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수레’는 딸아이 애칭이다. 일종의 자화자찬인데, 자기를 그렇게 부른다. 원래는 꽃처럼 예쁘고 방긋방긋 웃는단 뜻의 ‘꽃방스’였는데 어감이 뚱뚱해 보인다;;며 가냘픈 ‘꽃잎이’로 바꾸겠다더니만 또 어느 순간부터 꽃잎이 수북한 ‘꽃수레’가 좋겠단다. 그런데 꽃수레에 대한 과도한 애착과 반복사용이 문제다. 삼복더위에 매미 우는 소리가 따로 없다. 원래 목소리도 또랑또랑한데다가 하루 종일 말끝마다 '꽃수레' 타령을 하는 통에 밤이 되면 귀가 웽웽 어지럽다. 이런 식이다.
엄마 밥 줘 해도 될 걸 “엄마, 꽃수레 밥 줘~” 나 숙제할게 가 아니라 “꽃수레 지금부터 숙제할게~” 외출 중에 전화해서는 “엄마, 꽃수레야. 꽃수레 학교에서 방금 왔어, 엄마 없어서 꽃수레 쓸쓸해. 근데 꽃수레 오늘 간식이 뭐야?” (핸드폰으로 꽃수레가 돌진해오는 느낌이다 -.-;;)
지난주 아들시험기간에는 아빠한테 오빠가 밤에 먹을 간식 좀 사오라고 부탁하랬더니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아빠, 집에 올 때 꽃수레간식이랑 오빠간식 좀 사와~”
얄밉게도 자기를 앞에 쏙 끼워 넣었다.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사랑받으려는 의지가 거의 꺼져가는 불씨를 살릴 정도로 지극하다. 대체로 귀엽고 예쁘지만 온종일 집에 같이 있으면 자기 전에는 멀미가 날 지경이다. 저번엔 듣다못해 물었다.
"너는 왜 ‘나’란 말을 안 쓰고 ‘꽃수레’라고 하니?"
일초도 망설임 없이 답한다. “나(라는 말)보다 꽃수레가 더 예쁘니까.”
아무리 그래도. 꽃노래도 삼세번이란 말이 있는데 그건 아니?
충고하려다 참았다. 민원을 파악할 겸 아들에게 물었다.
“서형이가 꽃수레란 말을 하루에 몇 번 쓰는 거 같니?”
“적어도 1분에 한번은 쓰니까 한 시간은 60분. 집에 있는 시간을 곱해보세요. 엄청나요. 쟤는 하여튼 입만 열면 오바야 -_-”
빈 수레가 요란한 게 아니라 우리 집은 꽃수레가 요란하다.
# 꽃수레가 기특하다
그저께다.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부추를 벗자마자 뭐가 그리 급한지 현관 바로 앞에 철퍼덕 앉아서 책가방 지퍼를 연다. “엄마~ 꽃수레가 수학을 너무 잘해서 선생님이~” (가방을 뒤적뒤적)
난 여기까지 듣고는 무슨 '상장'이라도 받아온 줄 알았다. 아님 칭찬 스티커라도. 그런데.
" 2학년 수학책 주셨다! 바로 이거야~ 1학년 때 수학 잘한 사람만 주는 거래! 그래서 꽃수레도 받았어 ^.^
엄마, 꽃수레 엄청 기특하고 대견하지?”
저 자부심 가득한 ‘꽃수레, 목소리’ 이건 거의 2009년도 수능 전국수석자의 표정이다. 의기양양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단세포 같은 녀석이, 명언노트 쓸 때보면 꽤 신통하다. 삶의 본질을 꿰뚫는 주옥같은 문장을 잘도 고른다.
‘귀를 위로해주는 것은 오직 하나 음악뿐이다’ 이건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같은 음악가 위인전 읽을 때 본 것이다. 나도 맘에 드는 명언이다. 딸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도 수첩에 써놓아야겠다고. 언제 어디서나 평생 네 곁을 지켜줄 두 가지는 책과 음악임을 꼭 기억하라고.
‘자식은 어려서 부모를 찾고 부모는 늙어서 자식을 찾는다’ 십년전 쯤 남편이 절에서 구입한 ‘명상의 말씀’ 테이프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름휴가 다녀오는 길에 차에서 들었다. 저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봐서 설명해줬다. 사람은 늙으면 힘이 없어지니까 자식이 부모를 돌본다는 거라고.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기억나지? 그 동화책에도 나오잖아. 젊은 엄마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으니까 어른이 된 아들이 찾아오잖아. 그 얘기야.”
안그래도 그 책 읽어줄 때마다 뭉클했는데 지도 뭔가 와 닿았는지 옮겨놓았다. 근데 여덟 살이 고른 명언으로는 심히 궁상맞다.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봉하마을에서 얻은 노란손수건에 박힌 글의 첫 문장이다. 딸아이는 노란손수건을 맘에 들어했다. 노무현대통령이 밀짚모자 쓰고 자전거 타는 그림을 잘 그렸다고 부러워했다. 자연스레 옆에 글도 큰 소리로 읽어보고는 한껏 고무되어 명언노트를 찾았다.
한겨레신문에 나온 노무현대통령 저서 <성공과 좌절> 광고 카피 문구일 거다. ‘나의 실패가 여러분의 실패는 아니다’ 마루에 있는 신문을 어쩌다 봤고 명언으로 삼겠다고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왜 저 말이 끌렸을까. 또 노무현대통령 관련 글에는 왜 꼭 화살표로 ‘노무현이 말함’ 이라고 썼을까. 물어봐야겠다.
‘내 곁에 좋은 친구 한 명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명언이다. “엄마 꽃수레는 명언 중에서 이 말이 제일 좋아!” 명언노트 볼 때마다 정말 좋다고 감탄한다. 출처는 학교신문 '월촌소식지' 전교회장 당선자 당선소감 중 일부다. 딸아이의 절친 오빠가 부회장으로 당선되어 신문에 얼굴이 나왔다. 아는 얼굴이 있으니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발굴한 문장’ 같다. 집에 오자마자 “누구 오빠가 나왔고 또 정말 좋은 명언을 찾았다” 며 흥분해서 소식지를 보여줬다. 내 곁에 좋은 친구 한 명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친구랑 인형놀이를 재밌게 한 다음 기분 좋을 땐 종종 암송도 한다. 딸아이가 아무래도 친구 좋아하는 애비 에미 빼닮았는지;; 관계지향적인 성향같다. 저 명언에 반한 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작다고 얕보지 말고 서로서로 행복하게 살자' 동화책 본 소감을 몸소 한줄 글귀로 요약한, 나름 창작명언이다. 그렇게 고사리 손으로 눌러 쓴 명언노트가 제법 곱씹어 볼 만하고 잔잔한 울림을 주는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채워지는가 싶었는데, 마지막이 돌발적이다.
‘차를 기다릴 땐 인도에서!’
이것의 출처는 가정통신문류의 유인물이다. 나한테 학교에서 배웠다며 교통질서 지키기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더니 “선생님이 참 중요한 말이라고 했으니까 이거 명언노트에 쓸래” 그런다. 수첩을 꺼내어 쓱쓱 적었다. 그런데 다 쓰고 나니, 자기도 어감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뭔가 앞의 고상한 명언들과는 좀 차원이 다르고 튄다고 여겼던 걸까.
대뜸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