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이 있었어요. (경기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인) 대추리 싸움 하다가 논구덩이에서 플래카드에 목이 졸려 경찰에 연행돼 가지고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거기 병원에 쫓아온 후배가 그랬대요. 형님은 아직도 이러고 사시냐고, 세상 좋아졌는데 이제 그만하시라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그러더래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왔다고? 그 세상이 왔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라고?’ 지금도 그 이야기만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박은옥)”
현관문 앞에서 이틀째 뒹구는 한겨레신문을 펴자 정태춘 박은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요즘 들어 신문을 외면했다. 괴롭고 무기력해지니까 안 봤다. 헌데 구석에 방치된 것은 신문이 아니라 시대의 진실이고 정태춘의 노래였다. “군부독재가 물러났지만 이젠 더 공고하고 사악한 자본의 독재가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군부독재와 싸우던 사람들이 그런 변화에 대해선 외면하고 그 질서 속에 들어가 명랑한 얼굴로 개혁을 말하고 민주화를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정태춘선생님의 말씀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두 분이 5년 만에 공연을 하신다. 공연도 보기 전에 이미 노래 스무 곡쯤은 들은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첫날 공연을 택했다. 그리웠다. 무대 위에서 낯설어 하는 모습, 실수하고는 순박하게 웃는 두 분 모습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공연 시작 전, 로비를 서성거리는데 임순례 감독이 보이고 김제동 씨도 지나간다. 관객층도 사오십 대가 주류다. 동창회 같았다. 그 옛날 최루탄가스 매캐한 거리를 누비던 '정태춘 세대'는 다 자란 어른이 되어 모였다.
잠시 밖으로 나왔다. 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이 자리한 정동은 가을을 위한 거리다. 노란 은행나무가 천연 조명이 되어 은은히 비추는 가을밤 정취를 만끽하는데 한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걸린다. 드라마에서처럼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동선을 따라가서 옆모습을 살핀다.
“저 혹시... 선생님?”
꿈이 아닐까. 만약 내가 ‘TV는 사랑의 싣고’에 나간다면 꼭 찾고 싶었던 분.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 내 인생의 첫 스승. 가슴에 품어두고 그리워하던 선생님을 만났다.
“안 그래도 가끔씩 니 생각을 했다. 어떻게 지내나...내가 너를 찾기는 어려워도 너는 나를 찾을 수 있을 텐데....했지.” “선생님.. 지금 어떻게 지내세요..?” “나 애들 가르치지..” “복직하셨어요?” “그럼..” “선생님 아들..한결이도 많이 컸겠네요?"
"그럼 벌써 대학교 2학년인데..내가 한결이를 6월 8일에 낳았고 8월 5일에 해직됐잖아.” “선생님 한결이 낳자마자 해직되셔서 그 때 제가 다 앞이 캄캄했는데.....”
이산가족 상봉처럼 눈물이 쏟아져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고1 때 우리학교로 전근을 오신 국어선생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칠판에 하얀 백묵으로 의로울 義 이을 延 을 쓰시면서 ‘의로움이 이어진다’ 정의연, 이라고 선생님 이름을 소개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온화하고도 올곧은 품성에 반해서 그 때부터 국어공부에 목숨 걸었다. 국어공부만 했다. 그리고 선생님과 세상 공부도 병행했다. 학교가 파하면 선생님이 적어주신 책 목록을 들고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읽었다. 백기완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전환시대의 논리> 거름 출판사의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동녘에서 나온 <철학에세이> 등등.
선생님은 이름대로 의로움을 지켜가셨다. 60년 전통의 사립고답게 50-60대 보수성향의 교사들이 장악한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유일한 전교조 해직교사가 되셨다. 외로우셨을 선생님 곁을 몇몇 친구들과 함께 지켰다. 해직교사들이 농성하는 명동성당을 틈나는 대로 찾아갔었다. 민주동문회를 조직해서 뜻 맞는 동문들과 선생님을 도울 방편을 찾기도 했으나 선생님을 지속적으로 돕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여러모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는 인문사회분야의 크고 작은 간행물이 범람했다. 스무살 때 어떤 출판사의 기자시험을 봐서 객원기자로 활동했다. 첫 취재가 농활 현장 탐방 기사였다. 친구 농활에 동행한 후 원고를 작성했다. 선생님이 그걸 꼼꼼히 교정해주셔서 생애 첫 기사를 성공적으로 마감했다.
