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맴도는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말끔한 잊혀짐은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 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9월의 드높은 하늘을 보니 점쟁이의 말이 떠오른다. 역술인 혹은 무속인.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그들로부터 여러 말을 들었다. 어른이 되고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점 볼 기회가 많았다. 먼저 결혼을 앞두고 거의 스무 군데 정도 본 거 같다. 시어머니께서 궁합이 좋지 않다고 해서 결혼을 반대하셨다. 그래도 남편이 완강히 버티자 점집 순회가 시작됐다. 이것은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는 방식과 같았다.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낼 때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라는 것처럼, 시어머니는 점쟁이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점집을 전전하셨다. 당시 추적60분 등 유명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나와 남편의 사주는 전부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나’라는 동일인의 사주팔자임에도 점집마다 상이한 해석이 내려졌다. 보다 못한 남편이 점쟁이별 소견을 엑셀로 도표화해서 어머니에게 제시하고 논리적 모순점을 따지기도 했다. 그 표를 나도 봤는데 기분이 묘했다. 특히 ‘결혼 두 번 할 팔자’와 ‘명이 짧다’는 점괘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하면 일년안에 헤어진다고 했다. 혼인신고에 잉크도 찍기 전에 예고된 이혼선고도 황당했지만 일찍 죽는다는 것은 더욱 실감나지 않았다. 일찍이 몇 살일까. 서른 살? 쉰 살? 죽음은 언제나 너무 빠른 죽음만 있는 건데. 정말이지 ‘마흔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영화라도 찍고 싶었다. 뭐라도 이루고 죽어야 ‘요절’이 될 텐데 준비 없이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냥 '사망'이라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한 차례 점집 소동을 겪고 소강상태로 몇 달을 보냈다. 어느 날 시어머니는 다른 점괘를 가져와서 결혼을 서둘렀다. 왕십리의 유명한 역술인 왈, 내가 돈복이 많다고 결혼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이란 중대사는 이성의 통제하에 진행되지 않는다. 결혼은 우발과 비약으로 진행된다. 어쨋든 큰 돈복도 큰 불화도 없이 살았다. 한해 두해 지날수록 점괘의 허구성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점쟁이의 말을 점점 믿지 않게 되었다. 해마다 신수를 보러 가는 발걸음도 점차 뜸해지셨다. 정초에 점 보러 안 가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셨다. “보면 뭐하니. 맞지도 않는데.”
삶은 지속됐다. 시효가 다한 줄 알았던 십년도 넘은 점쟁이의 말. 이혼과 단명을 상기시키는 일들이 발생했다. 다 떼놓고 홀로 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몸부림치던 괴로운 밤이면, 온몸이 바닥을 뚫고 지하의 암흑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무서운 밤이면 점쟁이의 말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날이 밝고 달이 가고, 살림을 줄여 이사를 가고 엄마도 잃었다. 난 늙은 고아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주변에 그렇게 보였나보다. 아는 언니가 ‘좋은 무속인’이 있다며 한 번 가보라고 권해주었다. 내게 허튼 일을 시키기에는 너무 사려 깊은 선배였다. 언니는 지인의 소개로 그 무속인에게 난생 처음 점을 봤는데 신통하고 복채도 형편껏 알아서 내면 되고 공부도 많이 한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그냥 부담 없이 인생상담 차원에서 얘기나 듣고 오라고 했다.
점집 가는 날. 하늘은 가을이되 태양은 여전히 따가웠다. 눈부심을 피해 땅에 고개를 떨구고 걷는데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무슨 얘기를 한담. 소낙비를 맞고 나면 우산이 필요 없다. 사실 나는 더는 미련도 없고 궁금한 것도 필요한 것도 없었다. ‘이 괴로움이 언제나 끝날까요?’ 라고 물어봐야 하나. 한편으로 약간 두렵기도 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도 시한부 선고가 내려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래서 후배를 데리고 갔다. “나 무서우니까 같이 가주라”
육교 아래 초등학교 앞에서 전화를 했더니 무속인의 제자가 나와서 우리를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데려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점집 특유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전신을 죄어왔다. 원래 '해석'하는 자가 권력자다. 내 운명을 해석하는 그 앞에서 나의 자리는 피고인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잔뜩 위축된 목소리로 생년월일시를 말했다. 곧이어 한 달 전에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언니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얼버무리는데, 순간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후배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뒤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하얀 종이에 무언가를 계속 써내려갔다. 두 가지 중요한 얘기를 들었다. 그 중 하나가 줄초상이 난다는 것이었다. “줄초상이 뭔가요?” 숨죽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입을 뗐다. 가까운 사람이 더 돌아가신다는 얘기였다. 통상 3년 이내에 초상을 또 치르면 그게 줄초상이랬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굿을 하라고 했다. 굿이라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비용이 최소한 600만원 정도랬다.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거길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지워졌다. 나는 지하철 승강장 맨 끝에 앉아서 열차 몇 대를 그냥 지나쳐 보내고서야 가까스로 집에 왔다.
어차피 선택권은 내게 없었다. 600만원이 없었다. 난 내가 돈이 그렇게 없는 줄을 몰랐다가 그날 알았다. 갑자기 아이가 아파도 병원 갈 돈도 없겠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서글프고 막막했다. 저녁에 그곳을 소개시켜준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굿하라는데.....” 언니가 깜짝 놀랐다. 장삿속으로 그런 말할 사람이 아닌데 심각한 모양이라고 걱정했다. 이틀 후 언니가 집으로 찾아왔다.
“예전엔 굿을 하면 그거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70집을 먹여 살렸대. 떡이랑 과일이랑 물품이랑 여러 가지가 많이 필요하잖아. 70집에 네 식구만 해도 280명이잖니. 굿을 해서 그렇게 보시를 베풀면서 자기의 업보를 푸는 의미도 있는 거라더라. 그 뜻을 새기는 게 중요한 거 같아.”
굿의 의미를 이해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언니는 엄마 사진을 한 장 달라고 했다. 종교도 없는 언니가 우리 엄마를 위해 100일 간 기도를 해주겠다고 했다. 명상하는 나의 친구는 신도 레벨이 있는데 자기 사부가 더 근원 신과 대화한다며 줄초상 안 난다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고마웠다.
어쨌든 살아야했다. 우박이 쏟아지든 산사태가 일어나든 삶 속으로 뛰어들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삶 외부에서 초월적 존재로 자리하는 신이 아닌 나의 하루, 세속적 일상인 ‘삶’을 모시고 살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닥친 우연에 저항하지 말고 운명을 회피하지 말고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적어도 280명과 따뜻한 밥 한 끼는 나누자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지우고서.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나의 허물어진 어깨를 훑고 가던 쓸쓸한 가을바람이 다시 분다. 긴 강을 건넌 기분이 든다. 다행히 줄초상은 나지 않았다. 사실 ‘굿’ 이란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살아가는 동안 문득 조마조마했다. 그럴 때마다 280인 분의 거룩한 식사를 생각했다.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이 뜨겁게 자각되었다. 삶을 옹호하는 본능일까. 주위에 더 눈길을 돌리고 더 아우르며 마음 다해 살 수 있었다.
내게 삶은 여전히 난해하지만 그런 난해함을 삶의 일부로 껴안고 덤덤히 살아간다. 또 다시 내 앞에 물살 깊은 긴 강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그들의 말은 충분히 불우했으되 나의 자기극복을 도와준 좋은 마주침이었다고 말하게 된 지금에서야, ‘과거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말한 니체의 말을 내 것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