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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여덟살인생 - 딸의 명언노트


엄마 나도 이제 슬슬 명언노트를 써야겠어!”

어느 날 딸이 인형놀이를 하다가 툭 던지듯 말한다. 느닷없이 웬 명언노트인가 싶어 의아했는데 곧 상황을 파악했다. 한달 전인가 내가 아들에게 '너도 이제부터 책 읽다가 좋은 구절을 모아 명언노트를 써보라'고 말한 걸 옆에서 귀담아 두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다. 딸은 둘째아이 특유의 '시샘과 모방'이 생존의 동력이다. 내가 아들한테 '학교에서 오면 수저통 좀 꺼내놓으라'고 말하면 딸은 그 다음날부터 현관에서 신발 벗자마자 수저통부터 싱크대에 올려놓는 식이다. 

다 좋다. 명언노트 결심 또한 바람직하다. 그런데 문제는 딸이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 때는 주로 인형놀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놀이터에 나간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야 책에 손이 가는데, 독서취향이 그리 고급하지는 않다. ‘전래동화 전집’이랑 ‘캐릭캐릭 체인지’ ‘라라의 스타일기’ 같은 핑크만화류를 본다. 그걸 마르고 닳도록 섭렵하고 주인공 캐릭터를 보고 그리기도 한다. 워낙 재밌게 노니깐 특별히 제재하지 않았다. 첫 애 같았으면 창작동화, 과학동화 같은 교양도서로 골라서 몸소 목청 터져라 읽어주었을 텐데. 둘째는 귀찮기도 하고 모든 행동에 대해 한없이 관대해진다. 거의 부처님의 수준의 사랑과 자비심이 솟는다고나 할까. 책을 봐도 예쁘고 안 봐도 예쁜데 명언노트까지 쓴다니까 황당하면서도 신통방통 기특했다. (사진은 8살 설날 놀이공원에서)

여덟살 인생의 명언노트 첫 문장은 바로 이것.  

‘나한테는 임무가 있소’

실은 전에 뽑아둔 문장이다. 작년엔가 “나도 엄마처럼 책에다가 줄 칠래~” 라며 자못 의욕적인 표정으로 만화책에다 까만색 사인펜으로 자까지 대고 반듯하게 밑줄을 그어두었던 것이다.  그걸 쓰면서 딸이 물었다. 

"엄마, 근데 임무가 뭐야?” 
“응. 자기가 맡은 일을 임무라고 그래. 근데 서형이는 왜 그 말이 좋았어?”
“그냥. 임무가 멋진 말 같아서......” 

말끝을 흐리며 베시시 웃는다.
비록 작은 아이라도 자기 생에 주어진 어떤 임무를 느끼는 걸까. 궁금했다. 
 

두 번째 오른 명언은 ‘백문이불여일견’ 출처는 <뚱딴지 속담여행>이고, 세번째 명언으로 파리고등사범학교가 등재된 사연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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