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해지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

[은유칼럼]

각종 언론인 신뢰도 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그와 우연히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좋아요’가 1000개에 육박하고 부럽다는 유의 댓글이 100개에 달했다. 그를 향한 대중의 신망이 두텁다는 걸 체감했다. 나도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접하자 입이 딱 벌어졌다. 흐트러짐 없는 체형, 우윳빛 안색에 짜증 한번 안 낼 것 같은 고고한 입매의 그는 속인들 사이에서 단연 도드라졌다. 자석에 철가루 끌리듯 몸이 따라가는 바람에 사진까지 찍었지만 ‘우상’에 자동 반응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 사람이 언론인의 상징적 지위를 수십 년 누린다는 것. 당사자의 탁월함은 기본이고 제도적 뒷받침, 꾸준한 기회, 그리고 동료의 헌신이 따라야 가능하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앵커 역할 수행에는 서너 명의 작가가 투여된다. 방송작가가 정규직이 아니며 부품처럼 교체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는 또한 이성애자·중산층·비장애인· 남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차별이나 배제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악다구니 부릴 일이 덜한 안전지대에서 살았음을 그의 완벽한 신체-이미지가 증명한다. 남성이라는 스펙, 방송이라는 협업의 결과물이 한 사람으로 수렴되는 부조리한 구조에서 스타 언론인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영웅이 나오지 않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면이 있다. 이러한 선과 악의 복잡다단한 조합은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인격은 극히 다양한 속성의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그 속성들은 해마다, 심지어 시간마다 달라진다(82쪽).”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허물과 결핍의 존재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우상이 된다는 건 한 사람이 단순화·고정화· 신화화된다는 뜻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날 그는 용감했다.” 

나는 사진 속의 그를 이렇게 추억하기로 했다. 마이크 앞에서 용감했던 사람, 아니 자신이 가장 용감할 수 있는 자리를 잘 아는 사람으로.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건 고난도 삶의 기예다. 우리는 뉴스 진행자가 명성을 얻으면 정치판으로 진출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언론인이 정치인의 예비자 코스처럼 여겨질 정도다. 자기 업에 대해 실력·자부심·절제를 갖춘 언론계 종사자가 귀하다 보니 그의 신실한 행로가 더 귀감이 되는 것 같다. 

<좋은 산문의 길, 스타일>F. L. 루카스 지음, 이은경 옮김, 메멘토 펴냄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 될 때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러운데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 (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잘 존재하는 방법은 어렵고, 글 쓰는 내가 가장 나으니까, 삶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일찍이 짰다. 

글쓰기 수업도 그 일환으로 재밌게 하고 있다. 학인들은 매번 말한다. “우리 수업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러면 내가 정정한다. 좋은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 대인배라도 된 듯한 그 착각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임은 물론이다. “작가란 최상의 순간에 자기 인격의 최상의 측면을 갖고 주로 글을 쓰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83쪽).” 저마다 삶에 몰입하고 자기 인격의 최상을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 우상의 존재도 자연 소멸하지 않을까.


* 시사인 은유 읽다



일하지 않을 권리

[은유칼럼]

자유기고가 시절 ‘프리랜서’라는 명함을 파서 일했다. 있어 보인다고 남들은 말했고 나는 비정규직도 아니고 무정규직이라고 둘러댔는데, 이번에 정식 용어를 찾았다. 호출형 노동계약. “노동시간을 미리 정해두지 않고, 필요할 때 ‘호출’하면 달려가야 하는 노동 형태. 고용주는 노동시간을 보장할 의무가 없으며, 노동자는 실제 노동한 시간에 대해서만 임금을 받는다(59쪽).”

호출형 노동자는 시간 관리가 생명이다. ‘시간은 돈’이므로, 돈이 되는 시간 창출을 위해 주도적으로 머리를 싸매야 한다. 나는 취재를 위한 왕복 시간, 원고 집필 시간을 측정해 일을 수주받았고 조금의 오차도 없이 진행했다. 마감 기계로 일하다 보니 나를 호출하는 곳이 불어났고 그럴수록 내 속도에 발맞추지 않는 동료를 견디지 못했다.

