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상인은 신경증, 분열증, 편집증을 조금씩 가진 사람이다. 내면을 억압하고 외부의 인식세계에 경도됐던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맑스주의자들은 편집증자였다.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어김없이 분열증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이를 한 단계 넘어서 밀고나갔을 때는 엄청난 변혁 에너지가 된다. 저마다 내면에 깃든 '무리본능' 에너지를 일깨워서 '동물-되기'로 승화시키기. 양자택일이 아니라 포함적 이접관계로 무수한 생성을 창조하기. 되기를 시도하자. 고양이가 되자. 쥐박이 없는 세상을 낳는 위대한 '여자-되기'를 권한다. 프로이트의 <늑대인간>은 지독히 난해했다. 슈레버 박사의 사례도 어렵다. 신경증과 분열증의 사례분석을 '되기'의 생성에너지로 엮어내니 조금 소화가 되는 기분이다.-.-
왜 늑대인간인가 18세기 말엽에 인간 공동체로부터 유리된 채 사는 아이에 관한 테마가 무수한 문화적 과학적 텍스트에서 다뤄졌다. 절대주의 국가에서는 간난아이를 늑대무리 속에서 자라게 한 후 과연 그 아이가 인간처럼 살지 늑대처럼 살지 실험하기도 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대적 질문이 탄생시킨 존재가 바로 ‘늑대인간’이다. 프로이트의 ‘늑대인간’은 이 늑대인간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 늑대가 동물적 충동(본능)의 표상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정신분석은 개별 인간 내면의 영혼(무의식)에 ‘내재’하는 동물적 충동에 대한 치료학이다. 동물적 충동은 인간(이성)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편입되었다. 추방과 격리가 불가능하다.
정신분석, 영혼의 면역치료술 질병도 마찬가지다. 16세기 나병은 추방의 대상이었다. 17-18세기 페스트도 격리의 대상이다. 19세기에는 추방과 격리가 아닌 파스퇴르의 ‘면역법’이 등장했다. 면역치료의 근거로 발생한 지식이 통계학(statistics; 국가학)이다. 통계로 전염병의 사망률과 생존율을 조사했다. 통치 권력의 대상은 개별자가 아니라 개체군이다. 근대의 생명 권력은 인간을 ‘무리생명’으로 취급한다. 개별인간을 정상적 분포곡선 내의 무리로 몰아넣고 병자들은 내버려둔다. 이처럼 무리로 다스리는 것이 근대 통치 권력의 ‘안보전략’이다. ‘훈육전략’은 한 명 한명 개별자의 신체를 바꾸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무리 속의 질병을 통계학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응하여 정신분석은 개인영혼 속의 동물적 충동에 대한 면역력을 길러 사회적 정상분포 속에 편입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동물적 충동을 승화시킨다. 아버지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형제애, 군 지휘관에 대한 사랑은 전우애로 등등. 정신분석은 영혼의 면역치료술이다.
<늑대인간>
유아기의 ‘불안몽’과 ‘신경증’ 늑대인간은 러시아의 돈 많은 청년이고 증상은 히스테리성 내장기능장애(변비)와 신경쇠약(무기력증), 후*위 성관계에 대한 강박적 집착, 지독한 여성 혐오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신경증이 서너 살 무렵의 유아기 신경증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았다. 네 살 때 그는 늑대가 등장하는 불안몽에 시달렸다. 프로이트는 당시 ‘성기기’ 단계에 있던 리비도적 배치에 주목한다. 이런 유아기 신경증은 한 살 반 무렵 부모의 후*위 성관계 장면을 목격한 외상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어쩌면 그건 네 살 무렵의 체험들이 만들어낸 환상일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그 최초의 성관계 장면과 네 살 때 꾼 꿈 사이의 유사성을 분석한다. 두 장면에서 침대에 누워 있던 내가 뭔가를 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개처럼 뒤에서 성교하고, 가만히 응시하며 주위를 기울이는 늑대는 곧 한 살 반 무렵의 아버지를 대리표상 한다고 본다. 여기서 가만히 응시하는 건 ‘그’이다. 꿈작업을 통해 보는 자가 보이는 자로 전치되었다. 그런데 원초적 장면이 꿈 장면으로 되돌아온 걸까. 늑대 꿈을 꾼 네 살 아이를 기억하는 청년이 한 살 때 장면을 창조해낸 걸까. 프로이트의 의심은 중요하다. 첫째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발생한다. 원인은 항상 결과에 내속해 있다. 둘째 현실과 환상도 동시에 일어난다. 현실은 환상의 원인이 아니다. 거꾸로 환상이 현실을 창조하는 국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처럼 말이다.
근대핵가족의 리비도적 배치 ‘거세 콤플렉스’ 프로이트는 늑대인간의 신경증을 일으킨 리비도의 배치를 ‘거세 콤플렉스’로 설명한다. 거세에 대한 공포와 거세에 대한 열망이란 반대감정이 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콤플렉스의 대상은 아버지다. 늑대인간은 거세공포를 야기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아버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거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의 남성항거 때문에 수동적 동성애 충동은 억압된다. 이 억압된 충동이 되돌아 와서 불안신경증, 종교적 강박증, 성인 때 후*위 강박증, 여성 혐오증, 신경쇠약증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늑대인간의 리비도적 배치가 이렇게 결정된 원인은 뭘까. 아이를 둘러싼 신체적 배치를 따져보자. 아빠, 엄마, 유모이다. 근대부르주아 핵가족의 핵심구성원인 이들을 묶어주는 것은 아이의 자위행위이다. 아이의 자위행위가 신체적 질병의 근원임을 주지시키고 이를 막기 위해 아이와 한 침실에서 잔다. 이런 명령적 배치가 늑대인간의 수동적 동성애 리비도 배치를 결정짓고 있다. 이런 물질적 배치에 늑대동화라는 언표적 배치가 결합한다. 늑대인간의 꿈과 그림에서 늑대는 분명 무리를 이룬다.
