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자전, 주경야독, 온고지신. 이것은 소목장 권우범의 삶을 관통하는 세 개의 키워드이다. 부전자전은 안성지역 내로라하는 대목(大木)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전통 목공예의 기본을 익혀왔음을 말하고, 주경야독은 나무의 면만 보고도 그 성질을 아는 목리(木理)를 깨우친 고된 수련의 과정을 뜻하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추구해온 그만의 예술관이 온고지신이다.
“나무만 보면 마음이 바빠지죠”
권우범 소목장의 작업실은 경기도 남양주시 야산자락에 자리했다. 인근지역에 들어서기 시작한 신도시 아파트 공사장을 지나 좁다란 길 따라 삼십여 미터 오르자 ‘대권공예’ 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가 아침 해처럼 늠름하게 얼굴을 내민다. 공방 앞뜰에는 세 그루의 소나무가 기개를 뽐내며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밤중에 노란 달이라도 휘영청 뜬 날이면 좋은 벗과 술 한 잔 기울이기 딱 좋은 풍광”이라고 권우범 씨는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친구보다 더 살갑고 어떤 경치보다 더 설레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나무’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살 맞대고 곡진한 마음 나눈 나무 말이다.
보면 본 대로 만드는 아이
“썰매부터 딱총까지 놀잇감은 전부 제가 직접 만들었지요. 5학년 때 연탄 지게를 A자형으로 좌우 각도와 균형을 맞춰서 만들어서는 집집마다 나눠주었어요. 눈만 뜨면 행랑채 공방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보고 커서인지, 보면 보는 대로 뚝딱 거리면 뭐가 나오곤 했지요. 아버님께서 늘 ‘가르쳐줘서 하나 보고 하는 거지’라고 말씀 하셨는데 제가 그랬죠.”
일찍이 나무와 연장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그의 재주는 아버지에게서 얻은 것이다. 선친 故 권혁원 선생은 고향인 경기도 안성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대목이었다. 그림과 글씨에도 능했다. 예술적 안목과 정교한 손재주를 갖춘 선친은 장인 중의 장인이었다. 그는 아버지만 외출하면 연장괘를 몰래 열고 이것저것 만져보았다. 나중에는 들통이 나 꾸지람이 뒤따랐지만 남다른 눈썰미와 손재주를 지닌 아들의 가능성을 알아본 아버지는 6남매 중 그에게 가업을 물려주었다. 그는 대패, 끌, 톱 등 아버지의 손 때 묻은 연장 백여 점을 사무실 한켠에 고이 전시해 두었다.
“아버지는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 숨 쉬는 재료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사계절 순환에 따라 수축과 이완을 거듭하니까 가능한 한 많은 나무를 다뤄보고 그 성질과 특징을 파악해 쓰임새를 정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큰 산이자 나침반이 되어주던 아버지. 아들에게 탄탄한 기본기를 가르쳐 목공장인의 길을 열어준 아버지는 당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기신 때문인지, 애석하게도 나무의 품으로 영원히 돌아가셨다.
끝없는 나무사랑과 작품욕심
좋은 아버지의 자리는 좋은 스승이 대신했다. 열일곱에 만난 오양환 선생은 당시 국전작품 90% 이상을 제작하던 목공예계의 거장이었다. 0.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교한 손끝으로 나무를 다루던 스승에게, 그는 고되고 치열한 배움의 시간을 갖는다.
“나무만 보면 마음이 바빠졌어요. 별별 재료를 다 활용해 다양한 작품을 시도했지요. 기술 욕심이 많아서 남들이 퇴근해도 혼자 남아서 밤새기 일쑤였지요. 불상, 말, 호랑이 같은 입체조각부터 부조, 상감, 나중엔 집도 짓고 절의 사천왕문도 만들었어요. 대목이나 소목이나 짜 맞추는 원리는 같거든요. 아무튼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다 해봤습니다.”
그렇게 쌓인 하루하루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스무 살에 스승과 같은 대회에 나가서는 그가 특선장을 하고 스승이 입선에 머무른 것이다. 일찍이 ‘청출어람’ 발군의 실력을 뽐낸 그는 주경야독 나무와 씨름하며 십년 세월을 보낸 끝에 현대목공예의 기법을 완수하고 서른 살에 독립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전통목공예기법과 스승에게 전수받은 현대목공예기법을 아우르는 ‘온고지신’ 철학을 기반으로 권우범 고유의 목공예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규장각 현판부터 강남 보석점까지
“우리 전통을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야죠. 흙과 나무로 된 집에서 살았던 조선시대 기법으로 가구를 만들어서 시멘트로 만든 요즘 아파트에 갖다 놓으면 온도와 습도가 안 맞아서 뒤틀리고 갈라집니다. 좌식에서 입식으로 생활양식도 바뀌었으니 기능도 달라져야하고요. 전통의 우수함은 계승하면서도 그 정신을 현대생활에 맞게 변화시키는 게 목공예장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1990년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에 선정되었다. 2006년엔 목상감 무형문화재 소목장으로 지정됐다. 목상감이란 나무의 겉면에 무늬를 그리고 그것을 파낸 오목한 자리에 다른 빛깔의 나뭇조각을 끼워 넣어 무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괴목의 노란색, 흑단의 검은색, 박달의 하얀색, 화류의 붉은색 등 질감과 색감을 활용해 원하는 그림을 자유자재로 표현한다. 또한 호장태상감․ 당귀상감․ 태극상감 등 전통기법과 상감․ 금속상감(은․백동 등 금속을 파고 박는 것)등 현대기법을 병행하는 것이 그만의 특징이다.
그의 대표적 작품은 동서고금을 넘나든다. 서울규장각 현판과 국보서장, 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장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을 재현해냈고, 현재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는 김대건 신부의 성체함 제작과 사찰의 수미단, 닫집, 추모전 등 불교건축에도 관여했다. 파나마 대사의 외무공관 가구와 강남 일대 백화점의 고급 보석전문점 인테리어도 정교하고 감각적인 그의 손을 거쳤다.
책 쓰고 박물관 짓고파
“가장 공들이는 부분은 좋은 재료 구하기에요. 좋은 나무란 나무의 결, 즉 목리(木理)가 아름다운 나무지요. 제가 사람관상은 못 봐도 나무 관상은 잘 보거든요.(웃음) 같은 나무라도 개성이 너무 다른데 겉만 봐도 알아요. 목공예는 어떤 나무를 어떤 가구에 쓸 것인가 적재적소의 쓰임새를 찾는 게 관건이죠. 오래 봐도 싫증나지 않고 주인이랑 궁합이 잘 맞는 가족 같은 가구가 좋은 가구입니다.”
인터뷰 도중 그는 “나무가 너무 아까워서” “나무 무늬가 너무 예뻐서”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만큼 나무에 대한 욕심과 애정이 남다르다. 허투루 버리는 것이 없다. 큰 것을 만들고 남은 조각으로 오목한 물바가지도 만들고 새 모양의 과반도 만든다. 명장과 소목장의 영예로운 이름을 얻고 이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기자기한 소품을 만들고 좋아라하는 그의 눈빛에서, 썰매와 새총을 만들던 사내아이의 모습이 스친다. 한평생 나무와 벗하는 것이 마냥 행복한 권우범 소목장은 나지막이 세 가지 소원을 밝힌다. “후대에 물려주고 싶은 멋진 작품을 남기는 것, 심도 있는 전문가용 목공예 기능서적을 쓰는 것. 목공예 기능박물관을 짓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