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아도 살다보면 어느 길가에선가 돌부리처럼 걸리는 말,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훌쩍 커버린 한 인간의 문제점을 유아기의 성적 경험으로 집요하게 환원시키는 프로이트의 논리에 막연한 반감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성적인 것을 불경스러워하도록 배운 제도교육 영향은 아닐 거다. 혹시 무의식적인 의식화를 감안하더라도 ‘허리하학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논리자체가 ‘남근주의’ 혹은 ‘가부장제’에 대한 승인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내가 항상 프로이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성문제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도 많거든?”
‘쥐인간’ ‘도라’ ‘여자동성애가 되는 심리’를 읽고 난 후,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박정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프로이트는 왜 매사 성적인 걸로만 보느냐’는 불만에 찬 푸념은,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보느냐 아니냐’하는 능동적 해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즉 유아기 때 가족관계 안에서 겪은 애정의 갈등과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걸 ‘성’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가족관계’로 해석한다.
가족관계는 계급혁명을 꿈꾸던 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한 인간에게 삶의 배경으로서 가족관계.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부모사이가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탈선할 가능성은 비교적 적다. 콩가루 집안에서 자란 애들은 불량청소년이 되기 쉽다. 이 같은 '물질토대'를 기반으로 한 가족관계 문제는 나의 깊은 관심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성적욕망'을 토대로 한 가족관계를 탐색한다. 난 지질이 가난한 사람들의 가족관계에 관심이 있었는데, 프로이트는 신경정신과를 찾아갈 정도의 재력과 자기 존재를 해석할 정도의 지력을 가진 인물들이 겪는 가족 관계 내에서 인간의 문제를 파헤친다.
<도라>
도라의 경우를 보자. 도라의 가족관계는 돈 많고 세련된 아버지와 지적이고 예민한 딸이 한편이고, 살림밖에 모르는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 무덤덤한 아들이 한편이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족관계를 구성한다. 도라의 어머니는 청결강박에 걸린 ‘가정주부정신병’환자다.
14세 때 도라는 유부남 K씨를 좋아했고 K씨는 도라를 유혹했다. 도라는 K씨와 키스할 때 성적 흥분을 느꼈다. 그런데 K씨가 그 집 가정교사에게도 같은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라는 화가 치밀었다. ‘고용살이하는 가정교사’와 자신이 ‘동급’으로 취급되는 기분은 질투감을 넘어선 모욕이었다.
도라는 자존심 회복, 즉 자신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인 ‘계급의식’ 때문에 K씨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이후 도라는 가슴압박, 기침 등의 증상을 일으킨다. 통로를 찾지 못한 억제된 성적욕망이 ‘가슴’같은 보다 점잖은 곳에서 표출된 것이다.
도라를 둘러싼 주변 인간관계는 좀 더 복잡하게 꼬인다. K씨 부인과 도라의 아빠가 불륜관계다. 페미니즘 책을 탐독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도라는 엄마에게 찾지 못한 이상적인 여성상을 K부인에게 찾고는 그녀를 흠모한다. 그녀 역시 도라에게 잘해주지만 그것은 도라 아빠에 대한 연정 때문이다. 도라는 화가 나서 도라 아빠에게 K씨의 성추행사실을 말해버리지만 도라아빠는 알면서도 도라의 공상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일축한다. 도라가 야한 책을 읽은 사실을 K부인에게 말했는데, 그것을 K부인이 도라아빠에게 일러바친 것이다.
정리해보자. 도라는 K씨와 K씨 부인을 사랑했으나 둘로부터 이용당하고 무시당했다. 아빠까지 한통속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외면한다. 어른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욕정을 위해 그녀를 배신했다. 도라는 병이 났다. 병명은 히스테리. 이는 자궁이란 뜻으로 전형적인 여성적인 신경증이다. 쾌락을 불쾌로 느끼는 전환신경증이다. 대부분 비밀스럽게 억압된 성적 욕망이 기침 구토 흉부압박 같은 신체적 질환으로 나타난다.
도라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병이 안 날 수 없다. 엄마는 하루 종일 쓸고 닦는다. 살림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에서 찾는다. 진공청소기 같은 엄마와 대화하기 싫다. 아빠는 인생의 공허함을 딴 여자에서 찾는다. 똑똑하고 예민한 소녀 도라는 가정에 안착하지 못한다. 사춘기.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정체성 확립의 시기이기에 모든 것이 불안하고 혼미하다. 열정은 넘친다. 생의 에너지는 절정을 이루지만 마땅한 출구를 찾지 못한다. 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무사히 통과하려면 누군가 손길이 필요하다. 휘청거리는 자기 자신을 삶에 뿌리내릴 동안 내 손을 잡아줄 누구 없소 두리번거린다. 생존본능이다. 사춘기 소녀들이 연예인을 좋아하는 경우처럼 이 사람 저 사람 마음 쏟을 곳을 찾는다. 도라 역시 가족외부에서 찾는다. K씨 내외에게 마음 주고 손 내밀었다. 보호받고 사랑받기보다는 ‘감탄고토’ 신세가 되어버렸다. 어른들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낀다. 자신의 몸속에 꿈틀대는 느낌은 뭐지. 그런데 좋은 것은 감추고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내숭만이 살길이다. 모순된 욕망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질문이 시작된다. 난 누구인가. ‘나답다’는 건 무엇인가. 나를 위해서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하나. 머리에서도 마음에서도 답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말한다. 히스테리다.
