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에 흐드러진 봄꽃이 부러울까. 명동 KTF 오렌지갤러리에는 스물다섯 투명한 감수성이 형형색색 만개했다. ‘죽 쒀서 개줬다’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날’ 등 재기발랄한 제목이 말해주듯, 이십대의 희로애락을 그린 신예작가 조장은의 작품이 전시중이다. 그림일기의 솔직함과 감각적 색채미학, 유머러스한 한 줄 요약의 메시지를 통해 만나는 청춘스케치, ‘장은생각’속으로.
발랄하고도 시린 스물다섯 비망록 ‘장은생각’
아름다운 봄이다. 벚꽃이 꽃비로 난분분 흩날리는 4월, 명동 KTF gallery the orange에서 만난 그녀의 웃음에도 수줍은 봄꽃 내음 물씬하다. 청춘과 봄, 명동과 KTF, 그리고 조장은과 그림일기. 순서쌍을 이루는 이것들은 생동과 충만함의 은유로 줄줄이 스쳐간다. 암튼 하염없이 아름다운 것들이 피어나는 한 복판에서 그녀는 팔랑한 날개짓으로 발걸음을 붙든다. ‘골 때리는 스물다섯’ 이야기 좀 들어보시라고.
그림일기로 청춘의 고단함 달랜다
“발랄하기도 하지만 쓰리기도 한 20대의 이야기에요. 매일 일기 쓰듯이, 혹은 혼자 기도하듯이, 자신과 대화하듯이 그림을 그려요.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는데 그런 감정이 다 소중하잖아요. 잊혀 지지 않게 기록하고 싶었어요. 지금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모았다가 나중에 추억하려고요.”
어릴 때부터 유독 그림일기를 좋아하던 한 아이가 스물다섯 숙녀로 성장해서까지 손에서 크레파스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림일기가 진화한 것이 바로 조장은의 작품들이다. 청춘의 한 복판에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음직한 우울과 아픔 등 자잘한 감정의 편린들을 톡톡 튀는 감수성으로 담아냈다.
긴 머리의 그녀가 한 손으론 맥주병 나발을 불고 또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 명대사를 날린다. ‘밧데리가 없어서 참는다.’ 하트 귀걸이를 한 그녀는 넋이 나간 상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화장까지 다 했는데 걸려온 전화 나 오늘 못 만나’ 노란 개나리처럼 환한 웃음을 짓는 그녀는 말한다. ‘엄마 만원만’ 이슬만 마셔도 취하는 그녀는 소주가 아로새겨진 이불을 목 끝까지 당긴 채 간밤의 행적에 주파수를 마치고 있다. ‘기억이 안 납니다.’
위와 같은 작품들은 색채가 선명하면서도 투명하다. 한지의 일종인 장지에 가루물감인 분채로 채색했다. 이 안료는 여러 번 칠할수록 맑은 색채를 낸다는 특징이 있다. 칠하고 또 덧칠했다. 긴 시간 수고로움을 마다 않았기에 더 투명하고 깊은 감성이 살아났음을 알 수 있다. 하여 그녀의 작품은 생기발랄한 표정 아래 얼핏 깊은 심연의 바닥을 보게 되거나, 한바탕 웃고 돌아서는 끝에 묵직한 여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와 작품, 대상이 하나로...‘21세기 한국화’
“작품 따로 나 따로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예술을 위한 예술같은...그런 점에서 그림일기는 내가 평생 재밌게 할 수 있는 작업인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느낌을 얻고 표현도 풍부해지겠지요. 그 때마다 공감할 수 있는 대상도 달라질 테고요. 작품과 작가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 물아일체는 동양화의 기본정서이기도 하고요.”
그녀의 전공은 ‘한국화’다. 그 옛날에야 한복 입은 처자가 등장했다지만 IT기술도 패션도 첨단을 달리는 21세기 한국화는 긴 흑발머리의 위풍당당 그녀가 등장한다. 예전 어른들이 문인화를 그릴 때 글씨를 넣었듯이 그녀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등 상황에 맞는 글자를 넣어 조형미를 극대화했다. 일상의 무게를 유머로 버무린 재치, 감정의 핵심에 다가서는 사려 깊은 붓놀림으로 2008년 한국화의 가능성을 꽃피운 것이다.
조장은 씨는 KTF 신예작가 공모전에서 당선됐다. 그 인연으로 4월 1일부터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 명동 한복판에서 전시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다른 갤러리는 닫혀있는 공간이에요. 무슨 청담동 명품샵 가듯 맘먹어야 갈 수 있는 곳이잖아요. 발랄하고 창조적인 KTF 기업이미지도 그렇고 오렌지갤러리가 제 작품하고는 잘 맞는 거 같아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담았지만 더 많은 분들과 소통하고 싶거든요.”
* 연장전시 2008. 4.19-5.19 ‘GOURMET de COFFEE’ / 서초구 반포4동 97-4/ 02-596-9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