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멋진 말을 많이 했다. 그 중에 “인간들에게 삶에 대한 생각이 수백 배 더 생각할 가치가 있도록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다.”는 말을 떠올린다. 니체는 미치도록 삶의 고양에 대해 골몰했다. 인간이란 존재가 상처를 덜 받고 씩씩하게 자기 길을 가도록 학문적 노력을 기울인 인정 많은 사람이다. 사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지만 마음이 하는 일에는 이유가 없을 때가 더 많다. 삼십년 수행을 해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게 인간이다. 갈수록 인간을 모르겠고, 살수록 삶이 어려워지는 난감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책장을 뒤적인다. ‘인간극복’에 관한 테제라면 어떤 텍스트라도 마음이 달려간다.
니체의 이야기를 생명수라도 된 양 홀짝거리다가 프로이트를 만났다. 니체가 인간이란 신체를 구성하는 외부의 공기, 도덕과 습속을 해부했다면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의 공기, 무의식을 파헤친다. 자아의 충동의 저장소로만 알려진 무의식을 외상적 진실이 쌓인 저장고로 정의한다. 의식세계도 버거운데 무의식은 의식의 바다에 뜬 조각배란다. 막막하다. 하지만 무의식에도 문법과 논리가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것에 이르는 통로로 꿈을 밝혀내고 꿈-작업을 수행한다.
# 꿈의 해석은 시대마다 다르다
‘꿈의 해석’은 20세기를 여는 책이다. 장자, 데카르트, 셸링 등 철학자들에게 꿈은 항상 존재와 인식의 본질을 밝혀주는 사유의 대상이었다. 꿈은 수면 중의 표상활동이다. 꿈에 대한 시대적 특징은 ‘표상’에 대한 각기 다른 에피스테메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꿈의 해석은 시대마다 달랐다.
16세기까지 고대(르네상스) - 꿈은 유사성의 기호이다. 꿈 표상은 사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표식이자 해석을 통해 사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해 주는 기호였다. 고대의 해몽서는 꿈을 하나의 전체물로 파악하고 이것을 비슷한 내용으로 바꾸는 방법을 사용한다. <꿈의 해석>은 꿈을 ‘세계’의 기호가 아니라 ‘주체’의 기호로 본다는 것, 그리고 꿈을 어떤 합성물, 즉 ‘심적 형성물의 복합체’로 파악한다는 점이 다르다. 프로이트는 사회적 관계를 도덕적 관점에서 가족관계로 소급한다면, 고대의 해몽서는 가족관계를 사회적 관계의 좋고 나쁨으로 해석하는 차이다.
17-18세기 중반까지 고전주의 - 꿈은 광인의 표상활동이다. 데카르트는 이성 외부의 사유인 광인의 사유의 일상적 사례로 꿈에서의 표상활동을 든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자의 무의식적 사유의 일상적 사례로 꿈의 표상활동을 든다. 양자 모두 꿈을 이성의 외부에 위치시키지만, 프로이트는 그 외부를 이성에 의해 분석되고, 이성으로 포섭되어야 할 것으로 내부화했다.
19세기 - 꿈은 신체의 환각작용이다. 18세기 후반부터 경험과학(실증과학)은 사물을 표상의 질서로부터 해방시켰다. 생물학은 분류학적 표상으로부터 분리된 ‘생명’을 정치경제학은 부의 표상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을 문헌학은 언설적 표상으로부터 분리된 ‘언어’를 개체화하면서 탄생했다. 인간이 ‘앎의 대상’으로 출현하게 된 것은 이런 인식론의 배치 속에서이다.
19세기 생리학자는 꿈을 생명활동의 한 기능으로 파악했다. 꿈-표상 자체의 의미보다 꿈을 만드는 ‘신체적 과정’에 관심을 모았다. 프로이트는 꿈꿀 때의 표상활동 역시 각성시의 표상활동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인간의 정신활동이며, 나름대로 규칙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 꿈 과학, 당사자의 연상 +해석가의 분석적 개입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들의 자유연상 과장에서 꿈 이야기가 반복됨을 발견했다. 환자의 억압된 심리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꿈속의 영상들처럼 혼돈과 망각, 왜곡에 오염된 대상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무망해 보였다. 프로이트 <꿈의 과학>은 대체 과학을 무엇으로 아느냐는 과학주의자들의 비웃음과, 광인의 세계를 이성의 세계로 식민화했다는 탈근대주의자들의 비판 사이에 놓였다.
