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는 신비로운 직업이다. 들리지만 볼 수 없고 느끼지만 닿지 못하는 저편의 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백인백색 마음의 빛깔과 내면의 깊이에 따라 담긴 소리가 다른데, 그는 유독 둥글고 미더운 ‘신뢰의 소리’를 지녔다. KBS 역사스페셜, MBC라디오드라마 ‘격동50년’ 내레이션의 주인공, 성우 원호섭 씨 이야기다.
둥글둥글 원만한 소리, 원호섭 목소리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를 그려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 목소리가 나요. 다른 건 중요하지 않소.’ 그렇다. 눈이 먼 그들은 오직 ‘목소리’로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삶의 방향을 잡아간다. 헌데 눈뜬 자들의 도시에 살아가는 원호섭씨 또한 같은 얘기를 한다.
“목소리는 바로 그 사람 자체에요. 인상이 유형의 거울이라면, 목소리는 그 사람을 비추는 무형의 거울이지요. 얼굴에서 인상이 느껴지듯 목소리에도 성격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프로그램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전혀 달라지거든요. 외화는 캐스팅에 따라 극의 느낌이 좌우됩니다.”
목소리는 ‘성격 거울’ 성우생활 10년이 지나니까 아주 조금 목소리가 뭔지 알 듯도 하다는 원호섭 씨. 그는 97년 KBS공채로 성우가 됐다. 대학 때 방송반을 했다. 우연히 후배가 가져다준 원서로 KBS 성우시험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얼떨결에 수백 대 일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것. 헌데 쉽지 않았다. 입사는 쉬웠을지언정 성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입사 동기들은 모두 무슨 극단, 무슨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연기로 단련된 그들은 바로 현업에 투입됐다. 대학방송국 출신인 관계로 연기내공이 턱없이 부족한 그 혼자서만 빈 방을 지키며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이것이 내 길일까’ 고민을 아니할 수가 업섰다. 길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그 즈음 선배의 충고와 지도로 연기공부를 시작했고, 조금씩 일이 풀려나갔다.
“그만 뒀으면 어쩔 뻔 했는지....” 머쓱한 웃음을 짓는다. 누구말대로 위기는 ‘진짜’ 절실한 자를 가려내기 위한 시험대였던 것이다. 올해로 13년차 성우다. 입사 초기 3년간 KBS전속으로 있다가 현재는 프리랜서로 일한다. 각 방송국 프로그램과 기업광고, 애니메이션 등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성우답지 않은 성우’로 각광
현재 우리나라에 성우는 600여 명. 그중에서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성우는 100여명 남짓이다. 그들 사이에서 원호섭씨는 ‘연애’보다는 ‘결혼’하고 싶은 성우로 꼽힌다.
“좋게 말하면 훈남, 쉽게 말하면 머슴이죠.”
넉넉한 풍채에 진중한 미소와 예리한 눈빛을 가진 그는 ‘목소리가 둥글둥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악역은 거의 주어지지 않고 백인보다는 흑인 군림하는 자보다는 핍박받는 쪽을 주로 맡는다. 악역을 해봤지만 ‘맛이 안 난다’는 게 중론이라고. 그렇다고 악역을 맡은 성우의 성정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목소리에 단호함이나 매운맛이 느껴져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그의 몸에서는 모진 소리도 날이 갈리어 둥글게 나올 뿐이다.
“성우의 목소리에도 유행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70-80년대에 성우를 지망했으면 목소리가 평범해서 성우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2000년대 들어서는 ‘성우같지 않은 성우’의 목소리가 대세거든요.”
배한성, 양지운 등 ‘천의 목소리’로 불리던 국민성우들의 존재가 말해주듯 한동안은 성우의 목소리는 성우답고 개성이 강해야했다. 하지만 요즘은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소리’를 원한다는 얘기다. 아예 노골적으로 성우 같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한다니 난감할 노릇이다.
하지만 원호섭 씨는 예의 그 둥근 목소리로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그에게 ‘일복’을 가져다준 프로는 ‘KBS 역사스페셜’. 처음에는 예고편만 맡았다. 그러던 중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가 연말 특집방송을 하는 바람에 그가 대타로 투입됐고, 그날 시청률이 대박이 났다. 행운이었다. 그의 존재감이 확실히 부각됐다. 그로부터 1년 후, 99년 4월부터 4년간 줄곧 주말 황금시간대에 시청자에게 목소리로 묵직한 감동을 선사했다. 지난해부터는 20여년 MBC라디오의 명성을 이어온 ‘격동50년’의 내레이션을 맡고 있다.
“역사스페셜과 격동 두 프로그램 다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죠. 배운 것도 얻은 것도 많아요. 성우로서 좋은 훈련의 장이 되었죠. 식상한 표현이지만, 저야말로 훌륭한 선배님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를 막 올려놓은 것뿐입니다.” 어쨌거나 원호섭 씨는 굵직한 방송을 통해 시청취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굵직한 목소리로 각인되었다. 그에게 좋은 성우의 정의는 이렇다. 행간의 느낌을 살리는 성우, 말맛이 탁월한 성우. 바로 그가 꿈꾸는 성우이다.
“아무리 발성이나 화법이 좋고 장단음이 정확해도 그 사람 고유의 ‘소리’에서만 표현되는 게 있어요. 경륜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무엇, 고유하고 깊은 무엇이요. 부단히 노력해서 원호섭의 소리를 가꿔나가야죠.”
* 현대기아차그룹 사외보 <I'm 모터스라인> 2009년 2월호. 스페셜 인터뷰 / 사진설명; '격동50년' <참여정부의 도전과 위기>를 녹음 중인 성우들. 모자를 쓰고 있는 성우가 문재인 역의 황일청씨, 그 옆이 노무현 역의 이상훈씨. 맨 오른쪽은 해설자 원호섭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