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숱한 만남의 계기와 기회가 있었지만 다가가지 않았다. 주변에서 하나같이 그(의 책)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니 보지 않아도 본 것 같았다. 가끔 <한겨레>에서 읽는 그의 칼럼은 역시나 ‘명랑좌파’ 다운 면모가 다분했다. 사교육으로 아이들 병들고 소비가 위축되고 나라가 망해가니 국민투표로 사교육 폐지를 묻자는 제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구체적이고 진중하면서도 발랄한 내용전개가 맘에 들었다. 호감지수는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던 참이다.
그러던 중, 우석훈(의 책)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늘 다니던 서점이 아닌 서점을 갔다. 책들의 낯선 배치는 일순 나를 미아로 만들어버렸다. 어디서부터 무슨 책을 들춰봐야할지 몰라 어슬렁거리는데 그가 다정스레 손짓했다. ‘88만원 세대’ ‘괴물의 탄생’ ‘직선들의 대한민국’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촌놈들의 제국주의’ 등등 우석훈 코너 앞에 멈춰 섰다. 좀 과장하자면 이건 완전 배낭여행에서 만난 고향친구였다.
이것이 바로 '시절인연'인가. 덥석 집어든 책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첫장 저자 서문부터 라디오사연같이 음성지원이 되면서 술술 읽혔다. “고액연봉 대신 가난한 자유를 선택하고 비로소 인생의 행복을 찾았다”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만의 생의 리듬과 강도를 찾은 자의 덤덤한 진술이 돋보였다. 책의 뒷부분 정성일씨 수려한 추천의 글도, 저자의 부탁이 아닌 번쩍 손들고 자원해서 썼음이 느껴질 정도로 진솔했다. '이 사람 생각보다 더 괜찮구나...' 당분간 도서구매를 자제하고 ‘갖고 있는 책이나 열심히 보자’던 계획을 파기하고 나는 책을 얼른 품어왔다.
이 책은 저자가 노무현정권 동안 언론매체에 기고한 ‘단평’모음집이다. 대개 이런 글은 시의성이 떨어져 나중에 읽으면 재미가 없다. 헐겁고 밋밋하다. 그런데 그의 글은 충분히 현재형으로 받아 들일만 했다. 노무현, 황우석, 강금실, 지율, 김지하, FTA, 진보와 보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배웠다. “서울에서 태어나 인생의 4분의 1을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 외국에서 지낸” 그가 읽어내는 우리사회 현상과 인물들에 대한 분석은 대체로 진지하고 참신했다.
내겐 우석훈이 두 가지 면에서 반갑다. 하나는“게으르지 않는 지식인의 등장”이다. 분석내용의 우월성을 떠나 그의 열정적인 자세를 배우고 싶었다. 사실 많은 경우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이기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맞든 틀리든 자기만의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더 길게 생각을 한 바퀴 돌리는 훈련”이 아주 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입만 살아 남은 현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 그의 글은 전문적인 지식과 근거가 뒷받침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자신만의 삶으로 채워가는 모든 생활인 그리고 그들의 일상성에 대한 모독”이 없다. 정성일 씨 말마따나 하나마나한 말을 반복하며 새로운 사건을 낡은 도식에 대입하는 게으른 지식인, 멋진 서구이론을 제시하고 새로운 이론가를 소개하는 딱 거기까지가 전부인 겉멋든 지식인과는 한참 달랐다.
놀라웠던 점은 내가 항상 답답하게 여겼던 좌파에 대한 불만을 그가 속 시원하게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때로 슬프도록 무능하고, 작은 것에 대한 집착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바로 이거. 슬프도록 무능하단 사실. 우리나라 좌파는 별 거 없다. 새로운 것도 없고 신념도 없을뿐더러 일관성은 더더군다나 없다. 수십 년 간 동어반복만 하다가 결정적으로 “대한민국 좌파는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밑천을 다 보인 셈”이다.
“좌파의 뿌리도 짧고, 현실적으로 여건도 부족해서 별로 공부도 할 수 없고 그저 현장에서 몸으로 때우거나 재야인사의 명망가 운동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민주시민단체에서 나오는 성명서나 운동방식을 보라. 발표하나마나한 성명서는 열심히 찍어내는데 상근활동가들만 죽어나고 사회적 공명을 울리지도 파급력을 갖지도 못한다. (우석훈은 본문 내용중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너무 고생하는데 비해 성과는 '윗분'들이 다 차지한다는 지적을 한다. 이런 현실적인 지적을 하는 좌파를 처음 봤기에 너무 반가운거다.^^;)
성명서고 연설이고 고리타분하니 눈에 안 가고 귀가 쏠리지 않는다. 사회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도 운동방식의 구현은 과거의 답습뿐이다. 고민을 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는다. 80년대 민주화운동 부흥기 때는 노동자, 학생, 지식인 할 것 없이 사회과학서적에 밑줄 그어가며 공부했다. 일상적이었다. 스터디 모임도 많고 노동자 문집도 많이 만들어졌다. 생산적이든 소모적이든 생각을 나누는 활발한 토론이 가능했다. 지금의 노동자들은 진보세력은 책과 친하지 않다. 얼마전까지 낮에는 주식시세를 클릭하기 바빴고 여전히 밤에는 '쓰린 가슴 위로 찬소주를 붓는다.' 21세기를 살면서 아직도 80년대 언저리를 배회한다.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좌파들. 이를 우석훈은 “21세기로 건너오지 못했다”고 표현한다.
우석훈이 보기에 좌파의 생명은 ‘순수성’이다. 이십세기 초반 혁명의 시기에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법을 어기면서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우파는 말해 무엇하리. 천박한 보수꼴통 말고 고상한 우파 어디 없을까. 이상과 관점은 다르지만 존중할만한 우파가 없는 것은 정말이지 슬프다. 그는 한국의 우파들은 지나치게 게으르다고 지적한다. 부동산투기로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경제엘리트들. 국제기준으로 보자면 심하게 게으르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우파들은 당신들처럼 매일 증권가격표나 부동산시세표를 들여다보거나 부인과 자식까지 외국유학 보내고 월급에 매달려서 허덕거리며 살지 않는다. 하다 못해 프랑스 우파의 정점에 있는 기소르망도 아직은 혈를 내두를 만큼 많은 책을 보면서 나름 ‘좋은 우럽’을 위해 고민한다.”
결론을 내리지만, “우파가 별 거 없기에 좌파도 무식해졌고, 좌파의 질문이 날카롭지 않기 때문에 우파도 게을러진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라는 게 우석훈의 진단이다. 백번 공감한다.
우석훈에게는 꿈이 있다. ‘명랑사회’구현이다. 대안도 구체적인데 한 사람이 행복해지는데 필요한 재물을 100만원 이내로 상정한다. “골방에서, 술집에서, 백화점에서, 골프장에서 축복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라며 한 달에 50만원에서 100만원 사이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감사’라고 말한다. 소비라는 물리적 조건과 감사라는 심리적 조건 두 가지가 만족되면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최소한 경제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러면 정말 그의 말대로 ‘명랑’이 우리를 자유케 할까? '최저소득의 권리'를 누리면서,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웃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