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엄마들이랑 만나면 재밌다. 웃다가 배꼽 빠진다. 애들 키우는 얘기, 남편 얘기, 시댁 얘기 등 일상적 사건이 생생한 입말로 생중계 되면 “맞아 맞아” 공감하다가 한바탕씩 웃음이 터진다. 우리끼리 말한다. “그 집에 안테나 끼우고 바로 방송국에 송출하면 시트콤 혹은 카메라 고발”이라고. 또 수다가 물이 오르면 자기도 ‘애 잡으면서’ 짐짓 그러지 말라고 서로 충고도 한다. 나부터도 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객관화되니 겸연쩍어 그러는 것이다.
임순례 감독의 <날아라 펭귄>은 이런 우리네 일상을 소재로한 영화다. 2학년 아들 잠 안 재우고 3학년 수학 문제집 풀리는 엄마, 채식주의자 왕따 시키는 직장인, 퇴근시간마다 친구 섭외하는 처량 맞은 기러기 아빠,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정년퇴임 남성의 황혼이혼 소동 등 4개의 에피소드가 나오는 옴니버스 구성인데, 목동아파트에 몰래카메라 설치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영화가 살아있다. ‘수다의 리얼리즘’이 돋보이는 대사와 군더더기 없이 세련된 연출로 인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 제작한 일곱 번째 인권영화로 2009년 대한민국 풍속도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시대상을 충실히 반영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서 집집마다 벽면에 걸린 ‘가족사진’이 시선을 끌었다. 우리는 왜 가족사진을 찍을까. 그리고 왜 관공서에 태극기 걸어놓듯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을까. 눈 뜨면 맨날 보고 사는 얼굴인데. 우리 집에도 가족사진이두 개나 있다. 하나는 서형이 6개월 즈음 이제 둘째까지 다 낳았다고 시댁식구 전체가 가족사진을 찍었을 때의 것이고, 또 하나는 사진하는 선배가 찍어준 나름 화보처럼 연출한 가족사진이다. 우연히 찍었고 찍었으니까 걸어놨는데 ‘홍보효과’가 은근히 크다. 폼 나는 가족사진이 두 개나 있으니 속사정이야 어떻든 누가 봐도 ‘멀쩡한 가족’처럼 보인다. 집에 손님들이 오면 “행복한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한마디씩 한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사교육에 시달리는 아이는 마음의 병이 들고, 기러기 아빠는 라면 봉지 쌓아가며 외로이 빈 집을 지키고, 황혼에 접어든 부부는 소통불능으로 사이가 멀어지는데 사진 속의 그들만큼은 환하게 웃고 있다. 구질구질한 현실의 대척점에 반질반질한 모습의 가족사진이 있다. 그렇게 화평한 시절의 가족사진은 ‘대한민국의 정상성’을 상징하는 기표의 의미를 갖는다.
저 가족사진 한 장 남기기까지, 즉 ‘남들처럼 사느라’ 가족 구성원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고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가. 아빠는 돈 버는 기계가 되고 엄마는 매니저처럼 실시간 일정 체크하면서 아이에게 명령하고 아이는 햇빛도 못 보고 학원을 전전하고 여름방학이면 쉬지도 못하고 온 가족이 밀리는 길 뚫고 휴가도 다녀와야 한다. 행여 가족구성원들 간에 갈등과 문제가 있어도 ‘남들처럼 사는 척 하느라’ 상처가 곪아터지도록 참기 일쑤다. 가족사진은 그 눈물과 상처를 가려준다.
일전에 모 통신사 직원의 리마인드 웨딩촬영에 취재를 간 적이 있다. 그는 취미가 가족사진 보기였다. 결혼한 지 15년이 됐는데도 결혼 비디오는 물론이고 사진까지 밤새 스캔 떠서 TV에 저장해놓고 수시로 본다는 것이다. 아이들 돌사진도 마찬가지. 집에 손님이 와도 보여주고 퇴근하고 와서도 본다며 “결혼(가족)사진을 보면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쫙 풀리고 힘이 난다.”고 말했다. 이번 리마인드 웨딩으로 업데이트 되면 그것을 볼 것이라며 들떠했다. 스트레스 받을 때 영화 보는 사람은 봤어도 결혼사진 보는 경우는 처음이라 무척 놀라고 의아했는데, 그 사람에게는 결혼사진이 그 어떤 것보다 설렘을 주는 판타지 가득한 ‘영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도 높은 노동과 스트레스를 견디고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환상이 필요하고 가족사진은 좋은 처방이자 부적이 되니까.
언젠가 친구와 결혼제도에도 2대8의 양극화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문제 많은 결혼제도’가 유지되는 이유는 20%의 행복한 가족을 이룬 사람들이 계속 환상을 생산하면서 80%의 불행한 가족에게 (희망을) 먹여 살린 다는 것이다. 뉴스에서는 ‘이혼가족 자녀가 우울증 앓는다.’ ‘무자녀 부부가 이혼율이 높다.’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이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유포하고 가족이데올로기를 부추긴다. 그래서 병든 가족이 ‘발전적 해체’도 못하고 엉켜 살아가고 그런 불행한 가족에서 자란 아이들은 또 ‘가족’이라면 넌더리를 내고 "있는 가족도 버겁다"면서 결혼과 자녀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가족의 의미가 서로의 삶을 짓누르는 형태로 왜곡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필요하지만 가족의 의미와 건강한 가족의 가치는 가족구성원이 자율적으로 창조해야 한다고 본다. 가족은 가족사진에서처럼 무조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함께 웃는 얼굴로 있어야 좋은 것인가? 난 좀 다르게 생각한다. 지난해 나의 생일날 친구를 만나고 왔더니 아들이 물었다. “엄마, 엄마생일인데 왜 가족끼리 파티 안 하고 친구를 만났어요?” “가족 외식은 거의 매주 하잖아. 며칠 전에도 했고, 선물도 집에서 주고받을 수 있잖아. 사실 가족이랑 있으면 기분전환이 안 되고 엄마가 자꾸 습관적으로 너희들 수발들게 된다고. 엄마 생일이면 엄마가 주인공이니까 엄마가 행복한 게 중요하잖아. 엄마가 잘 놀고 와야 또 의욕적으로 너희들 삼시세끼 다른 반찬으로 밥도 잘 해주지 않겠니 아들아. 다음엔 가족끼리 할 수도 있고 그 때 그 때 유동적으로 결정하자.”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기 힘들다. 가족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족은, 서로가 희생을 강요하고 억압하고 발목잡는 가족이 아니라 서로가 본성대로 살고 자유로이 날도록 돕고 삶의 지혜를 모으는 생활공동체이어야 한다. 자식의 이름으로, 엄마의 이름으로,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의 이름으로, 상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신적 폭력의 실상을 적나라하면서도 따뜻하게 보여준 <날아라 펭귄>을 통해 다시금 '어떤 가족이어야하는가' 곱씹어보게 된다. 어느 집이든 각잡힌 의상과 어색한 표정과 구성원의 배치까지 천편일률적인 모범답안용 가족사진이 아닌, 장애아가 있거나 한 부모 가정이거나, 여자들만 있거나 집집마다 개성이 넘치고 표정이 살아있는 가족사진이 걸리는 집이 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