프리랜서 생활 5년. 나는 “정확성, 효율성, 생산성을 모토로 삼(43쪽)”는 시간 노예가 되었다. 그 사실을 몰랐고 힘들지도 않았다. 자기 착취의 습성이 몸에 배어 ‘쪼는 사람’ 없어도 스스로 일하는 근면함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 부지런한 노동자 성향, 즉 강박적 시간관념에 충돌이 일어났다. ‘게으름뱅이들’을 만난 것이다.

글쓰기 수업에는 반장이 있다. 매주 수업을 마치면 다음 주 교재와 과제를 알리는 공지를 올린다. 반장은 자원자가 맡는다. 나는 늘 신신당부한다. 결석한 학인들을 위해 가급적 이틀 안에 올려달라고. 그런데 공지를 제때 안 올리는 반장들이 생겨났다. 주로 20~30대로, 유급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진선미를 추구하며 산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한마디로 문화 백수들이다. 한 친구는 내가 문자로 두어 번 얘기했더니 “직장 상사 같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뭐 때문에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안달인가.

최강 게으름뱅이는 ‘마음’이라는 이름의 반장이다. 마음은 반장을 자원했지만 타의 모범이길 거부했다. 수업에 매번 지각이었다. 처음엔 10분, 그다음엔 20분, 30분…. 심지어 수업이 끝난 다음에 온 적도 있다. 과제도 내킬 때 제출하고 공지도 시간 날 때 올린다. 하지만 마음이 올리는 공지는 자신이 일주일간 즐긴 음악이나 영화, 책에 관한 얘기와 정보가 넘친다. 좀 늦긴 해도 영혼의 양식이 담긴 공지에 학인들은 감동했다. 예전 같으면 ‘느려터짐’에 속 터졌을 나도 점점 빠져들었다. 마음에게 고백했다. “그대 같은 시(詩)적인 반장은 처음이야.”

할 수 있는 한 피해를 덜 끼치는 일 

데이비드 프레인 지음
장상미 옮김
동녘 펴냄

마음은 대학 때 학보사에서 일했고 이런저런 직장을 다녔다. 그런데 조직 생활이 맞지 않아 나왔단다. “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훼손되는 거 같았어요” 라고 한다. 기성세대에겐 ‘허투루 사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다.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직장 다니는 이들에게 “지루함, 얽매임, 소진되는 느낌(11쪽)”을 어떻게 견디느냐고 불쑥 질문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 일을 거부하는 동기는 자기 보호다. “이런 사례를 유별나거나 일탈적이라 치부하기보다는, 일을 재평가하고 단축하는 데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163쪽)” 바라보려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은 캠페인이 아니라 “시간을 둘러싼 정치”라고 푸리에도 말했다. 시곗바늘 같은 엄격함으로 소득, 권리, 소속감을 오직 일에서만 추구해온 나는 조금 두렵고 한편 즐겁다. “무슨 일 하세요? 라는 질문에 ‘할 수 있는 한 피해를 덜 끼치는 거요’(267쪽)”라고 답하는 상상은 얼마나 통쾌한가. 

참, <일하지 않을 권리>는 마음이 뽑은 2018년 올해의 책이다.


"돋는 해와 지는 해는 반드시 보기로"

[은유칼럼]

글쓰기 수업 시간, 연예인 지망생 아들을 둔 엄마가 글을 써왔다. 아이가 고등학교 시절 연극영화과를 지망한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그런 피 없다”라고 말했고, 엄마인 자신만 홀로 지지했다고 한다. 진로, 연애, 취업 등 인생의 모든 선택에서 ‘엄마는 무조건 네 편’이라는 응원에 힘입어,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엄마는 아들의 공연에 초대받는 유일한 혈육이자 비밀 없는 친구가 되었다는 훈훈한 일화였다. 