그리고 또 결혼을 앞두고는, 할 일도 많은데 지금 꼭 결혼을 해야 하는가, 이 사람과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가 선생님에게 남편을 소개시켜드렸다.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하려고 했다. 선생님이 좋은 점수를 주셔서 결혼했다. 나는 노조 상근간부가 되어서 더 바빠졌고 선생님도 전교조 일로 바쁘셨다. 그리고 투쟁의 시대는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선생님과의 연락도 끊겼다. 살면서 문득 가끔 차창위로 선생님 미소가 떠올랐다. 선생님의 그 외유내강한 표정과 음성이 귓전에 들려왔다. ‘선생님은 잘 살고 계실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정태춘이잖아...”
선생님은 교사모임에서 정태춘 공연을 오셨다고 했다. ‘저는 그리운 것이 많아서 왔어요.’ 속으로 말했다. 나중에 친구가 선생님이 ‘우리 또래’ 밖에 안 돼 보이는데 도대체 몇 살이신 거냐고 초임교사로 가신 거냐고 잘생기셨다고 좋은 분 같다고 말했다.
“우리 선생님 정말 잘생겼지? 하나도 안 변하셨어. 딱 내 타입이야. 난 저렇게 선이 곱고 부드러운 사람을 좋아하나봐. 서태지도 그렇고 우리 신랑도 그렇고. 비록 키가 170 넘는 사람이 없지만;; 선한 얼굴이지.” “거기 또 서태지가 왜 나와 -_-;;” “나 선생님 정말 보고 싶었거든. 작년에 촛불집회에 나가면서도 혹시 선생님이 나오셨을까 두리번두리번 찾았는데...” “내가 가는 집회에서 나랑 만나셨을 가능성이 더 크네.”
얼마 전까지 교사였던 친구가 말한다. 전교조 모임에서도 그 때 해직됐다가 복직하신 분들은 내공이 다르다고, 아무 말 안하셔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고 말했다. 내게도 선생님이 그랬다. 보이지 않았지만 큰 산처럼 힘이 됐다.
공연장에 불이 꺼지고 정태춘 박은옥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신다. 순결한 첫 음. 떨림. <빈산> <북한강에서> <회상> 가슴에 켜켜이 쌓아두었던 그리움의 둑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강물처럼 회한이 밀려왔다. 두 뺨에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른다. 목에 칭칭 감았던 목도리가 다 젖어서 풀었다.
“딸이 독립해서 둘이 살거든요. 식탁에서 둘이 밥 먹으면서 세상의 미래에 대해, 인간이라는 종이 희망이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는 부부는 우리밖에 없을걸요.(웃음)” 인터뷰기사 중
인간이란 종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오신 두 분. 예전보다 더 깊어진 목소리로 그 모습 그대로 노래하신다. 지금 어느 자리에선가 같은 노래를 듣고 계실 나의 선생님도 여전하다. 책 몇권 담은 배낭을 둘러메고 소년 같은 미소짓는 그 모습 그대로이셨다. 외롭게 높고 쓸쓸하고 가난하게 살아온 이들. 눈물겹게 안쓰럽고 고마운 사람들. 우리시대의 바보들.
<우리들의 죽음> 이곡은 맞벌이 부모가 어린 자식들이 위험하니까 밖에서 방문을 잠그고 일하러 나간 사이 방에서 불이나 죽은 아이들을 위한 노래다. 비극의 노래. 통한의 노래. 가슴으로 부르고 가슴으로 듣는다. 공연장이 죽음의 시대를 애도하는 눈물로 조용히 차올랐다. 폐부를 찌르는 이 징한 감동이 얼마만인가. 고목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사오십 대 남성들의 가슴에 이슬같은 눈물꽃을 맺히게 하는 것이 정태춘 박은옥의 힘이다.
