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때 사재혁을 같은 체급에서 만났더라면 두려웠을 것이다." 전병관 상비군대표팀 감독의 평이다. 그렇다. 사재혁은 네 차례 수술로 선수생활에 위기를 맞았음에도 남다른 집념으로 극복해 올림픽금메달을 따냈다. 극한의 중량 ‘금빛 바벨’을 들어 올린 세계 최고의 역도선수이자 한국 남자역도계의 훈남 사재혁(25)을 만났다.
"내 차례는 반드시 온다고 믿었다"
12월 태릉선수촌 역도장은 가을걷이를 끝낸 논처럼 텅 비었다. 며칠 전 2009세계역도선수권대회를 마치고 선수들이 모두 휴가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 대회에서 남자 77kg급 용상 금메달의 수확을 올린 사재혁 선수도 지금 휴가 중이다. 모처럼 찾아온 꿀맛 같은 시간이건만 그는 인터뷰를 위해 다시금 이곳을, 청춘과 열정과 눈물과 땀이 흠뻑 베인 역도장을 찾았다.한국 남자역도의 간판선수답게 근육질의 단단한 체구와 매서운 집념의 눈초리를 가진 그. 하지만 입가의 미소 만큼은 소년처럼 수줍다. 그에게 우문을 던졌다. 올림픽과 세계역도선수권대회 중 어느 금메달이 더 애착이 가는지.
“당연히 올림픽이죠. 모든 스포츠인의 꿈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거예요.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중1 때 역도를 시작한 순간부터 하나씩 다 떠오르더라고요. 중간에 힘든 적도 많았는데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천 골목대장, 역도하더니 용 되다 사재혁 선수는 강원도 홍천 출신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바깥놀이에 심취해 살갗이 까무잡잡해지도록 놀았다. 어려서부터 공도 잘 차고 뜀박질에도 능했다. 키는 작았지만 맷집이 좋아 골목대장을 도맡았다. 무엇보다 승부근성이 강했다. 공차기든 달리기든 처음엔 놀이로 시작하고도 다른 아이에게 지는 순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다. ‘체육신동’이라는 소문이 동네에 쫙 퍼졌다. 초등학교 때 홍천군대회 육상선수로 출전해서 1등을 차지했다. 그런데 강원도대회에서는 꼴찌를 기록해 예선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어린 재혁은 ‘세상은 넓고 잘하는 선수는 많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으리라.
“홍천중학교가 역도와 복싱 육성학교였어요. 테스트를 봐서 둘 다 합격했는데 복싱은 이겨도 맞고 져도 맞잖아요.(웃음) 그래서 역도를 택했죠. 처음엔 역도에 재미를 느꼈다기보다 선생님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어요. 역도장이 집에서 5분 거리였거든요. 수시로 드나들며 연습했지요. 중1 때 강원도대회에 나갔는데 2등을 했어요.”
초등학생 때 강원도대회에서 꼴찌를 했던 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오죽하면 예전에 같이 육상했던 친구가 메달을 목에 건 그에게 다가와 말하더란다. “역도하더니 용 됐구나! 사람이 달라 보인다!”
한국역도 기대주, 수술대에 네 번 오르다
친구의 말대로, 사재혁은 달라졌다. 일취월장 실력이 늘었다. 중2 때는 강원도 소년체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점차 대한민국 역도계의 유망주로 늠름한 위용을 드러냈다.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만 했다. 꾀도 안 부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주어진 ‘무지막지한’ 훈련양을 묵묵히 소화했다. 전국소년체전에서 2관왕을, 중3때는 모든 전국대회에서 1등을 휩쓸고 전관왕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개인기록이 20kg이상 늘었다. 고1에 올라가자마자 전국체전에 출전해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따냈다. “2등하면 괜히 열 받으니까”열심히 했는데 하다 보니, 홍천을 넘고 강원도를 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청소년 역도선수가 되어있었다.
바로 이때, 승승장구 한참 기량을 발휘하던 열여덟의 나이에 그는 날개가 꺾이고 만다. 무릎부상을 당했다. 이후 네 차례나 수술대 위에 오르는 등 순탄치 못한 날들을 보냈다. 청운의 꿈을 품고 한국체대에 입학식 날에는 어깨 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의사선생님에게 운동을 다시 못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대학에 오자마자 재활훈련만 했으니까 아무 존재감이 없었어요. 2년 동안 아무 대회도 참가하지 못했고요. 제가 지나가면 ‘쟤가 사재혁이야? 대학가더니 끝났네’ 이런 소리가 들렸어요. 바닥까지 추락한 거죠.”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었다.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다. 내가 과연 다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낙담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바벨을 들었다. 밤마다 불 꺼진 체육관을 찾았다. 날마다 조금씩 기록이 늘었고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2진 자격으로 태릉선수촌에 입성했다. 최적의 환경에서 연습에 임한 결과 2005년 세계주니어대회에서 동메달, 금메달로 2관왕에 올랐다. 한국역도 기대주에서 유망주 대열에 합류했다. 무릎과 어깨 부상이 완쾌될 즈음인 2005년에는 오른 손목을 다치는 등 부상의 악몽은 이어졌지만 그의 도전을 막지는 못했다.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 선발전에서 한국 신기록을 4개나 달성하는 등 놀라운 대회 집중력을 과시했다.
올림픽금메달리스트, 마음 비우고 기다리다
“부상이 잦아서 남들보다 연습을 많이 못했잖아요. 대회 앞두고 한두 달만 해도 성적이 좋으니까 저보고 역도천재라고 말해요. 그러면 저는 우기죠. 타고난 건 아니다. 나는 노력파다!(웃음)”
사재혁은 하루에 5만 톤씩 들어 올리는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다. 신체 전반이 모두 고루 발달해 근력이 대단하고 몸이 부드러우며 한 번에 폭발적인 힘을 내는 능력도 탁월하다. 또한 그의 곁에는 김광훈 선수라는 멋진 라이벌과 이형근 감독이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게다가 수차례 시련을 견디며 마음의 힘까지 바위처럼 단단해졌으니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올림픽 준비하면서는 욕심을 다 버렸어요. 마음을 비우니까 불안감이 덜하고 집중이 더 잘 되더라고요. 꾸준히 노력하면서 내 차례는 반드시 온다고 믿었죠.”
자기긍정의 암시대로 사재혁은 올림픽금메달리스트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으며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역도는 바벨을 1㎏ 더 들어올리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고독한 승부의 연속이다. 이것은 그가 느끼는 역도의 재미와 상통한다. “예전엔 무조건 잘하고 싶었는데 이제 자기한계를 극복하는 역도를 즐기게 됐다”고 말한다. 동네에서 놀이를 시합으로 즐기던 골목대장 꼬마가, 이제 세계대회를 놀이로 즐기는 최고의 역도선수가 된 것이다. 지구촌 위에서 금빛 바벨을 번쩍 들어 올리는 작은 거인의 모습을, 계속 기대해도 좋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