이 글을 본 20대 취업준비생 학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현실에 없는 엄마 같다, 이렇게 자식을 믿어주고 밀어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엄마 학인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너무 사소한 이유라서 굳이 글에 쓰지 않았다고 했다. 사연인즉, 대학 시절 친구들 넷이 월미도에 해 지는 걸 보러 갔는데 귀가 통금 시간에 걸려 자신만 일몰을 놓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으니 그때 눈물을 삼키며 결심했단다.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자유롭게 살게 하리라. 삶의 한 장면도 놓치게 하지 않으리라. 

ⓒ시사IN포토

엄마 학인의 수줍은 고백과 달리, 일몰을 볼 권리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한 사람의 세계관을 바꿔놓을 만큼 강력하지 않은가. 직장인은 해 지는 거 보자고 벼르다가 휴가를 낸다. 안면도로 달려가고 지중해로 날아간다. 푸른 하늘 한갓지게 감상하는 것도 서툴러, 여행을 가서도 전지훈련 온 선수처럼 빼곡한 일정을 짜서 새벽부터 경치 좋은 곳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닌다. 하늘, 구름, 바다, 나무, 꽃, 석양은 일 년 내내 소처럼 노동한 보상으로 접할 수 있으니 어찌 사소하다 할까. 

자연을 벗할 권리가 기본권으로 보장되면 좋겠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글 ‘어린 동무들에게’에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182쪽)”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지금처럼 도시화된 환경에선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울서 자란 나는 일출과 일몰을 주로 텔레비전의 애국가 영상으로 보며 컸다. 두 아이도 온갖 ‘체험학습’으로 돈 내고 자연에 노출시켰다. 갯벌 체험, 밤 줍기 체험, 고구마 캐기 체험 같은 것들. 그런데 푹 빠져들 틈도 없이 우르르 가서 시늉만 하다가 김밥 먹고 시간 맞춰 돌아오는 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행위인가 이제야 알겠다. 

“무엇엔가 멈추어본 아이만이 자기 삶을 만날 수 있다. 자기 삶을 만난 아이만이 자세히 볼 수 있고, 자세히 볼 때 놀라운 삶의 경이를 만날 수 있다. (중략) 자기를 만난다는 것은 자기 흥을 만나는 것이고 그때 그 무엇에 정신을 팔았다는 말일 것이다(190쪽).” 

“좀 노는 것같이 놀아보자”

<그림책이면 충분하다> 김영미 지음, 양철북 펴냄

나는 논두렁 밭두렁 뛰어다니며 놀지는 못했지만 시멘트 바닥에서 고무줄놀이하며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애들 얼굴 안 보일 때까지 ‘정신 팔며’ 놀았다. 아마 내가 그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시간을 잃어버리고 놀 기회를 너무 일찍 박탈당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자기 흥을 발견할 기회도 없이 무엇에 쫓기듯 정해진 일과표 속으로 아이를 밀어넣는 부모가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엄마 학인의 글을 보면서 뜨끔하기도 했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는 5월에 수학여행을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련회였다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놀 시간도 안 주고 극기 훈련이랑 교육만 시키는 수련회는 딱 질색이라며 다른 애들도 그러기로 했단다. 나는 무조건 지지한다고 했다. “아이들의 세계는 먹고 노는 세계(235쪽)”다. 2008년 일제고사 거부 투쟁에 나선 청소년들의 구호는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였다. 그로부터 10년 뒤 사적 저항에 나선 딸아이의 구호는 “좀 노는 것같이 놀아보자”다. 그래, 노는 것이면 충분하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관찰하라(34쪽).”

세상에 '그냥 엄마'는 없다

[은유칼럼]

"한 사람과 한 단어의 진정한 만남에 기회가 필요할 때도 있다. (…)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생에서 수많은 단어를 만나지만, 어떤 단어들은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데 비해 어떤 단어는 평생을 함께 지내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37쪽).” 

