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란 새 학문분야를 개척한 인물입니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아무도 무의식의 세계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당대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사상의 지형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맑스, 니체와 더불어 20세기 유럽사상사의 핵심 3인방으로 꼽힙니다. 프로이트는 신경생리학자 분야의 의학자였는데 의사라는 직업을 별로 안 좋아한 의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플리스라는 ‘의사친구’는 좋아했습니다. 편지를 주고받는 등 동성애 감정을 느낄 정도로 절친했던 그 친구로부터 양성충동, 구강성욕 등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1895년 9월, 프로이트는 플리스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과학적 심리학’의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과학적 심리학 ‘초고’를 작성합니다. 프로이트 이전에 ‘심리현상’은 미신이나 신화 등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분야였습니다. 프로이트는 ‘마음의 이치’를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려는 엄청난 ‘기획’을 감행합니다.
“이 초고에서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심리학을 자연과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심리학을 양적으로 결정된, 구분 가능한 물질적 입자의 상태로 나타냄으로써, 그것을 명쾌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 욕망의 두 지층 = 물리적 지층, 표상의 지층
‘과학적’ 심리학은 양(에너지, 리비도)과 뉴런의 메커니즘이라는 내용의 형식을 다룹니다. 뉴런은 자기지배법칙을 갖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양은 뉴런의 흥분, 대체, 전환, 방출 과정을 통해 유동합니다. 이것이 물리적 지층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표상의 지층입니다. 모든 욕망의 상태는 욕망 대상의 ‘기억이미지’를 향한 적극적인 인력으로 귀결된다고 프로이트는 정의했습니다.
정리해보면, ‘정신분석학’은 뉴런의 양적(물리적, 기계적) 내용이 표현된 결과로서 표상의 지층 형식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이후에 들뢰즈-가타리는 ‘과학적 심리학’의 내용지층을 탐색하고, 라캉, 지젝은 ‘정신분석학’의 표상지층을 탐색합니다.
# 항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라
관성의 법칙은 “뉴런에는 양을 벗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로 정의됩니다. 이러한 방출과정은 뉴런체계의 1차적 기능입니다. 원래상태로 돌아가려는 비움의 원리. 비움이 흐름을 만듭니다. 이는 기계적 반복입니다. 노자가 생각나지요? ^^
그리고 항상성의 법칙은 간단히 말해서 그 수준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노력, 원리를 뜻합니다. 인체의 내적인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뉴런 체계는 신체적인 요소 자체로부터 오는 자극, 즉 내인성 자극을 받는데 그럴 때 방출시키는 거죠. 예를 들면, 배고프다는 신체 내적 신호는 밥이나 엄마라는 외부 신체를 통해 자극이 방출됩니다. 이처럼 개체는 외부환경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통해 - 기계적 반복과는 다른 생물학적인 반복- ‘자기동일성’을 유지합니다. 항상성의 법칙은 쾌락의 원칙입니다.
# 뉴런, 외부자극 받아들이고 내인성 흥분 방출하고
프로이트는 과학적 심리학 초고에서 ‘양/ 뉴런/ 접촉장벽’이라는 세 가지 기본개념을 설정합니다. 이 논문에서 ‘자극에 의해 발생한 물질적 양이 뉴런에 충전(투여, 집중, 점유)되면 뉴런은 흥분하게 되고 그 흥분양은 접촉 장벽을 통과하여 다른 뉴런으로 전달된다.’는 신경생리학의 기본개념을 통해 의식현상을 설명합니다.
뉴런체계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과 내인성 흥분의 방출이 그것입니다. 심리학의 과학적인 증명의 사명감을 띤 프로이트는 ‘양’의 흐름을 조절하는 기능에 따라 세 종류의 뉴런을 설정합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뉴런은 자신에게 투여된 자극 양을 벗어버리고 원래도 돌아가려는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힘이 다른 뉴런으로 양을 흘려보내는 원동력입니다. 이처럼 유기체 외부적 자극의 양을 받으면 근육 장치에 이르는 통로를 통해 방출시키는 피뉴런이 있습니다.
