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삼십대 회원의 라이프스토리는 대동소이하다. 대학2학년 즈음 언론학교를 수강한 후 민언련 회원에 되어 이삼년간 분과활동에 전념한다. 꿀처럼 달콤했던 그 시기를 통해 ‘언론과 인생’을 배웠다고들 말한다. 그들은 대체로 꿈을 이뤄 언론계에 종사하거나 언론고시를 준비 중이다. 정은경 회원도 ‘위와 같음’인데 ‘반전’이 있다. 얼마 전 기자직을 그만두었고, 그간 민언련에 납입한 회비총액이 일백만원이 넘더라는 ‘특종’을 회원 최초로 발굴해왔다.
소심한 女기자의 짧은 소회
8월 치고는 꽤 쌀쌀하다. 온종일 비가 퍼붓고 바람도 사납다. 여의도 한 카페. 전날까지 불덩이 같은 태양을 피하느라 허둥대던 사람들은 긴팔로 무장한 채 따뜻한 커피를 찾고 있다. 한여름에 느닷없이 닥친 가을날, 은경은 봄의 전령사처럼 꽃무늬 셔츠에 노란 카디건을 걸치고 나타났다. 밝고 편안한 기운이 물씬하다.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사표를 내고 다음 주에 일주일간 발리로 여행을 떠난단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다 때려 치고 여행이나 갔으면 좋겠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말이 씨가 되다 7월부터 엉덩이가 들썩들썩 했는데 발리여행 일정이 여의치 않아 8월 초반에야 그만두었다. 대학졸업 후 4대 보험료를 안 내보기는 처음이다. <미디어오늘>에서 5년 <미디어스>에서 1년간 몸담던 기자직에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훗날 마침표에 살짝 꼬리를 그려 넣어 쉼표로 고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손꼽아 기다리던 백수의 기쁨을 맘껏 누리고 있다. 펑펑 남는 시간을 주체 못하여 환전 하는데 하루를 보내고 여행자 보험 드는데 또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 헐거움과 이 낙낙함은 진정 풍요로운 행복을 안겨준다. 이 시점에서 은경은 묻는다. 왜 인생은 꼭 무언가로 빠듯하게 채워져야만 하는가. 왜 사람은 꼭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는가.
최승자 시인이 이렇게 살수도 저렇게 살수도 없을 때 온다고 했던 바로 그 나이 서른에 은경은 ‘존재물음’에 봉착했다. 자신의 기자로서의 자질에 대해 숙고했다. 마감과 특종의 압박이라는 짐이 부쩍 버거웠다. 물론 성취와 보람도 크다. 기자생활을 계속 할라치면 어찌어찌 했겠지만 사람과의 부대낌에서 이제 그만 놓여나고 싶었다. 기자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억척스럽고 공격적이어야 한다. 캐물어 특종도 해야 하고 평소 취재를 위해서도 강단 있게 말하고 우기기도 해야 한다. 어떤 난관과 굴욕도 너끈히 견뎌내야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도 약하고 성격이 소심한지라 갈수록 그 모든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소심女 기자되다 이게 다 강준만 탓이다. 고3때 강준만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언론의 힘을 알게 됐다. 끌리듯 언론정보학과를 택했다. 2학년 때 숙제로 현장탐방리포트가 있었고 민언련을 방문했다. 언론학교를 듣고 민언련에 가입해서 방송분과 활동을 했다. 대학2,3학년은 방송분과에 올인했다. 휴일에도 나와 ‘모니터’에 열중했고 모임이 끝나면 뒤풀이 자리를 사수했다. 민언련 동지도 좋고 언론공부도 좋았다. 그 때 언론학교를 같이 들었던 29기 7조모임 동기들과는 <297>이라는, 흡사 386 유사조직쯤 되는 명칭으로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암튼 버라이어티 쇼처럼 재밌고 유익했으나, 4학년 이후에는 언론고시를 준비하느라 민언련과는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미디어오늘> 기자가 된 은경은 출입처로 민언련을 다시 찾았다.
