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자로서는 드물게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최재천 교수. 그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등의 저서를 통해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최근에는 학문간 경계허물기를 뜻하는 ‘통섭’이라는 21세기 화두를 던지고 '학문을 버무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한 개인도, 한 학문도 모든 발전하는 것들은 스스로 투명해진다는 소신을 밝혔다.
꽃비로 내리던 벚꽃이 잦아든 거리에 노란 개나리며 분홍 진달래가 울긋불긋 꽃대궐을 이룬다. 갓 돋아난 여린 나뭇잎들은 바람 따라 새살대고, 투명한 햇살 또르르 내려닿는 곳마다 보석열매가 맺힌다. 100년 전통 명문사학의 캠퍼스는 더없이 아름다운 4월의 풍광을 연출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종합과학관 365호. 최재천 교수의 연구실은 바깥의 운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의 책상 뒤 이미지 월은 신사임당의 초충도, 화조도의 이미지를 콜라주한 것이다. 지인이 직접 디자인과 제작을 맡았다고 한다. 나머지 벽면은 온통 책의 숲이다. 그는 “여기 책상까지가 나의 연구실이고 나머지 공간은 ‘통섭원’”이라고 설명했다. 통섭원은 생물학, 물리학, 인문학 등 각 분야의 전공을 망라한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곳으로 지난 2006년 9월 문을 열었다. 각기 다른 전공의 연구자들이 자주 만나서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사랑방’이다.
20세기에 쪼개진 학문, 21세기에는 통섭한다
‘통섭’이란 말은 2005년 최재천 교수가 에드워드 윌슨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저서 ‘Consilience’를 번역하면서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서로 다른 학문의 개념과 방법론들이 녹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trans-disciplinary study)를 지향한다. 통섭이란 말은 최근 학계를 넘어 정계, 재계 등 전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Consilience를 번역하려는데 정합, 융합, 통합, 합일 등 여러 뜻을 고려했지만 적합치가 않았지요. 두툼한 국어사전을 1년 반 동안 끼고 살면서 통섭(統攝)이란 말을 만들어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원효대사가 화엄사상에 대해 설명할 때 늘 쓰던 말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최고에 이르는 경지가 화엄인데 그 방법론이 ‘통섭’이라고 합니다. 통섭이 우리 동양의 학문적 방법이었던 거죠.”
20세기의 학문이 계속 쪼개지는 방향으로 진행됐다면 21세기의 학문은 결국 나눠졌던 것을 종합(통합, 통섭)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통섭의 역사는 꽤 길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는 이미 1933년 명예교우회(Society of Fellows)가 세워졌다고 한다. 지식의 통합은 서로 다른 분야의 학자들 간의 격식 없는 토론, 즉 잡담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긴 기관이다. 그는 1990년대 초반 미시간대학 명예교우회에서 주니어펠로우로 활동했다. 그 시절 꿈같은 3년을 보냈다며 “그 3년이 내 학문의 주춧돌을 놓아주었다. 내 인생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각 영역 간에 장벽이 무너지는 요즘 시대의 사회현상들은 거의 대부분 복잡계 수준의 문제들입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홀로 풀어낼 수 없는 문제들이죠. 요즘 대운하로 난리도 아닌데 그러한 문제는 절대 어느 누구 혼자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생태학자, 시민, 건설전문가, 경제학자 등 다 같이 모여서 결정해야 합니다. 여럿이 함께 넓게 파기 시작해야 더 나은 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하는 이치지요.”
퇴근 후면 매일 ‘집으로’ 육아와 공부에 전념
기실, 그의 삶은 곧 통섭이다. 최재천 교수는 자연과학자이지만 인문학도 못지않은 지성과 감수성을 두루 갖춘 학자로 통한다. 동식물의 세계를 통해 인간사를 흥미롭게 풀어낸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등 그의 저작은 대부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지식의 통섭>등의 저서도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 외에도 직접 추천사를 쓴 것까지 포함하면 발간된 책은 모두 40여 권. 그는 “어찌하다보니 책을 많이 쓰게 됐다”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4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완강한 보수주의자로 성장해 대학시절에도 여자친구가 먼저 전화를 하면 심하게 나무라는 ‘못 말리는 마초’였다. 그러다가 민주적인 가정에서 자유롭게 자란 아내와 만나면서 가치관에 큰 변화를 겪었다. 결혼 후부터 부부가 같이 일하고 아이를 키우다보니 자연스레 가정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저술, 강연, 학회 등 왕성한 사회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녁시간에 약속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살면서 밤에 안 나가려니 애로점이 많습니다. 저녁에 잡힌 대부분의 회의나 모임을 낮으로 옮기는 등 어려움이 컸지요. 거창한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어찌하다보니 생활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었는데 제가 그 덕을 많이 봅니다. 9시면 아이를 재우고 그 이후는 온전히 제 시간으로 썼습니다. 매일 꾸준히 공부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지요.”
그 보배로운 시간들이 수십 년 간 쌓여 책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남자들이 ‘밤무대 활동’을 줄이면 자기계발을 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생산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닮고 싶은 과학기술인, 올해의 여성운동상 등 수상
동그란 안경테 너머 책장을 응시하는 모습이 천생 학자다운 풍모 가득한 최재천 교수. 그는 2004년 한국과학문화재단 선정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 기술인’, 1989년 미국곤충학회 젊은과학자상, 2000년 대한민국과학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 2005년에는 제16회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은 이채로운 기록도 보유했다.
선정이유는 이렇다. 생명과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공생설'이라고 부르는 진화생물학 이론을 통해 인간 세계에만 존재하는 부계혈통주의인 호주제의 생물학적 모순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일반론을 사회생물학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여론을 확산시킴으로써 호주제폐지의 정당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 공로로 수상한 것이다.
막힘없는 사유의 횡단과 학문에 대한 열정, 따뜻한 카리스마, 아는 만큼 사랑하는 실천력은 그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에 대해 누구라도 부단한 자기연마와 노력으로 ‘자존감’을 키운다면 당당하고 투명한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되물었다.
“지난 총선에 투표를 하고 오면서 아내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예전만 해도 부정선거가 횡행해서 개표결과를 믿지 못하고 늘 시끄럽지 않았습니까. 요즘은 전산시스템 발달로 결과도 빨리 나오고 그 결과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이 사회를 투명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죠. 사람이 물질이든 정신적이든 부족한 게 많으면 구차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 꺼내놓아도 숨길 것도 잃을 것도 없고, 자기 일에 자신 있으면 자연히 당당해집니다.”
인터뷰를 마친 최재천 교수는 다음 행선지로 떠나기 위해 교수실을 나왔다. 그는 평상시 캐주얼 배낭을 애용한다. 무거운 서류가방대신 배낭을 멘 ‘세계적인 동물행동학자’의 뒷모습은 참으로 신선했다. 늘 깨어 있는 청년정신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발걸음이 가볍다. 저 홀가분함이라면 그가 이르지 못할 곳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