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충격적이었다.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하는 짐승이라고. 그런데 반박할 수 없었다. 나부터도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잘 모른다. 어제에 등 떠밀려 오늘을 산다. 우리는 사는 게 서툴다. 그러니 그저 태어나서부터 자신에 대해 숙고할 틈도 없이 남들 가는 길만 열심히 따라 간다. 우르르 영어학원 가고, 특목고 대비반 등록하고, 우르르 한의대 지망하고, 우르르 판교 분양받고, 우르르 꽃남 기다리고, 우르르 워낭소리 보러 극장에 몰려간다. 남들 사는 대로 사는 게 속편한데 그 조차 쉽지 않다.
그럼 인간은 행복을 어디서 어떻게 배워야 할까. 니체는 “개인이 행복을 바라는 한, 그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한 어떠한 지침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개인의 행복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들’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밖에서 주어지는 지침은 그의 행복을 방해하고 저지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행복론은 도덕비판으로 이어진다. 도덕비판은 나를 관통해온 모든 욕망과 인식, 무의식적 규범 등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으로, 삶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엄청나게 정치적인 작업이다. 우리가 공교육과 매스컴, 책, 설교 등을 통해 배워온 이른바 ‘도덕적인’ 지침들에 대해 “왜?” “무엇을 위해?”라고 되물어보는 작업이다. 사실 도덕의 경우 개인의 행복과 대립된다. 그것들은 개인의 행복을 전혀 바라지 않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지침은 인류의 행복과 안녕과도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명령과 권위’로 우리 삶을 지배한다.
도덕비판은 가치의 가치를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가치 평가에 의거한다. 모든 가치평가는 자신의 것이거나 받아들여진 것인데 대부분 후자에 해당한다. 우리는 왜 그것들을 받아들이는가? 두려움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것들이 나 자신의 것인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생각에 길들고 마침내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되고 만다. 하지만 가치평가는 어떤 것이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얼마나 쾌감 또는 불쾌감을 주는가 하는 관점에서 행해져야 한다. 나의 쾌, 불쾌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 행동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쾌감이 아니라 도덕을 추구한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적성에도 안 맞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학생은 효를, 자식을 위해서 헐벗고 헌신하는 부모는 도리를, 선량한 시민을 위해 파업을 유보하는 노동자는 공공의 안녕을 등등. 관습과 도덕적 권위와 최대다수의 행복에 굴복한다. 일생동안 자신의 자아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오직 자아의 환영(幻影)을 위해 일만한다. 자아의 환영은 주위 사람들의 머리에서 형성되어 그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처럼 허구적인 가치평가의 안개 속에서 살다보면 자신의 충동과 감각에 무뎌지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르게 된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강한 감정들은 보았지만 세련된 판단과 지적인 올바름에 대한 기쁨은 거의 보지 못한 결과 감정을 흉내내는 데 최상의 힘과 시간을 소모한다.
니체가 보기에 의식을 갖는 어떤 존재 (동물, 인간, 인류 등)의 발전에서 그것들이 추구하는 무의식적인 목표가 그 존재의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이 참이 아니다. 오히려 발전의 각 단계에는 달성해야 할 하나의 특별하고 비교하기 어려우며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참으로 독특한 행복이 있다. “발전은 행복이 아니라 발전 그 자체를 바라며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아를 직시해야 한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나타나는 우월함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힘의 차이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더 이상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풍부함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주체라는 미지의 세계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한 니체의 명언 중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은 바로 이것.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다.” 이 말은 나를 흔들었다. 아마 나는 나를 모른다는 자각에 거세게 맞닥뜨려졌을 때 그 말을 접했기 때문일 게다. 가장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느꼈던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무지, 즉 선과 악뿐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무지였다. 사람들이 모든 경우에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성립하게 되는지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극히 오래된 망상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방에서 나와 ‘나는 태양이 뜨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멈출 수 없으면서도 ‘나는 바퀴가 구르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우리는 이렇게 비웃지만 우리가 ‘나는 원한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저 경우와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는가? (124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고 있다. 나는 어떤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모든 윤리적인 가능성들과 마음의 모든 움직임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 마저도 순진하게 “올바른 인식에는 올바른 행위가 뒤따를 것임에 틀림없다.”라는 저 가장 치명적인 편견, 저 가장 깊은 오류를 여전히 신봉했다. 이 점에서 행위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망상과 어리석은 자만의 계승자들이었다.
인식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니체의 명료한 정의는 이렇다. “인식에서 시작해 행위에 이르는 다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 도덕적인 행위들은 사실 ‘다른 어떤 것’이다. 모든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본질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도덕적 행위 속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욕망이나 습속이 잔뜩 개입되어 있다. 하나의 동기나 원인을 가정하는 것은 인식상의 오류일 뿐이다.
# 단일한 자아는 없다. 이타주의 비판
니체가 보기에 이타적인 행위는 없다. 이타주의라는 도덕은 모든 근대적 윤리와 정치를 지배하는 핵심적 요소이기에 니체의 치밀한 비판이 수행된다. 이기주의가 비도덕적이라고 비난받는데 그렇다면 이타주의는 도덕적인가. 도덕적 위선을 파헤쳐 알맹이를 보면 그렇지 않다.니체는 동정이 쾌락충동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일종의 세련된 자기방어. “쾌락은 우리가 처한 상태와 전혀 다른 것을 볼 때 생기며,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을 통해 싱기고, 우리가 도와줄 경우 받게 될 찬양과 감사를 생각할 때 생기며, 도와주는 행동이 점차 성공적인 것이 되어 도와주는 사람에게 뿌듯함을 주는 경우에 생긴다. 훨씬 더 정교한 것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이 동정이다.
“동정은 쾌락을 포함하고 우월함을 적게나마 맛보게 하는 감정으로서, 자살의 해독제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잊게 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며 공포와 무감각을 쫓아버리고 말을 하게 하고 탄식하게 하며 행위를 하도록 자극한다.” (136절)
남을 위한다는 동정적인 행위는 결코 하나의 동기에서 행하지 않는다. 니체에게 인간이란 하나의 자아를 지닌 단일한 구성물이 아니다. 한 자아의 희생은 다른 자아의 만족감으로 바뀐다. 수천의 충동이 있다. 어떤 희생적 헌신도 없으며, 기적적인 영웅행위도 없다. 숭고한 행위 뒤의 이기적 욕망이 자리한다.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존경받던 연예인 부부의 선행이 매스컴에 수시로 보도되자 ‘이웃 돕고 억대CF를 찍는다’고 네티즌은 조소한다. 조국을 위해 전사한 군인의 신성한 행위는 자신의 죽음이 명예로운 죽음이 된다는 보상이 있다. 자부심이 가장 자신을 이롭게 하는 감정이기에 이를 니체는 ‘이기심’이라고 부른다. 철로에 뛰어든 사람을 구하는 의로운 시민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순수한 이타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적 이타적 행위에도 무의식적 이기적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유롭고 단일한 의지는 없다.’는 것, 주체는 고안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니체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타주의. 창조력이 고갈된 병든 자의 논리에 불과하다. 동정적인 사람들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도덕적인 유행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