프로이트 꿈 해석학의 가장 큰 특징은 꿈을 꾼 사람의 말, 연상, 자기 해석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거기다가 분석하는 사람의 해석과 현재의 분석상황까지 포함하여 구성되는 것이 꿈 텍스트다. 이런 주객관적 텍스트 구성에 입각하여 꿈의 규칙과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기에 ‘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꿈의 해석>은 19세기 실증과학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20세기 과학정신을 가진 책이다.
# 꿈 해석의 기본원칙
* 꿈은 부분표상들의 집합체이다. 꿈은 서로 다른 연상계열들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각성시 표상활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꿈-집합을 이룬 것이다. 꿈 생산의 기본 단위는 이질적인 사고연쇄로부터 이탈된 채 일정한 강도를 갖고 있는 다른 부분 표상들이다. 꿈은 오직 부분-표상들의 강도적 결합만 있을 뿐 어떤 전체성이나 단일성도 없다. 단일체가 아닌 복합체라는 것, 이것이 고대와 다른 프로이트 꿈해석의 특징이다.
* 꿈은 소망충족의 상연이다. “꿈 내용은 하나의 소망충족이고, 꿈의 동기는 하나의 소망이다.” 무의식적 소망-표상은 서로 모순되는 소망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의식은 모순된 소망의 종합이다.
* 꿈은 소망을 왜곡한다. “꿈은 어떤 억압되고 배척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다.” 고통스런 꿈-표상은 소망하는 표상을 감추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소망-표상과 꿈-표상 사이에는 표현의지와 억압이라는 대립관계가 설정된다. 무의식 속에서 꿈 꾼 사람의 소망은 타자의 욕망을 대신하기도 한다.
# 꿈-내용에서 꿈-사고로 ‘꿈 작업’
꿈작업이란 무엇인가. 우선 프로이트는 꿈 꾼 사람의 기억, 연상, 말 속에 드러난 것이 ‘꿈-내용’과 그것의 원천이자 해석의 결과로 주어질 잠재적 ‘꿈-사고’를 구별한다. 꿈작업은 외현적 꿈 내용으로부터 잠재적 꿈 사고로 거슬러 가는 과정이다. 응축, 전치, 감각적 형상화, 2차가공 등의 과정을 거친다.
꿈에서 사고방식은 매우 경제적이다. 하나의 표상 속에 여러 개의 내용을 ‘응축’시킨다. 표상 하나에 사고 내용 여럿이 중복 결정되는 꿈작업의 경제성은 해석의 어려움을 야기한다. 이런 어려움은 표상의 전치작업에서 훨씬 심각해진다. ‘전치’는 원래 표상 대신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다른 표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업이다. 중요한 표상은 사라지거나 사소하게 그려지고 사소한 연상내용이 커다하게 그려진다. 또한 꿈의 사고는 논리를 모른다. 만일, ~ 때문에, 마치 ~와 같이 등 논리적 연결을 하지 못한다. 꿈은 오직 현재형의 지각표상만을 가지고 논리적 과정을 그림 수수께끼처럼 그려낸다. ‘감각적 형상화’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이건 꿈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꿈을 비평하는 의식이 끼어들기도 한다. 꿈작업의 마지막 단계는 꿈속의 의식이 1차 작업을 거쳐 형성된 표상들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작업 ‘2차 가공’이다.
# 무의식, 의식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
프로이트가 꿈을 통해 발견한 낯선 세계는 우선 히스테리 환자의 무의식이었다. 히스테리는 문명이 요구하는 도덕의 압박 때문에 자신의 무의식을 억압해서 생긴 도덕의 질병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들도 꿈을 꾼다. 정상인과 히스테리 환자의 꿈은 아무런 차이도 없다. 꿈속에서 우리 모두는 ‘비정상인’이다. 이렇게 꿈을 정신분석의 중심요소로 삼음으로써 프로이트는 서구 사회에서 이어져 온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구분에 의문을 던졌다.
꿈속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광인의 의식세계이고, 히스테리 환자의 억압된 욕망의 세계이며, 기억 저편의 어린시절이고, 원시 인류의 표상세계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문명사회의 성인들에게 한없이 낯선 그 세계를 ‘무의식’이라고 불렀다. 무의식 세계는 저 멀리 있어 낯선 세계가 아니라, 스스로를 억압했기 때문에 낯설어진 우리 자신의 세계다. 무의식의 세계에는 신체의 개체성과 인격의 개체성이 없다. 거기서 우리는 만물과 동화되고 만인과 접속한다. 리비도와 표상의 세계에서는 인간 개체가 주인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 개체의 의식, 즉 자의식의 세계에서 보면 무의식은 ‘버그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의식은 의식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