지 모르고 지금은 그물 자체가 안 만들어졌지만 그 때 가서 힘을 발휘할 거라고 봐요.
저는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가 있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먹물 한 방울만 떨어뜨리던지 종이가 구겨져 있던지, 자기 이야기를 써보려고 시도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는 거죠. 이것은 삶에 대한 용기죠. 안 될 거 같은 걸 뻔히 알면서도 정말 모르는 것처럼 도전하는 용기.”
관계의 가난 풀고, 집단적 자신감 얻고
그에게 인문학은 소외된 아이들이 ‘관계의 가난’을 푸는 열쇠였다. 책은 세상으로 열린 문이다. 아이들에게 책을 통해 다양한 삶과 접속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꼭 종이로 된 고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도 권했다. 하자센터 대형폐기물오케스트라 ‘노리단’과 워크샵을 하고, 나무닥움직임연구소 공연예술에 참여시켰다. 비주류 삶의 역동성, 다양성, 흥미진진함을 아이들의 연한 피부에 흠뻑 젖도록 해주었다. 무형의 책에서 만나는 열정적인 사람과 이색적 공간, 후끈한 공기는 아이들을 자극했다.
“영국에 유학 갔을 때 정말, 정말로 엄청나게 고생했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약간 무서운 게 없어졌어요. 세상이 이게 다가 아니란 걸 알았죠. 제가 다양한 경험으로 시야를 넓히는데 도움 받은 것처럼, 아이들에게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이게 다가 아니다, 그걸 맛보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게 제 임무지요.
아이들 인문학은 파랑새 자체에 도움이 됐어요.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고 할까요. 예전에 매력적인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면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매력 있는 사람이 돼서 그들을 우리 곁에 오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해요.
파랑새에 힘이 길러진 거죠. 공부하기 전에는 ‘이런 거 해주는 사람이 없어’ 라고 말했다면 지금은 ‘수유가 없으면 우리가 수유가 되면 돼’ 이러죠. 변했어요. 이건 어떤 걸 잘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노력이 덜 두렵단 거죠. 노력하는 과정이 분명 힘든데 그간 수유가 같이 버텨 줬고 이제 우리끼리 노력하고 시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 집단적인 자신감을 얻었어요.”
파랑새나눔터 입구 싱크대에는 칫솔 서른 여개가 어지럽게 담겨있다. 두 개의 방 벽면에는 수백 권 넘는 책들이 담쟁이 넝쿨처럼 덮여 있다. 참고서도 초등부터 고등까지 다양한 과정이 구비됐다. 피아노와 컴퓨터가 각각 두 대씩이다. 창문에는 다양한 표정의 아이들 사진이 방긋방긋 웃는다. 대식구가 사는 공간답게 온기가 넘치는 풍경이다.
물론 여기서 밥도 같이 먹는다. IMF 때 결식아동을 지원해주면서 공부방으로 발전한 파랑새나눔터는 원래 아이들이 밥을 먹기 위한 공간이었다. 성태숙 시설장은 “공부방 교사에게 아이들 끼니 챙기는 일은 참으로 번거롭지만 밥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라며 “식사시간은 아이들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는 귀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밥을 통해 삶의 기본적인 형태를 잡아준다고 할까요. 밥이 보통 가정처럼 공부방을 집답게 해주는 거죠. 집의 조건은 두 가지에요. 첫째는 같이 밥을 먹는 것, 둘째는 있는 사람이 계속 있어주는 것.”
먹고 싸우고 웃고 떠들고. 파랑새나눔터의 사는 모습도 일명 지지고 볶고의 연속이다. 7년 동안 매일매일 일상의 거친 파고를 넘어 지금까지 흘러왔다. 이 긴 세월 동안, 그에게 힘이 된 것은 사랑보다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파랑새나눔터에 모인 아이들은 남을 믿어서 상처 받아야 했던 특성이 있다. 그도 예외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혼이라는 어려운 과정 겪으면서 파랑새 친구들과 서로 옆에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배우고 느꼈어요. 때로 누군가 내 곁을 떠나고, 내가 떠나보낸 이도 있고.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넓게 생각해요. 사람이 어떤 것인가, 산다는 게 어떤 것인가 보편의 문제로 받아들이죠. 감정이 널을 뛰던 불안정한 시기는 지났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아이들에게 더 사랑을 주는 건 없어요. 흔히 하는 말대로,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같이 버텨나가는 거죠.”
그에게도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천적이 서너 쌍 있다. “무매력인 종족들. 노동시장에서 팔려야하는데 상품으로서 매력을 어릴 때부터 담지하지 못한 아이들.” 눈 맞추기에 서툴다거나 재치 있게 반응하지 못하거나, 옷차림 신경 안 쓰고 코를 후비는 등등. 지금은 이 아이들을 무리하게 고치려들지 않는다. 제 아무리 애면글면 속을 끓여도 아이는 결국 자기 삶의 경로를 밟을 것이고 스스로 감당해야할 고통의 몫이 있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에게로 향했다. “결국은 제 문제에요. 그 아이를 지켜보는 저의 과제가 생기는 거죠.”
아이들의 실패가 나의 실패는 아니다
‘내 자식’이라고 해서 그에게 다르진 않다. 처음부터 두 아이들을 파랑새나눔터에서 같이 키운지라, 사실 내 아이와 남의 아이 구분도 모호하다. 먼저 말해주기 전에는 누가 그의 아이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미치도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둘째(중2)는 개판, 엄마로서 의무방어만 하게 되는 과업충실형인 큰애(중3)는 좀 나은 개판”이다.