기타, 바이올린, 첼로, 하모니카와 시와 사진이 어우러지는 낭만의 무대가 이어졌다. 영화배우 문소리가 무대 위에 올라와 정태춘 선생님과 시를 읊었다. “속기가 빠진 맑은 노래가 감동적이다. 제 연기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희망을 꿈꾸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다부지게 말한다. 중간에 이벤트 시간도 있었다. 정태춘 선생님이 분위기를 훈훈하게 하려고 ‘20주년 골든앨범’을 관객에게 선물로 준비했다는데 썰렁했다. 재밌게 한다더니 그게 뭐냐고 박은옥 선생님에게 구박받으셨다. 김제동이 구원투수로 잠깐 무대에 올랐다. 산에 다녀오는 길이라서 추리닝 바람이란다. 위트 있는 말솜씨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고는 객석으로 돌아갔다. “제가 공연 보다가 좀 많이 울어서 얼굴이 엉망인데 다시 음악 속으로 침잠하겠습니다.”
<정동진> <서울의 달> <장서방네 노을>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고유한 음율따라 일렁이는 선율. 달빛처럼 시린 음색. 산사의 종소리처럼 멀리 퍼지는 박은옥의 낭랑한 소리. 화들짝 정신을 일깨우는 들불 같은 엄중한 목소리. 정태춘의 뜨거운 울림. 오래 들어앉아 생각을 키우게 만드는 사려 깊은 노랫말. 꾸밈없이 꾸밈없이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같은 무욕의 표정, 힘 넘치는 저항의 노래, 따뜻한 삶의 노래들....
이 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편지 낭송'이었다. 정태춘 선생님이 종이를 주섬주섬 꺼내서 읽는다. “사랑하는 아내 박은옥에게...” 박은옥 선생님이 깜짝 놀란다. “어..뭐하세요?” 정태춘 선생님은 묵묵히 읽으셨다. “당신은 나보다 더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소..” 박은옥 선생님이 손으로 눈가를 가리시다가 감정이 복받쳐 무대 밖으로 황급히 나가셨다. 낭독은 계속됐다. 당신이 나보다 더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이 공연은 박은옥의 30주년을 위해 준비한 공연인데도 또 내가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내 뜻대로 했다고, 음악적인 부분에서 늘 내 의견만 내세운 것이 많이 미안하다는, 나 같이 부족한 사람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그런 내용이 절절히 이어졌다.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박은옥이라도 되는 양 숨죽여 편지를 들으며 감격의 눈시울을 적셨다.
박은옥 선생님이 다시 무대로 오르셨다. 정태춘 선생님이 예쁜 장미꽃 바구니를 선사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동반자의 모습을 보여준 두 분에게 열렬한 환호와 지지의 핑크빛 박수가 쏟아졌다. 앵콜곡으로 <떠나가는 배>와 <사랑하는 이에게>를 함께 부르고 공연이 끝났다.
참혹한 현실, 쓸쓸한 인생살이 그런 노래를 듣는 시간인데 어쩐 일인지 꿈처럼 황홀했다. "'나는 당신들의 문명열차에서 뛰어내렸다’ 말하면서 고작 그 비상구 앞에 무기력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현재 내 모습"이라던 정태춘. 그 옛날 낡은 깃발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고집스럽게 비상구를 지킨 '혁명의 가객'에게 나는 고개 숙여 큰 절 올렸다.
"고맙습니다."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지만 정태춘 선생님이 비상구에 계셔주셔서, 다시 용기 내어 기타를 잡아주셔서 내 그리운 선생님을 만났다. 유명한 갈비집이 아니고 신도림역도 아닌, 정태춘 박은옥 공연에서 옛 은사를 만난 게 얼마나 벅찬 기쁨인가. 허물투성이 인생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흘러온 내 삶에게 잘했다고 작은 목소리로 칭찬했다. 삼십대 마지막 가을에 뭔가 멋진 존재 확장의 사건을 꿈꾸었는데 두 분 덕분에 소원을 이뤘다. 정의연선생님과의 재회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가장 낭만적인 선물이다.
정태춘 박은옥 두 분이 언제까지나 생명을 따뜻하게 품는 흙냄새 나는 노래 불러주셨으면 좋겠다. 아니, 노만 저을 뿐 한마디 말이 없는 사공이어도 좋다. 암울한 시대의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로 우리 곁에 있어달라고 철없이 조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