중국 문화대혁명 속에서 성장한 소설가 위화는 그 단어를 ‘인민’으로 꼽는다. 스물아홉 살에 작은 시위 현장을 목격하고 인민을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고백한다. 내게 그런 단어가 무엇일까 생각하니 ‘엄마’가 떠오른다. 부르기도 많이 불렀고 불리기도 제법 불렸다. 엄마에게 전적으로도 의탁했던 시기엔 공기처럼 망각했던 말. 출산을 한 뒤로 피부처럼 몸에 달라붙어버린 단어. 

ⓒ시사IN 자료

엄마라는 말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냥 엄마’는 없기 때문이다. 임신에서 출발해 신생아 엄마, 돌쟁이 엄마, 유치원생 엄마, 중학교 2학년 엄마, 수험생 엄마, 실습생 엄마, 군인 엄마 등 생애주기에 따라 다른 엄마의 옷을 입고, 상황에 따라 비염에 걸린 아이 엄마, 가해자 엄마, 학급 모임에 안 나오는 엄마도 되어본다. 매번 낯설고 계속 헤맨다. 둘째 아이는 첫째와 기질이 다르니 양육 경험이 무용하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 같은 엄마를 두 번 사는 경우는 없다. 

얼마 전 아들이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했다. ‘군인 엄마’는 가장 난해한 엄마 체험이었다. 입대 날짜 받아놓았을 때, 먼저 아이를 군에 보낸 선배가 말했다. “너, 글 쓸 거리 매일 생길 거다.” ‘글감이 많다는 건 풍파가 많다는 뜻인데….’ 무지는 불안을 조장했다. 아이가 신병훈련소에 있을 땐 날마다 육군 홈페이지에 접속해 편지를 썼다. 군부대 카페 게시판 클릭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소대 ‘밴드’에도 가입했다. 아, 구속이여. 군인 엄마로서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다가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단체에 가입해 후원금을 냈다. 여기저기서 정보를 챙기고 불안을 글로 달랬다. 

어느덧 나는 아들이 휴가를 나와도 사발면 사놓고 외출하는 의연한 엄마가 되어갔다. 바로 그 무렵 휴가 나온 아들이 귀대하며 말했다. 어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만 3년을 교제했다. 여자친구는 나와는 아들 면회도 같이 갔던 사이니, 우리의 인연도 종료되는 셈이었다. 아들을 보내고 나는 자꾸 눈물이 흘러 애를 먹었다. 아들과 감정선이 연결된 느낌은 아이가 열이 날 때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과는 또 달랐다. 이것이 슬픔의 공동체인가. 그 경험은 나에게 엄마라는 말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군 복무 중 애인과 헤어진 아들의 엄마까지 해보자 엄마 레벨이 상승하는 것 같았다. 

연이어 망각하고 배신하는 단어, 엄마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위화 지음김태성 옮김문학동네 펴냄

위화는 “한 개인의 운명을 결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었던 시대(124쪽)”를 통과했다. 유년 시절부터 소년 시절까지 사형수들이 총살되는 장면을 무수히 목격하고 밤마다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쫓긴 이야기를 터놓으며 “정신이 허물어지는 아슬아슬한 가장자리를 걸어온 것 같다(156쪽)”라고 쓴다. 그가 추락하지 않고 살아낸 건 글쓰기의 힘이었다.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더욱더 완전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147쪽).” 

한 개인의 운명을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삶인 엄마. 날마다 나를 생초보로 리셋시키는 환장할 엄마 노릇이 아니었으면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았을 거 같다. 뭐라도 쓴 덕에 몰락을 피했다. “가장 먼저 인식하고 쓴 단어였지만 살아가면서 연이어 망각하고 배신했던 단어(37쪽)”, 엄마를 오늘도 산다. 