둘째, 유기체의 존재를 지속하기 위한 내인성 자극(안에서 우러나는 식욕, 수면욕, 성욕)을 받아 문턱 구실을 하는 접촉장벽 통해 일정한 수준의 양은 저장하고, 문턱을 넘은 작은 양만 지각뉴런으로 전송하는 프시뉴런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극의 양적 흐름을 질적 정보로 전환하는 오메가뉴런(지각뉴런)이 있습니다. 시간적 분절(흥분의 주기)을 통해 양적 흐름을 질적 신호로 전환하는 뉴런입니다.
# 개체보존 합목적성 파괴의 어두운 그림자...죽음충동
프로이트는 당시 출현한 생물학과 물리학 등 경험과학을 통해 심리현상을 설명하려 노력했습니다.
“생물학적인 체험을 통해 배운 ‘프시’ 뉴런체계는 고통의 종식 상태를 ‘프시’에서 재현하려고 애쓴다...고통의 나쁜 기억에 대한 투여가 일어날 때, 피할 수 없는 양의 증가는 방출활동을 강화하고,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양을 기억 밖으로 흐르게 한다.”
또 자아는 풍부한 측면투여를 통해 양이 기억이미지로부터 불쾌감의 생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억제한다고 말했지요. 여기서 ‘억제’라는 개념에 유의해야 합니다. 단지 기억의 망각이 아니라 원래 기억 이미지를 측면 투여된 다른 표상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슬픈 기억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기억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표상의 대체입니다. 니체버전으로 말하자면 위대한 망각의 능력을 발휘한다기보다 새로운 생성으로 덮어버리는 거죠. 이것이 1차 억압이고, 투여된 대체표상이 의식에서 사라졌다가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원리에 의해 다른 표상으로 투여되는 것이 본래적 의미의 억압, 2차 억압입니다.
자, 프로이트의 그 유명한 죽음충동이 나옵니다. 양의 ‘생물학’적 조직화 원리는 외부자극의 제한과 내부자극의 저장이라는 개체보존의 합목적성을 갖습니다. 이와 달리 양의 ‘기계적’ 운동 원리는 양의 투여, 이동, 방출의 미시 물리학을 따릅니다. 이 기계적 원리는 개체보존의 합목적성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이 기계적 원리를 ‘죽음충동’의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 트라우마, 반복강박의 아픈 기계적 폭력
프로이트는 ‘양’의 기계적 흐름을 외상신경증에서 발견합니다. 드라마에서 반항적인 눈빛의 주인공 치고 이것 없는 사람이 없었지요. 청바지? 아니요. ‘트라우마’입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 같은. 암튼 외상신경증이란 전쟁이나 철도사고 같은 심각한 기계적 충격으로 인해 자아(개체)를 보호해주는 막피가 손상되어 외부의 자극이 곧장 유기체 내부로 침범함으로써 발생합니다. 외상신경증환자는 유기체 내부의 리비도를 안정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항상성의 원칙’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외상적 사건의 강렬도를 묶지 못하고, 즉 통제하지 못하기에 고통을 반복합니다. 고통의 무한궤도를 달립니다. 이러한 반복강박을 ‘기계적 폭력’이라고 프로이트는 표현했습니다.
# ‘의지’조차 충동의 파생물이다
프로이트는 의식현상을 신체적 자극으로부터 비롯된 에너지의 흐름으로 환원했습니다. 의식을 신-이성-자아라는 정신적 실재의 근원에 둔 게 아니라 유기체의 생명활동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식현상의 원천을 ‘충동’이라고 여겼습니다. 칸트는 충동과 의지를 적대적으로 보았는데, 프로이트는 의지조차 “충동의 파생물”로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스피노자의 후계자입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봅시다.
