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겨울이 될 줄은 몰랐다.백일 지나고 이백일 지나고 삼백일 지났다는 얘기를 듣는 동안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로. 매일 미사가 열린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 불안했다. 가느다란 실로 발목을 매단 것처럼 마음이 쓰였다. 한번 가보자는 결심만 주기적으로 남발했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사태가 해결됐으면 좋았으련만, 그런 일은 기어코 생기지 않았다. 용산참사 317일 째 미사에 참석했다. 저녁에 시간 되면 용산에 갈래? 친구에게 문자를 넣어 기습적으로 동행했다. 한 사람이라도 체온을 더 보태면 좋을 것 같았다.
한 오십여명 모였을까. 조촐했다. 회색 의자에 은박지 방석을 깔고 맨 뒷줄에 앉았다.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이었다. 엄마가 절두산 성지에 계셔서 미사에 몇 번 참석해봤는데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됐다. 신부님이 말씀하시고 기도하고 중간 중간 찬송가를 불렀다. ‘금관의 예수’도 나왔다. 가사도 멜로디도 참 구슬픈 노래.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어디에서 왔나 표정없는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갈곳없는 사람들..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 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자는 후렴구가 크게 크게 밤하늘로 울려퍼졌다.
유가족 이상림씨 부인이 앞으로 나와 발언했다. "오늘이 남편의 생일입니다." 남편은 떠났고 생전에 남편이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은 구속돼 있다고 하는데 당신의 낡은 상복처럼 검고 휑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상복을 입고 일 년 가까이 지내면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갈 것이다.
고마웠다. 매일 미사를 열어주시는 신부님들. 의연하게 투쟁하는 유가족들. 앞자리 아주머니 옆에 계신 아저씨. 다 감사했다. 그런 생각으로 가슴이 뜨거워져 있는데 신부님이 그러신다. 사람들이 우리한테 고맙다고 하는데 누가 누구한테 고마워해야하는 것이냐고. 신부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맞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가족은 신부님과 시민들이 고마울 것이고, 시민들은 신부님과 유가족이 고맙고, 신부님은 유가족과 시민들이 고마울 것이다. 고마움 트라이앵글.
신부님은 자책하셨다. 일주일에 신부 몇 십 명이 몰려다니며 일 년 다 되도록 매일 기도하는데 해결이 안 된다고. 우리 기도발이 이거밖에 안 돼서 부끄럽다고 말해 따스한 웃음을 불어넣어 주셨다. 3000쪽 수사기록 공개할 때까지 계속 기도하신다고 다짐하셨다. 그리곤 진짜 고마운 사람들 얘기를 전해주셨다. 인권의사모임에서 도울 일 없나 고민하다가 유가족 상담을 해주기로 했단다. 전쟁과 대형사고 같은 것을 겪은 이들에게 나타나는 외상성 신경증 치료같았다. 신청자가 19명이나 된다. 암덩이 같은 악몽의 기억이 소멸, 승화되도록 잘 치료되면 좋겠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이웃과 나누는 이들은 아름답다. 고마워하지 말라지만 고마웠다.
8시에 미사가 끝났다. 영정 앞에 초를 올리고 용산 4구역 일대를 지나왔다. 논밭도 없는데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그 동네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사고가 났던 남일당 건물 외에도 벌거벗고 허물어진 5층짜리 앙상한 건물들이 노숙자처럼 곳곳에 누워있다. 건너편으로는 으리으리한 높은 빌딩이 솟아 있어 일대 형국이 몹시 부조화스럽고 기괴스러웠다. 전국 어디서나 보이는 이마트의 논란 간판은 여기서도 보름달럼 늠름히 빛나는데 어쩐지 이쪽 길가에는 그 흔한 던킨도너츠도 김밥천국도 없었다. 영화 세트장보다도 더 진짜 가짜 동네 같았다. 21세기 삽질공화국, 성형중독으로 일그러진 서울의 얼굴이다. (아래 사진은 진보신당 사진동호회의 것)
춥고 배고파서 호떡 하나 사먹었다. 밥집을 찾아 헤매는데 인도에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가 멈춰서 있다. 예전부터 궁금했다. 리어카를 끄는 분들은 거의 다 리어카에 몸집이 가려질 정도로 체구가 작다. 뒤에서 보면 폐지만 섬처럼 혼자 떠간다. 앞에서 보면 아저씨들은 리어카 손잡이 안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리어카 끌다보니 힘들어서 몸집이 점점 줄어드는 걸까. 역시 리어카에 갇힌 그 아저씨도 잠시 숨을 고르시는 중이신지 문제가 있는지 상황이 분간이 안 갔다.
친구랑 둘이서 도와드려야 되나 어쩌나 머뭇머뭇 맴도는데 아저씨가 좀 밀어달라고 하신다. 몸을 반으로 접어 아래를 보니 가로수 지지대 테두리 홈에 바퀴가 빠져있다. 우린 호떡 먹던 힘을 다해 밀었다. 리어카가 기우뚱 하면서 바퀴가 인도 위로 쑥 올라갔다. 아저씨가 됐다! 하시더니 우리에게 힘 세다고 칭찬하셨다. 고마워요! 큰 소리로 몇 번을 반복하신다. 아니요. 저희가 고맙죠. 누가 누구한테 왜 고마운지, 역시 모르겠다. 그냥 재밌고 고맙다.
겨우 찾아간 근처의 밥집. 50대 후반 즈음의 부부가 하는 식당이다. 오징어볶음부터 냉면까지 벽면에 붙은 메뉴가 족히 스무 가지는 돼 보인다. 이런 곳이 다 김밥천국이 되어 연변아주머니들이 서빙을 하고 있다. 여기도 조만간 사라지겠지, 그러면 저분들은 다시 식당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음식이 나왔다. 조미료 살짝 들어간 김치찌개가 그렇듯이, 빛깔도 좋고 칼칼하고 맛있었다. 걸쭉한 찌개 국물 한 수저 떠먹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맨 구석 우리 테이블 머리 위에 매달린 TV 드라마를 보시느라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에게 입모양으로 말씀드렸다. 맛있어요^^ 나중에 밥값을 계산하는데 아주머니가 혼잣말로 아가씨들 예쁘다하시더니 몇 살이냐고 물으셨다. 같이 간 친구가 열 살 연하의 예쁜 동생이었다. 그 날도 테이블을 채운 손님들 평균연령이 높았다. 이 심난한 동네 허름한 식당에 파릇파릇한 친구들이 올리 없다. 비교적 젊은사람을 오랜만에 보셔서 반가우신 거다. 그 심정 안다. 나도 교복 입은 아이들 보면 생기짐 그 자체가 예뻐서 자꾸 눈이 가고 말 걸고 싶으니까.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지는데 친구가 다음에 또 같이 오자며 손을 흔들고 간다. 용산에서 덕소방향 국철이 배차간격이 늦다. 추위에 떨고 있나 싶어 지하철 잘 탔는지 문자를 보냈더니, 희로애락 데이트 즐거웠다고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메시지가 왔다. 내가 고맙지. 속으로 문자를 전송했다. 고마움의 주체와 대상이 오늘은 끝까지 헷갈린다. 집에 와 아들에게 용산참사가 317일이나 됐다고 말해주었더니, 삼.일.칠? 오늘이 특별한 날이었냐고 묻는다. 만난지 백일, 이백일 같은 아름다운 숫자의 조합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네 얘기 듣고보니 그렇구나. 어차피 사랑공식의 원리는 같다. 만약 그 때까지 해결 안 되면 333일째 미사에 가보던가. 더 멋진 날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