- 시사인에 실림


은유 읽다 - 시시콜콜 시詩알콜

[은유칼럼]


5년 만에 해외여행을 간 건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여행 계획을 밝히며 가고 싶으면 붙으라고 했다. 소싯적 ‘줄넘기할 사람 여기 붙어라’에 엄지손가락 잡듯이 나는 붙었고 다른 친구도 붙었다. 여권 번호와 영문 이름을 불러주고 친구가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했다. 그때가 초여름, 여행은 가을. 실감나지 않았다. 집필·강연·살림이 회전문 돌아가듯 들이닥치는 일상에서 나는 과연 일주일간 훌훌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눈을 떠보니 타이 북부 도시 치앙마이. 한국에서 기껏 폭염을 견디고 다시 무더위 복판에 던져졌다. 사놓고 한 번도 못 입은 끈 달린 원피스에 슬리퍼 끌고 손바닥만 한 핸드백 메고 여행자 모드로 변신했다. 휴대전화 로밍은 하지 않았다. 할 일 없이 들여다보는 스마트폰과 읽지도 않을 책을 넣은 무거운 가방에서 해방된 일상은, 가능했고 충분했다. 

이러한 내 쾌락의 이면에 타인의 노동이 있다는 걸 셋째 날이 지났을 때 알았다. 여행을 주동한 ‘친구 1’은 항공사 우수회원에 영어 능통자다. 남의 나라 골목 구석에 있는 음식점도 구글맵으로 척척 찾아낸다. 예약부터 안내, 예산 집행을 가이드처럼 도맡았다. ‘친구 2’는 영상 작업을 한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우리들 추억을 기록했고, 특유의 준비성을 발휘해 맛집, 명소 등 여행 정보를 챙겨왔다. 나는 휴대전화 안 됨, 영어 못함, 체력 약함을 핑계로 그냥, 마냥 따라다녔다. 조금 미안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는데 친구 1이 한번은 말해버린 것이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가는 길이라도 찾아 좀.” 

앗, 그건 내가 밥 짓느라 동동거리면서 애들한테 “수저라도 좀 놓아”라고 하는 말의 톤과 뉘앙스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친구 1, 친구 2는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다. 나이도 내가 제일 많다. 교실 밖 여행 속에서 나는 ‘쌤’이 아니라 무지렁이가 되었고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여겼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그들 처지에선 여행이 서툴고 ‘원래부터 못한다’라며 두 손 놓은 나를 부리거나 내게 성질내긴 어려웠을 거 같다. 

“우리 팀은 분위기가 좋아. 이상한 사람도 없고.” 팀장이 말하면 팀원들이 겉으론 같이 웃지만 속으로 ‘이상한 사람=너님’이라고 말하는 웹툰을 본 적이 있다. 위계와 위치에 따른 감각은 이토록 다르다. 내가 안락하면 남은 그만큼 힘겨운데 안락한 자는 그 사실을 몰라서 더 안락하다.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좁은 곳, 무엇도 영원히 숨길 수 없(184쪽)”다. 그런데도 “티를 덜 내고 감정을 참고 내 자신을 속이는 게 언제부터 어른스럽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181쪽)”. 어른스럽지 않게 티를 내준 친구 1이 고마웠다. 덕분에 어른스럽지 않은 행동을 자각할 수 있었으니까. 

가을 여행 이후, 우린 한겨울에 재회했다. 친구 2가 깜짝 선물을 내밀었다. 나와 친구 1의 사진을 손수 편집한 앨범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여기는 반캉왓, 와로롯 마켓, 호시아나 빌리지…. “사라져버릴 소중한 ‘그때’를 묵념하는 것 같은 순간들(107쪽)”에 울컥했다. 쓸쓸할 때마다 두고두고 어루만질 실물 추억이 생긴 것이다. 타인의 친절로 떠나고 즐기고 기록된 여행. 사진 속 내가 부자처럼 웃는다. 마음에 쌓아둔 친절을 난 누구와 나눌까. 

‘난 말이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면/ 마음에 저금을 해둬// 쓸쓸할 때면/ 그걸 꺼내/ 기운을 차리지// 너도 지금부터/ 모아두렴/ 연금보다/ 좋단다’ (저금-시바타 도요, 122쪽).