“밤에 셋이 누워 있으면 아들이 그래요. 꼭 남자 셋이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하하. 애들이 걱정이긴 해요. 싸가지도 없고 앞으로 쓸모없겠다 싶으니까. 제 과제는 걔네에게서 저를 분리해내는 거예요. 제 중심은 걔네도 있지만 저도 있어요. 저 아이들의 실패가 나의 실패는 아니다. 쟤네가 후진 거지 내가 후진 건 아니다.
애들한테도 항상 말하죠. 우리 셋 중에 제일 착한 것도 나, 제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나, 제일 괜찮은 애도 나, 우리 셋 중에 첫째로 쳐야 될 사람은 나라고요. 만약 우리가 돈 있다, 그럼 누굴 공부시켜야 할까? 당연히 나! 애들도 수긍해요. 그것만 잘 해줘도 된다고 봐요. 엄마로서 나다운 삶을 사는 것. 그게 애들을 도와주는 거죠.”
그에게 보통 사람이 느끼는 불안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가 고통이 얼마나 큰 학습의 장인가를 이야기하지만 고통을 아니까, 아이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자식의 고통을 대신 막아주려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명쾌한 해답은 없고 지루한 풀이만 있는 자식 문제에서 그도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숙고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욕망이 있고 무얼 느끼고 관계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를 알아간다.
이처럼 그에게 가족은 ‘나’를 알고 ‘사람’을 배우게 하는 장이다. 파랑새아이들에게 그랬듯이 자식문제도 “저쪽이 맘대로 안 되니까 내 맘을 바꾸고 만다.” 그러다 보니 딱히 애들 땜에 눈물바람 할 일도 없다. 감당이 안 돼야 울 텐데 그런 적이 거의 없다. 그를 울게 하는 사람은 딱 두 명이다. 아무런 표정 없이 집세를 두 배로 올려달라는 ‘집주인’과 ‘이명박’
빈곤청소년 문제 “투표권 얻어와야죠”
성태숙 시설장은 올해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정책위원장을 맡았다. 작년에는 서울지구 부회장이었다. 축하해주기 미안한, 축하받기도 서운한 부담백배 승진이다. 이 단체는 우리사회 빈곤아동과 청소년 문제를 얘기하는 일종의 이익집단이다.
“우리는 폭력에 맞서 싸워요. 보이든 보이지 않던 폭력이 행해지고 있어요. 그런데 왜 때려? 내가 왜 맞아야 하는데? 라고 이야기하기가 힘들어요. 그들은 당연히 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는 길들임에 익숙해져서 벗어나기 힘들고, 이게 아니잖아요, 설득하는 과정은 피로감을 주고. 정치적 힘이 있어야하는데…..어떻게 기르느냐고요? 투표권을 얻어와야죠.
저는 가난에 대해서 싸우지는 않아요. 용기가 없어 더 버리고 더 가난해지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에요. 인간들이 너무 악착같이 살아 대서 지구가 힘들잖아요. 이 시점에서 전망을 말하기조차 겁나는 게 사실이고요. 지속 가능한 발전과 전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싶으니까요.”
길항의 여정이다. 늘 그랬다. 가난을 원하면서 가난과 싸워야 했다. 파랑새 같은 곳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가도 파랑새는 확산되면 안 되는 곳이었다. 어쨌거나 삶이란 그래도 가야할 길이었고 자신의 인연 속에 사명이 있었으니, 고뇌와 빈곤을 무릅쓰고 예까지 달려온 길이 발아래 아득하다.
“제가 지금껏 일을 해온 바탕은 제 자신의 친구가 되었던 거예요. ‘니가 그런 생각 하는 건 당연해. 그렇지만 이렇게 해보자’ 저를 다독여요. 예전엔 난 안 그래, 나라면 안 그럴 텐데, 난 다르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다 똑같은 사람이란 걸 느끼죠. 우리가 그렇구나. 용서와 이해가 쉽게 돼요. 나이 드니까 저 자신과 화해가 되는 거 같아요.
다 똑같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가 시간이 오래 걸리죠. 그게 인간인 거 같아요. 보편이 특이한 것이다. 다 똑같지만 다름을 수용해야 하고, 그게 살아가는 과정이다. 하잘 것 없는 인생, 뭐나 되는 듯 열심히 살고 고민하고 그게 인생이다. 아, 이런 말은 수필집이나 인터뷰에 다 나오는 얘기인데, 저도 하고 있네요.(웃음)
이번 생은 이런 식의 삶 감내하겠다고 선택했으니까 불평불만 안하기로 했어요. 이제 죽어도 별로 여한이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숫기 없고 소박한 사람인데 너무 밀도 있는 삶을 살았어요. 저라는 사람이 감내하기에는 마음의 오르내림도 너무 컸고, 충분히 많이 경험했어요. 열심히 재밌게 잘 살았고, 감사한 게 많아요.”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삶의 하중이 빠져나간 얼굴, 오후 네시의 햇살처럼 따스한 표정이다. 오래지 않아 가리봉동이 허물어진다는 소리가 들린다. 높은 빌딩들 뒤로 아이들이 떠나면 파랑새나눔터도 이사를 가야한다.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 또 다른 누추한 골목길에 둥지를 틀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살며 사랑하며 배우기를 희망하는 우리의 태쌤은 ‘죽비’를 들고 기다리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