신경증자 늑대인간 ‘무리-욕망’으로 승화 그런데 프로이트는 늑대의 무리성(다수성)을 제거하려한다.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단일한 표상으로 보고자 한다. 이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늑대인간은 정신분열증자가 아니라 ‘신경증자’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에 관하여>에서 프로이트는 분열증에서의 대체물 형성과 신경증에서의 대체물 형성의 차이를 숫자로 설명한다. 다수성은 정신분열증의 특징이다. 즉 늑대인간의 꿈에서 늑대가 무리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늑대인간은 정신분열증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꿈을 무리의 리비도적 공격에 대한 공포와, 무리를 지어 공격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으로 불 수 있다. 동물 공포증 이후 단계에서 그는 어머니가 들려준 성경이야기에서 억압된 동물적 충동의 표현방법을 찾게 된다. 독일 가정교사를 통해 국가 전쟁기계에서 자신의 억압된 무리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다음 프로이트의 성공적인 분석 이후 “위대한 인간의 공동관심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꿈에서 발견한 무리-욕망은 종교적, 국가적, 인류애적 집단의식으로 승화되었다. 물론 그 승화에는 ‘억압’이라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 ‘늑대적 무리욕망’은 근대문명사회의 적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가 갱단이나 혁명집단을 만났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는 돈 많은 러시아 청년이었다.
<슈레버>
슈레버는 프로이트의 유일한 ‘정신병’ 분석사례다. 분열증과 편집증이 동시에 나타난다. 편집증은 투사기제다. 투사란 “내부의 인식이 억압되고 그 내용이 왜곡되어 외부의 인식으로 의식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편집증은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사고추구가 특징이다. 혁명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맑스주의자들은 대표적인 편집증자이다. 이에 반해 분열증은 신체적 환각(환청, 환영, 환감)이다.
늑대인간의 신경증과 슈레버의 분열망상증은 원인이 동일하다. 둘 다 아버지를 향한 수동적 동성애의 억압 내지 부정의 결과이다. 슈레버는 성적피해망상과 구원망상에 빠져있다. 슈레버의 망상분열에서 플렉지히의 영혼이 최고 60개까지로 분열되는데 “이렇게 분해되는 것은 편집증의 특징이다. 편집증은 분해하고 히스테리는 압축한다. 아니, 편집증은 무의식이 압축하고 동일화해 놓은 것을 그 성분요소로 다시 분해하는 것이다.” 복수성(무리성)을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대표적 사례는 슈레버 항문에 흡수되어 무수히 다른 개체들을 생산하는 신의 신경다발을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태양으로 축소(환원)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슈레버 망상분열 분석의 특징이자 한계는 그 망상의 ‘원인’- 수동적 동성애에 대한 반작용적 투사-에는 집중하면서 그 망상분열의 ‘양태’ - 빛살신의 신체적 감응과 영혼의 분열-에는 주목하지 않는 점이다.
이와 달리 라깡은 슈레버의 정신병이 지닌 ‘신체적 환각과 무의식적 지식의 망상적 확신’이라는 양태적 특성을, 아버지의 이름이 배제된 데서 찾는다. 라깡이 볼 때 슈레버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억압이 아니라 아예 배제되어 있다. 배제된 것은 상상(꿈, 환상)이나 상징(증상)으로 되돌아오는 게 아니라 실재계(망상적 지식과 신체적 환각)으로 되돌아온다. 라캉이 슈레버의 사례에서 주목하는 것은 그가 창조한 근본언어이다.
슈레버의 분열망상에 대해 프로이트가 편집증적 ‘부정’의 기제를, 라캉이 정신병적인 신조어의 사용을 주목한다면, 들뢰즈 가따리는 그의 신체적 변형에 주목한다. 슈레버의 신체는 세계를 창조하는 생산기관이자, 기표 연쇄의 등록표면이며, 감응을 통한 무수한 변신의 터전이 된다. 슈레버는 정신병자다. 미쳤다. 슈레버는 자연의 능산자인 신의 신경다발을 흡수하여 세계를 창조하는 데 참여한다. 중요한 건 그가 “무언가를 느끼고, 생산하고 그것에 관한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분열증 신체의 가장 주된 특징은 ‘기관이 없다’는 것이다. 슈레버는 편집증 상태에서 “오랫동안 위가 없이, 장이 없이, 폐가 거의 없는 상태로, 식도가 갈라진 상태로, 방광 없이, 또는 갈비뼈가 부러진 살았다.” 다음단계는 기적을 행하는 신체이다. 슈레버는 신의 빛살을 흡수하여 파괴된 세계를 재생한다. 그의 신체는 양자택일적 논리가 아니라 ‘...이든’ ‘...이든’의 포함적 이접관계로 하나의 일관된 신체표면에 등록된다. 기관 없는 신체표면의 언표연쇄들은 서로 다른 강도적-정서적 블록을 형성한다. 중요한 건 정서적 효과지 표상적 동일성이 아니다. 그는 제수이트파의 제자가 ‘되고’ 슬라브인에 대항하는 시장이 되고, 알자즈의 소년이 되고, 몽고의 왕자가 된다. 이 무수한 인종 ‘되기’의 극한에서 그는 ‘여성-되기’에 돌입한다. 독신-여성으로서 그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과 새들과 세계를 낳는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