* 시사인 은유 읽다


내 아이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은유칼럼]

‘아이의 말을 중간에 끊지 마세요.’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주세요.’ ‘아이가 화낸다고 같이 화내지 마세요.’ 어느 건물 승강기에 탔더니 ‘좋은 부모 10계명’이 붙어 있다.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의 말이다. 그걸 보며 쓴웃음이 나왔다. 부모가 저렇게 하려면 적어도 초과 노동이나 타인의 무례와 간섭에 시달리는 임금노동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관대함은 탄수화물에서 나온다’는 말은 진리다. 좋은 부모 노릇은 10계명이 아니라 등 따습고 부른 배, 심리적 평안에서 비롯된다. 세상에 그냥 부모는 없다. 건물주 부모, 그 건물을 청소하는 비정규직 부모, 만사가 귀찮은 갱년기 부모,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해 화가 난 젊은 부모가 있을 뿐.

ⓒAP Photo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의 묘.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안의 ‘미친년’을 애 키우다가 만난다고, 엄마들이 모여 자조적으로 얘기한 적이 있다. 나도 그랬다. 퇴근 후 집이 어질러져 있거나 아이가 보채면 부아가 치밀었다. 온종일 누적된 짜증과 피곤이 다 어디로 가겠나. 눈앞에 있는 만만한, 나보다 약자인 아이에게 쏟아졌다. 그러곤 아이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지 못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 슬픈 반복을 단절하고자 내가 택한 건 마음 다잡기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이다. 일을 줄이고 반찬가게를 활용했다. 그제야 ‘아이가 화낸다고 같이 화내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를 버릇없이 키우지 말라는 양육법 같은 것은 이미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 좋은 엄마는 고사하고 불량 엄마를 면하고 싶은 내게 도움을 준 유일한 육아서가 있다.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펴냄

이 책은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을 벌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해자 딜런의 엄마가 쓴 자기 진술서다. 저자의 직업은 장애인 학교의 교사. 자기 아이들에게 늘 약자에 대한 관심, 관용과 포용을 강조했다고 한다. 딜런은 학대와 방치를 당한 게 아니라 소위 ‘정상 가정’의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데에 바친 16년의 기록을 공개한다.

아이를 어떻게 키우라는 식의 답은 없다. “내가 알고 신경 쓰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아이들에게 쏟아부었다. (…) 설교하는 대신 귀를 더 많이 기울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419쪽)”와 같은 회한만 간간이 새어나온다. 그런데 저자에게는 또 다른 아들(딜런의 형)이 있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도 아이들은 다르게 큰다. 나쁜 영향이든 좋은 영향이든 부모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좋은 엄마가 되는 법이 아니라 좋은 엄마라고 착각하거나 방심하지 않는 법을 일깨운다는 점이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도 다르게 크는 아이


한국에서도 인천 초등생 살해 사건이라는 끔찍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했다. 콜럼바인 총격 사건을 두고 그랬듯이 세상 사람들은 쉽게 판단했다. “사악함을 타고난 나쁜 씨앗이었다거나, 아니면 도덕적 지침 없이 막 자랐다고(243쪽).” 가해자와 부모를 욕하고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까 봐 염려한다. 이 책을 읽은 나는 멀쩡해 보이는 내 아이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싹했다. “사람은 가정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며 “아이가 아무리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그걸 드러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부모, 교사, 친구들조차 모를 수 있(183쪽)”기 때문이다. 

‘이웃집 괴물’은 부모의 지덕체 결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좋은 부모’라는 낭만화된 이상은 양육의 본질을 가리고 매사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사이 현실은 빠르게 나빠진다. 아이를 잘 키우기보다 명대로 본성껏 살게 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게 시급하다. 그런 점에서 좋은 부모 10계명 대신 붙여놓고 싶은 문장이 있다. “도덕성, 공감, 윤리, 이런 건 한 번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417쪽).”

