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
내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이 구절이 왠지 멋있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스산함과 사랑한 자의 처연함이 느껴졌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이 정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값어치 있다’고 믿었다. 몸뚱이의 뼈 206개가 달그락 거리면서 몰락과 생성을 거듭하는 게 사랑이니까.
11월 첫번째 월요일 조조영화로 텅빈 극장에서 <파주>를 보고 저 시구가 떠올랐다. <질투는 나의힘>의 박찬옥 감독 작품 <파주>는 시처럼 리듬감 있고 울림 있게 함축적으로 만든 빼어난 영화다. 남녀가 사랑하면 인생이 허물어지고 다시 조립되듯이 자본이 돈을 사랑해서 낡은 건물이 철거되고 다시 세워지는 공간 ‘파주’가 영화의 배경이다. 주인공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가 되고 마는 한 남자, 이름도 무거운 중식(이선균)이다.
중식은 운동권 학생이다. 시대의 짐을 짊어진 고뇌의 찬 백만 학도 중 한 명이다. 극 중에 세 명의 여자와 뜨겁고 미지근하고 오래가는 애정관계를 형성한다. 첫 번째 대상은 첫사랑인 운동권 선배. 수배 중에 그녀의 집에 숨어 지내다가 둘은 격정적 사랑을 나누는데 그 틈에 선배의 아기가 끓는 물에 화상을 입는 큰 사고가 난다. 중식은 죄책감을 가진 채 파주로 와서 교회일을 돕고 공부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낸다.
여기서 두 여자를 만난다. 은수(심이영)와 은모(서우) 자매다. 은모는 중학생이었다. 중식의 두 번째 여자가 언니 은수다. 무릇 사랑에 상처 입은 남자가 그렇듯이 중식은 크게 사랑하지는 않지만 크게 나쁠 것도 없는, 예쁘고 착해 빠진 여자 은수와 결혼한다. 처제랑 셋이 그럭저럭 함께 산다. 형부에게 언니를 빼앗기기도 했고, 언니에게 그 남자를 빼앗기기도 한 은모.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 은모는 이중고통의 복합감정에 괴로워하다가 가출한다. 그 사이 은수는 가스 폭발 사고로 죽는다. 전쟁이 끝난 뒤처럼 폐허가 된 보금자리.
중식의 세 번째 여자는 어엿한 성인이 된 은모다. 보호자 중식과 처제 은모는 함께 산다. 은모가 대학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중식은 ‘탈북자 인권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끌려간다. 연행된 중식은 유치장에서 은모에게 전화를 걸어 옷가지를 부탁하고 서랍에 있는 통장에서 돈을 찾아 등록금 내라고 말한다. 은모는 수화기를 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의 열병을 앓는 자의 가슴에서만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철철 흘린다. 이 장면 정말 좋다.
폭풍처럼 닥쳐오는 사랑, 그 쓸쓸함이 두려운 은모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인도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3년 후 낯선 도시가 되어버린 파주의 재개발 반대 현장에서 중식과 조우한다. "세상에 갚을 게 많고 자꾸 할일이 생기는" 중식은 ‘철대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은모는 언니의 사망보험금 수혜자가 중식에서 자신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고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은모는 형부에게 "우리 언니를 사랑했느냐고 진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중식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너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은모는 결정적인 오해에 휩싸여 중식을 떠난다. 아니다. 어쩌면 떨어져 사랑하는 게 익숙한 은모이기에 중식을 오해하는 절차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사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서툰 중식은 뼈아픈 이별을 여러번 겪는다. 지나간 자리마다 폐허다.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는데 평생이 걸리고, 그 마저도 용기 내어 고백했더니 아예 상황이 종료되어 버린다. 어쩌면 이는 이념은 철저하고 현실에는 서툰 운동권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들은 매사에 방어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서는 안 될 것을 먼저 고려하는 지나친 원칙주의, 도덕주의 성향이 강하다. 외롭고 상처가 많은 은모 역시도 자아 보존본능이 강하다. 방어적이고 서툴다. 왜 중식에게 ‘진실’을 물었을까? 중식이 아무 연고도 없는 파주를 그토록 오래 지키고 있다는 사실 외에 진실을 확인하는데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 은모는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고, 행복해 본적도 없어 행복할 줄도 모른다. 천생연분처럼 사랑이 두렵고 사는데 서툰 두 바보가 만났다. 그러니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만난 그 아까운 사랑을 아프고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주>는 ‘사랑과 진실’의 아이러니가 슬프도록 섬세하게 빛나는 영화였다. 너무 사랑해서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상대방에게 멀어지고, 설명하면 할수록 오해의 골만 깊어가고, 십년을 기다려도 한마디 말로 물거품이 되고, 기어이 뒷등을 보고서야 뜨거워지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 두고 안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는 것이 가능하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자리에 떠밀려 와 있는 것이 인생이다. 의도가 몸을 비껴가는 것이 어디 중식의 삶뿐이겠는가. 하지만 플라톤 말대로,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그 존재의 지성의 정도에 의해 이성의 척도에 의해 이로운 것으로 판단된 ‘최선’이다. 그래서 중식에게 더 나은 최선의 그림은 솔직히 그려지지 않는다. 살다보니 늘 폐허만을 전전하게 됐지만 중식은 거기서 희망을 보고 상처를 보듬고 약한 것들을 사랑하며 진실되게 잘 살아왔다. 진실을 말함으로써가 아니라, 진실을 침묵에 가둠으로써 진실을 지키는 것(김현)이 그가 사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