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명절을 맞는 기분이 달라진다. 철부지 시절의 명절은 맛난 음식 많이 먹고 친척들도 만나고 며칠 연달아 놀 수 있는 축복된 날이었다. 게다가 설날엔 새뱃돈으로 지갑도 두둑해지니 얼마나 좋았는지. 결혼후에는 부엌지킴이가 되는 명절이 그닥 반갑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에서 며느리로 사는 한 감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역시 몸이 힘든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촌오빠가 죽고 오빠가 아프고 집안에 우환이 닥치면서 명절이 유쾌하지 않게 됐다. 가가호호 웃음꽃이 피는 (것처럼 보이는) 명절엔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명절은 집안에 아픈 사람없고 실업자도 없고 비혼자도 없는 무탈하고 단란한 가족에게만 '밝은 날'이란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후엔 더 최악이다. 최근 3-4년 동안 눈물의 명절을 보냈다. 추석과 설날. 명절을 주기로 큰 사건사고가 터겼고, 여기저기 한가위대잔치 선물보따리 귀경전쟁의 북적함 속에서 더 지독한 박탈감과 허무함과 쓸쓸함을 느꼈다. 2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정말이지 명절이 싫어졌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두달 만에 맞은 재작년 추석은 두렵기까지 했다. 엄마가 다니던 성당에서 연미사를 보는데 어디선가 나비 한마리가 팔랑팔랑 주위를 맴돌며 날아다녔다. 그 때 다섯살 짜리 딸 서형이가 말했다. "엄마 할머니가 나비가 돼서 날아왔나봐.." 눈물이 쏟아졌다. 작년 추석에는 시어머님이 혼자되신 아버지가 불쌍하다며 '재혼하시켜드려라'는 말을 불쑥 하셔서 또 방에 들어가서 혼자 울었다. 난 죽음에 처한 것이 삶의 상태보다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죽음을 해석하는 뭇사람들의 연민 투성이의 오만한 해석에 반감을 느낀다.
명절 때 친정에 가면 엄마가 시댁에서 일 많이 하고 왔다고 부엌에 얼씬도 못하게 했는데 이젠 엄마가 안 계시니 난 부엌을 지켜야한다. 사실 식구들 밥 한끼 차려먹는 것이고 그쯤은 거뜬하다. 하지만 그렇게 누가 날 위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새삼 슬펐다. 아빠의 입장에서는 명절날이라도 누가(딸) 차려주는 밥을 드시고 싶으신 거고 나도 백번 그래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아빠들은 딸을 엄마가 그러하듯 애틋하게 바라볼 수 없는가. 남자는 한 사람을 세심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결여된 듯하다고 생각되니 그것이 아쉬운 거다.
이래저래 아픔을 겪으며 명절을 달리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을 것들이 많다. 확실히 결핍이 인간을 사색케 한다. 마음이 허해야 그 자리에 새로운 생각이 싹틀 수 있다. 이번엔 촛불동지들의 안위를 좀 더 가슴 깊이 염려하며 이번 추석을 맞았었다. 직전에 횟칼테러도 생기고 촛불수배자들 농성이 70일을 넘기는 심란한 상황이었다. 함께 하지 못하는 면피용으로 얼마의 성금을 보내고 부랴부랴 추석을 맞았다. 추석 연휴에 잠깐이라도 가보리라 맘 먹었었는데 연휴 마지막날 조계사에 들렀다.
입구에서부터 횟칼테러를 알리는 홍보판넬들이 즐비하다. 촛불다방에서 냉커피를 주어 한 잔 받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러 현장이다. 돗자리의 핏자국은 이미 바래고 사라졌었다. 입구에서 퍽 가까웠다. 이리 가까운데서 사람들 3명이 칼에 찔리고 아비규환이 되는데 경찰이 몰랐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안쪽엔 뉴라이트와 조중동 바로 알기 홍보물들이 있었다. 어느 한 시민이 홍보판넬을 진지하게 살피더니 수첩을 꺼내 열심히 적어내려 갔다. 디카를 들고 기록하는 여성도 있었다. 저렇게 깊이 느끼는 한 사람의 위대한 힘이 세상을 조금씩 바꾼다고 생각한다.
잔잔한 민중가요와 목탁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연꽃촛불을 든 촛불소녀 앞의 수배자 농성장. 블로거뉴스를 보니 이곳 농성장으로 떡이며 배며 추석선물이 많이 답지했다더라. 흐뭇했다. 대웅전에는 신도들이 법회를 보고 있었다. 들어가서 삼배를 올리려다가 '양말 신으세요'란 안내글귀를 보고는 맨살이 죄스러워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신발 신고 문밖에 서서 기도했다. 내용은 혼돈스러웠다. 잰틀맨님이 꼭 살아나게 해달라고 빌었다가 그 악몽같은 기억을 걸머지고 살아갈 삶이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험한 일을 겪고 생사를 오가며 중환자실에 있는데도 '아들이 살아 있어 밥 안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셨다는 잰틀맨님 어머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숨쉬는 것 자체가 부모에게 큰 효도였다.
여섯시 반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하나둘 촛불이 켜졌다. 공교롭게도 삼십여명 촛불들 중에 민아와 나만 여자이고 모두 남자였다. 삼십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명절이라서 그럴까. 촛불을 켜고는 조금 앉아 있다가 7시가 되는 것을 보고 조계사를 나왔다. 보신각이 있는 종로사거리로 나오자 요란한 사물놀이 소리가 울린다. 무슨 관제행사가 있는 모양인데, 촛불의 진실을 덮으려는 소음처럼 들려 거슬렸다.
인터넷 시대에도 권력에 의해 여론은 손쉽게 통제된다.(고 생각했다.) 답답하고 안타깝고 속상했다. 하지만 내가 진실을 알고 확인하는 수단도 인터넷이다.
언론이 아닌 시민들의 생생한 사진과 진정성 어린 글이고 당사자의 발언이다. 그것이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귀 기울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얼마든지 희망은 있다. - 2008년 촛불로 밝힌 명절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