아픈 몸을 살다

[은유칼럼]

마흔 이후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 특별히 약을 챙겨먹어야 할 질환이 없어서였는데, 그랬더니 몸에 무심해졌고, 무심하다가 와르르 망가지겠다는 신호가 왔다. 종종 숨이 가쁘고 골이 띵하고 몸이 꺼졌다. 7년 만에 검진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생리 마치고 1~2주 후에 오라기에 날짜에 맞춰 예약을 했는데, 검진을 앞두고 또 생리를 하는 게 아닌가. 처음 있는 일이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혐의는 하나였다. 갱년기, 생리불순. 두 단어를 검색창에 입력하는 손가락은 더디었다. 갱년기라는 말이 내 삶에 최초로 기입되는 순간, 속옷에 묻은 생리혈을 처음 봤을 때처럼 나는 저 홀로 수치스러웠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며, 그래서 연습할 기회를 놓친다. 또 연습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들은 질병이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라고 믿게 되며, 다른 이와 함께 질병을 경험하고 배울 기회를 놓친다(13쪽).”

ⓒ시사IN 신선영


<아픈 몸을 살다>는 심장마비와 암을 겪은 저자가 자신의 질병 경험을 사유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현대인이 자기 몸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빈곤한 원인을 알게 되었다. 생리불순 같은 일시적 증상부터 심각한 질병까지 아픈 얘기는 궁상이나 엄살, 약점이나 결핍으로 치부됐기에 너나없이 쉬쉬한다. 그럴수록 병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우리 몸은 ‘의학의 식민지’가 된다. 

저자의 의견에 크게 공감한 나는 앞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의심을 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참이기에 생리불순 건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목소리는 목소리를 불렀다. 또래나 선배 여성들이 원래 그런다, 더한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수년 내 폐경이 온다는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배울 기회를 챙겼다. 인체의 신비는 여전히 모르겠어도 늙어가는 자궁의 변덕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번 검진에서 수면 내시경도 처음 받았다. 손등에 주사 바늘을 꽂고 위 운동 억제제, 목 마취제라는 야릇한 맛의 시럽을 삼키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커튼으로 칸칸이 구획된 곳으로 내시경 받을 사람, 받은 사람, 마취 깬 사람의 침대가 일사불란하게 이동했다.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듯 질서정연한 사람의 흐름에 나 또한 이름이 불려 끼어들어갔고, 눈을 떴을 때는 검사가 끝난 뒤였다.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봄날의책 펴냄

수면유도제 기운 탓인지 기분 탓인지 몽롱한 가운데 말소리가 들렸다. 옆 칸 침대의 남자 어르신은 혼자 갈 수 있다며 몸을 일으키고, 간호사는 연세가 있어서 위험하며 보호자가 와야 나갈 수 있고 혼자 가려면 잠 깨는 약을 먹어야 하는데 비용이 1만원 든다고 했다. 실랑이가 길어졌다. 저 어르신은 보호자가 없는 걸까, 1만원이 없는 걸까. 둘 다 없는 걸까, 둘 다 있지만 의료 체계에 저항하시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로 보호자를 대동할 수 없는 환자가 분명 있을 텐데 어쩌란 말인가. 

질병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다

아프거나 아팠을 얼굴들이 떠올랐다. 두 노인네 밥 먹고 병원 다니는 게 일이라고 한탄하는 시부모님,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받은 아버지, 전신 마취하고 디스크 수술을 한 남편. 큰 수술이 아니라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병원 침대에서 느꼈을 고립감과 “더는 젊지 않은 자신과 헤어지는 일(148쪽)”의 처연함을 너무 몰랐다. 나의 반성과는 별개로, 아픈 사람을 “가족의 시간과 경제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존재(197쪽)”로 만들고 질병을 개인의 성격이나 건강관리 부주의로 돌리는 사회 현실에는 분개한다. 

