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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옆소극장

<안토니아스 라인> 미래를 낳는 엄마-되기


여자는 출산을 거치고 엄마가 되기 전까지 젠더를 크게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호적과 아이에게 ‘몸’이 묶이기 전까지는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게 자유로운 개체로 맘대로 살 수 있고 그래도 사실 큰 탈이 없다. 적어도 한 생명이 굶어죽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 ‘엄마’가 되면 제도의 벽, 일상의 벽에 자꾸 가로막힌다. 맞벌이를 해도 애가 아플 때 눈치 보며 조퇴하는 것도, 회식 때 먼저 일어나는 것도 대부분 엄마다. 불편하고 부당하고 답답한 게 많다. 나를 둘러싼 ‘삶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당연한 질서에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고민은 고민대로 하면서 끼니와 빨래의 영원회귀를 견디며 아이와 함께 매일을 살아낸다.

개인적으로 육아의 과정에서 나를 무화시키는 경험은 특이했다. 단단한 자의식은 종종 삶이라는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 놓여 졌고 버터처럼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그러고 나면 나는 더러 고소한 빵이 되기도 했다. 아이가 아니었으면 인간을 넘어 생명에 대한 애틋함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 엄마 살이는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데 자양분과 경쟁력이 된다. 하루하루 ‘삶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엄마는 문제해결력, 인내력, 포용력, 통합적 사고력, 관계형성능력 등이 증진된다. 그렇다고 엄마가 진리의 화신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가족이데올로기에 빠져 편협하고 왜곡된 정서를 갖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상식적인 경우에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자아를 가로질러 타자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훈련의 장’은 된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자기(일) 밖에 모르고 ‘엄마’(같은 아내)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삶의 실질적 생산 능력이 떨어지며 진리에의 충동이 삶에의 충동을 앞서는 남성은 여러모로 열등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