히스테리는 소수자로서 ‘억압’의 사회적 기제 속에 살아가는 여성의 병이다. 선택하기보다 당하고, 능동적으로 맞서기보다 인내가 미덕이 되도록 교육받아온 여성. 불합리에 눈감고 타협해야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여성. 늘 속마음과 반대로 말해야 칭찬받았던 여성.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별다른 고민 없이 지내다 어른이 되어 뒤늦게 사춘기를 겪는 모든 여성의 병이다.
<쥐인간>
쥐인간은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히스테리가 여성의 병이라면 강박증은 남성적이다. 쥐인간은 한 가지에 대해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명령을 내린다. 여자와 만날 때마다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시달린다. 프로이트는 쥐인간의 증상이 시작된 시점을 4세 때 보모의 벌거벗은 몸을 강박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행동에서 찾는다. 7세 때 두 번째 보모의 몸도 탐색했다. “자신이 돌보는 남자아이와의 한 짓 때문에 어떤 보모가 몇 달 동안 감옥에 있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아버지의 폭력은 가족 내부의 하층민 여성과 아들의 성행위에 대한 처벌이었다. 아버지의 꾸지람에 대한 분노의 폭발, 공포는 자기욕망 포기로 이어진다. 아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해소가 되지 않아 강박증으로 드러났다. 성인이 된 쥐인간의 강박증은 돈 없고 생식력 없는 하층민 여자와의 사랑과 돈 많고 빽 있는 부르주아 여성과의 결혼 사이 선택의 지연 때문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가족 구성원은 아닌데, 가족 섹슈얼리티의 은밀한 내부인인 보모(하녀, 가정교사)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이트는 보모는 결국 ‘어머니의 대리자’일 뿐이라며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적 선분을 무시한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하는 곳마다 하녀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비사회적, 비역사적, 비계급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그런데 부자관계는 결코 사회 ‘이전’의 생물학적 관계가 아니다. 사회적(계급적) 관계 이전의 생물학적 관계는 없다. 부모는 이미 사회적 관계의 최첨병으로서 유아의 리비도를 사회적 장에 투여시킨다.
강박증과 히스테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강박증은 어떤 생각에 강박되어서 나름 논리적이지만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는 증상이다. 비논리의 논리는 철저히 변증법적이다. 또한 강박증은 특이한 ‘사유의 행위’로 정의된다. 강박증은 “행동에서 생각으로의 퇴행”이다. 강박증자는 매우 바쁘게 행위 하지만 그 행위는 어떤 행동으로 돌입하지 않기 위한- 쥐인간의 돈 갚지 않기 위한- 사유행위다.
이러한 ‘부정’과 ‘부정의 부정’과 ‘부정의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사유행위는 근대지식인의 전매특허다. 홍상수의 <극장전> 마지막 대사 “생각만이 살길이다.”에서처럼 그들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성행위처럼 된다. 그리고 이런 무한한 자기반성 능력은 ‘지식’의 권위를 선망하는 여자들을 유혹한다.
<여자동성애가 되는 심리>
여자동성애가 되는 심리. 부모의 손에 끌려온 레즈비언 소녀에 대해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비정상적 해소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사춘기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부활. 아버지를 닮은 사내아이를 갖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 막내아들을 가진 엄마에 대한 무의식적 적개심, 아버지에 대한 좌절된 사랑. 그 사랑이 좌절되자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돌아선다. 모든 남자에 대한 돌아섬이 여자에 대한 애정의 기울게 한 이유인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와 동일화된 사랑, 즉 아버지 입장에서 사랑하기도 퇴행한 것. 이처럼 대상에 대한 욕망과 좌절은 대상과의 동일시로 퇴행한다. 우울증의 공식이다. 그런데 엄마는 안 되니까 엄마 대리자인 여자들을 향한 애정으로 나아간 것이다. 동성애의 원인은 아버지에 대한 좌절된 사랑이다. 그녀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해줄 레즈비언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자기 사랑을 좌절시킬 요부를 사랑한다. 그녀가 원한 것은 ‘좌절’, 즉 상처받기다. 억압된 욕망이 억압을 향한 욕망으로 전도된 것이다.
<신경증의 사회학>
정신분석은 19세기 정신의학처럼 비정상인을 교정과 훈육하는 장치인가. 프로이트는 부정한다. 증상은 억제를 향한 자기보존 욕망의 산물이다. 결혼이 대표적인 경우다. 결혼은 사회적으로 허용된(권장된, 강제된) 욕망/억제의 타협 형성물이다.
이처럼 신경증은 사회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신경증은 우리사회에 만연하다. 학생들의 성적에 대한 신경증으로 인한 자살의 예를 보라. 그러한 증상을 떠받치는 것이 국가와 학교 제도다. 사회는 개인의 신경증을 치료해야할 ‘증상’처럼 간주하면서 가족주의, 자본주의, 국가주의는 ‘정상’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아이를 고쳐서 자기 갈 길을 가게 할 용기가 프로이트에게는 없다. 잘 생각해봐야 한다. 신경증이나 강박증이 어떤 사회적 배치와 계급적 관계 안에서 생긴 것인지. 왜 정신병원이 혁명의 공간이어야 하는지. 왜 신경증 치료가 사회제도와 이데올로기적 증상들을 일소하는 혁명을 향해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