“충동이란 자신의 존재 안에 무한히 지속하고자 하는 능력이나 노력이다. 이 노력이 정신에만 관계할 때는 의지라고 일컬어지지만, 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할 때는 충동이라 일컬어진다...충동과 욕망의 차이는 욕망은 자신의 충동을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에게만 관계된다는 것뿐이다...욕망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드’라는 충동의 저장소를 설정함으로써 생명체의 의식현상을 외부의 감각적 정보를 처리하는 지각활동으로 국한시킬 수 없는 생명체 내부의 자율 메커니즘으로 이해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생명체의 충동메커니즘을 개체를 보존하려는 힘과 개체를 구성하는 힘의 요소들을 해체하여 새로운 개체 속에 유전시키려는 상반된 힘의 종합으로 이해했습니다. 초기의 프로이트는 그 두 힘을 자아충동과 성충동으로 이해했다가 나중에는 에로스적 충동과 죽음충동으로 이해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충동의 메커니즘을 ‘리비도 경제학’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경제학이 가치의 질적 차이가 아니라 가치의 ‘양’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의해 통제되는 ‘의식’수준에서는 ‘제한경제’의 원리가 지배하고, 이드에 의해 통제되는 ‘무의식’의 수준에서는 ‘잉여경제’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보았습니다.
# 뉴런, 표상들의 강도적 신체
“모든 강박에는 그에 상응하는 억압이 있고, 의식으로서의 모든 과도한 침입에는 그에 상응하는 건망증이 있다.”
뉴런은 뇌 속에 특정한 해부학적 장소를 지정할 수 없는, 경험과 사건의 장소에 위치합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개별 표상마다 그 표상의 강도(양)를 형성하고 이동시키는 뉴런을 대응시킵니다. 뉴런은 형상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물질성이 있습니다. 표상의 강도를 만들어주는 ‘추상적 신체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개념은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프로이트의 뉴런은 해부학적 장소를 가진-현미경으로 보고 짚어낼 수 있는- 원자적 실체가 아니라 사건의 장소에서 발생하는 ‘표상들의 강도적 신체’입니다.
# 충동이 없으면 앎도 없다
충동은 정동적 양태와 표상적 양태로 발현됩니다. 정동은 질적으로 체험된 양의 변이입니다. 프로이트에게 인간의 모든 정동(느낌)은 쾌와 불쾌로 환원됩니다. 기쁨은 개체가 다른 개체와 결합하여 활동역량이 증가되는 양적변이를 뜻하고, 슬픔은 활동역량이 감소하는 변이, 즉 충족행위가 저지되어 과도한 자극 양이 고여 있는 ‘비활동성’의 결과입니다.
충동의 또 다른 표현 양태는 ‘표상’을 매개하는 방식입니다. 프로이트는 사물표상과 언어표상을 구분했습니다. 사물표상은 사물에 직접 새겨진 형상적 이미지, 언어표상은 청각적인 소리를 매체로 그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사물이 대체되는 표상입니다. 사물표상이 더 근원적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의식)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정동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표상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자아에 알려진 부분, 즉 사물의 속성이나 활동이미지”뿐입니다. 신체적인 충동이 없으면 눈앞에 사물이 있어도 지각하지 못합니다. 충동(욕망)이 없으면 앎도 없는 것입니다.
# 충동의 활동기관과 결합하라
프로이트는 충동이 정동적으로만 표현되는 꿈을 ‘불안몽’이라고 부릅니다. 불안이란 표상을 얻지 못한 정동입니다. 표상과 결합하지 못하고 오직 충동의 리듬만 느껴지는 꿈이 불안입니다. 프로이트는 ‘억압’이란 용어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억압의 강도가 너무 세서 다른 소통의 길을 찾지 못한 충동이 불안이라는 정동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 전면에 표출되는 ‘불안’도 이런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힘에 의해 억압된 생명의 충동, 삶의 충동이 ‘희망’이라는 다른 표상의 길로 소통되지 못한 채 날 것의 정동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반사회적인 충동의 표현양태가 억압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억압 없는 충동의 표현 양식에서 지배적인 표상 체계를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표상체계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원동력입니다 이 표상체계를 해체하고 탈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쁨의 정서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충동의 활동기관(그것의 표상이 친구이다)과 결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