“질병이 없는 인생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202쪽)”고 하니 감내할 건 감내하고 싸울 건 싸우면서 몸의 일기를 기록해야겠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생리가 규칙적일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김훈이 쓴 산문집 <풍경과 상처>의 첫 문장,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의 패러디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 말 한마디

[은유칼럼]

2014년 4월17일,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 날 영화 <한공주>가 개봉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배우 천우희가 피해자 역을 맡았다. 한 여중생이 남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이후 일상을 보여주는 사물은 트렁크다. 딱 그만큼이 피해자에게 허락된 삶의 지분 같았다. 가해자는 지붕 있는 집에서 발 뻗고 잠들고 피해자는 짐 가방 끌고 떠다니는 현실. 또다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한공주는 입을 연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조용한 되물음. 여성주의 논리나 주장이 아닌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한 저 발언. 항변이라 하기엔 담담한 발화가 화살처럼 박혔다. 잘못 없는 사람이 되레 질긴 고통과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현실을 환기했다. 피해자가 말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그 말의 결과 힘을 살려냈다는 점에서 <한공주>는 내게 좋은 영화로 남아 있다.

영화 <한공주>는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현실은 영화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나는 2013년부터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다. 거의 매일 매스컴에서 접하는 기사들, ‘인면수심’이라는 타이틀로 소비되는 성폭력 사건을 당사자가 피해자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함께한다. 처음엔 한 사람을 성적 도구화하는 가해자의 폭력에 분노했지만 점차 피해자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한 피해자는 성폭력상담소에 왔던 날을 복기했다. 상담 선생님이 너는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안 맞고 강간 안 당하고 사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자신은 감히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한 대도 맞지 않고 강간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고 단지 나를 위로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며 글을 이어나간다.

교사나 가수 같은 직업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꿈일 수 있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나는 저 부분을 거듭 읽었다. 꿈의 실현을 믿지 않았던 피해자는 지금은 꿈대로 맞지 않고 살고 있다. 한 존재를 피해 경험에 국한하지 않고 삶 전반을 이해하려는 상담사의 사려 깊은 물음, 에두르지 않는 정직한 대답까지, 피해자가 말하기 시작할 때 더는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 경험해도 아프고 벅차다.

말하기와 분노하기로 세상에 참견하기 


<철학하는 여자가 강하다>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이마 펴냄

이 말하기의 중요성을 독일의 철학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철학하는 여자가 강하다>에서 강조한다. “여성의 역할이라는 족쇄(155쪽)”, 남성과 여성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왜곡된 성 고정관념이 남성에게 어떤 권력을 주고 여성을 어떻게 무력화시키는지 분석하며, 자기 삶의 권력을 찾기 위해선 말하고 행동하라고 독려한다. “선뜻 용기가 안 난다고? 당신이 말과 기호로 이 세상에 참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똑똑히 보라(100쪽).”

최근 논란이 된 안경환의 <남자란 무엇인가>는 보여주었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최종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것이 사내의 생리다. 거부되면 불안은 분노로 전환된다.” 그러니까 수동적인 것이 여성의 본성이라고 말한 루소부터 폭력 등을 생물학적 남성의 본질로 규정하는 한국의 법학자까지, 남성 엘리트의 말하기는 일관되고 공고했다. 그것은 수많은 한공주를, 강간당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딸들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하는 사망자를 낳는 데 일조했다. 폭력은 ‘사내들의 생리’가 아니라 사회적 무의식의 허용에 따른 ‘권력 행동’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하기에서 나아가 분노하기까지 행동 권력의 탈취를 권한다. 물론 “분노하는 남성은 불안을 조장하지만 분노하는 여성은 우습다(127쪽)”는 현실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기와 분노하기로 세상에 참견하는 것밖에 방도가 없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안 맞고 강간 안 당하고 사는 게 꿈이에요” 같은 말들이 당장은 우습고 나약할 테지만 거기엔 당연한 것을 뒤집어보게 하는 힘이 있다. 말하기에 실패해도 “우리의 실존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