여릿한 식물성 이미지에 소심한 천성임에도 불구하고 은경을 기자로 살게 한 힘은 성실함과 책임감이다. 애초부터 ‘잘난 기자’가 아닌 ‘못 나지 않은 기자’가 되고자 했다. 최소한 물 먹지 말자는 소신으로 일했다. 나서서 무얼 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맡은 일은 뒤지지 말자는 생각이었고 열심히 해왔다. 기자로서의 슬로건 겸 아이디는 펜사이드. 바깥에 서서 중심을 보겠다는 나름의 ‘한 줄 맹세’였다. <미디어오늘>이나 <미디어스>같은 비주류매체에서 일한 지라 어느 정도 입장을 견지할 수는 있었다.
촛불기자 떡실신되다 성실해서 일이 많은 건지 일이 많아 성실해지는 건지 모를 일이다. 일복 많은 은경은 퇴사 막판 100일은 촛불집회로 ‘빡시게’ 근무했다. 방송사 출입 기자였는데 광화문으로 전격 투입돼 일요일도 없이, 밤낮도 없이 일했다. 그래도 호응이 좋아 힘든 줄 몰랐다. 미디어스 블로그에 올린 기사가 포털사이트 다음 ‘블로거 뉴스’로 발행되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은경이 쓴 기사에 댓글이 줄줄이 사탕처럼 와글와글 엮이곤 했다. 비록 몸은 ‘떡실신’됐을지언정 보람찬 날들이었다.
그러나 촛불이 탄압국면에 접어들면서 살짝 ‘촛불우울증’을 느끼기도 했다. 아무리 이렇게 해도 저쪽에서는 꿈쩍도 안 하니까 ‘내가 한다고 뭐가 될까’ ‘그래도 노력해 봐야지’ 사이에서 수십 번씩 왔다갔다 방황했다. 그런 내면의 갈등을 더 밀고나가 극복했어야 하는데 아쉬움을 느낀다. 사실 기사 쓰는 방식이나 편집 방식도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해봤어야 하는데 타성에 젖어 그러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前기자부부 '발리연인'되다 은경의 마지막 취재현장은 8월 8일 정연주 KBS사장 해임을 위한 이사회였다. 마지막 날까지 정말 이런 천인공노할 사건이 벌어지다니 지긋지긋하고 화가 치밀었다. 속상했다. 기자로서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더 있는데 그만두는 것 같아 발걸음이 무거웠다. 누가 남으라는 사람도 없고 나 아니라도 기자 많은데 싶어 마음을 달랬다가 다시 괴로워하다가를 반복했다. 지금도 민언련이나 YTN노조, 범국민행동 등에서 계속 문자메시지가 오면 부끄럽고 미안하다. 시민으로서 참여할 수도 있지만 은경은 마음의 촛불만 조용히 밝힌다. ‘나 바보 같아’라는 속된 자책과 함께.
바보 아니다. 활동도 안 하다가 ‘회원의 하루’에 나오면 사람들이 “쟤 뭥미?”라고 말할까봐 걱정한 은경은 ‘특종’을 캐서 들고 왔다. 그동안 한 일이라곤 회비 백만 원 넘게 낸 게 전부라고 의기양양 발표한다. 회비납입 실적으로 볼 때 '민언련 상위 5%'에 속하는 우수회원이다. 그 뿐인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떠밀려 가는 삶에 과감히 제동을 걸고 새빨간 멈춤 버튼을 누른 자를 바보라고 말하긴 어렵다. 본디 고뇌에 찬 결심에서 조용한 실행까지는 깊은 심연이 있는 법. 용기 있는 자만 건널 수 있는 강을 냉큼 건넌 능력자다. 그런데 실은 짝꿍이 있었다. <미디어오늘>에서 만난 선배이자 남편인 민임동기 기자다. 둘이서 나란히 <미디어스>로 옮겼고 이번에도 손잡고 퇴사했다. 물론 여행도 같이 간다. 전직 기자부부의 ‘발리에서 생긴 일’ 그 이후의 행보가 살짝 궁금해진다. 글 김송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