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들판 / 여간

[올드걸의시집]

들판의 갈매빛은 봄하늘과 합쳐져

하늘 파랗고 들판빛 높다.

나 이제 푸르름 속으로 가노라니

힘은 쑥대 위를 날아오를 듯

이 몸 멀리 있는 것 이미 깨닫고

돌아가는 기러기의 고달픔 애처롭다.

날카로운 활시위 소리 변방에 가득한데

외로운 그림자는 강 물결에 떨어진다.


- 여간, <푸르른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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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필무렵, 안양교도소 가는 길

[사람사는세상]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거리에서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봄이 온 거다. 조회 시작할 때 애국가 부르는 것처럼 <하얀 목련>을 부르며 봄을 맞는다. 난분분 낙화하는 양희은의 목소리에 위로받는다. 뭇 생명 약동하는 봄이라지만 언제부턴가 버겁고 부럽다. 나만 그런 건 아닌가보다.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곁눈질 하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니 봄은 잔혹한 계절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기형도에게도 봄은 비생명의 계절이었다.  

천생 약한 것들에게 마음 주었던 시인들의 노고에도, 봄은 어김없다. 햇살 푸지다. 기화요초 피어난다. 재작년 봄도 그랬다. <하얀 목련>을 부르던 즈음이다. 평화인문학 졸업식을 취재하러 안양교도소에 갔다. 화사한 봄빛 물든 거리를 지나며 ‘그 자리에서 움질일 수 없는 사람들의 봄’을 생각했다. 담장 안의 빛깔은 어떠할까. 푸르죽죽한 죄수복을 입은 재소자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서늘하고 음울한 공기가 낮게 깔린 고3 교실 정도를 상상했다. 그런데 웬걸. 활기찼다. 졸업식에서 소감을 발표하라고 했더니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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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 이태수 '바람이 분다'

[올드걸의시집]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 바람이 분다.
지난해 사시사철 잉잉대던 그 찬바람이 분다.
그는 돌아오지 않고, 그를 기다리는 마음은
이토록 붉은데, 세상은 여전히 뒤죽박죽 돌아간다.
사람은 벌써 그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는지,
그도 이젠 어디로 영영 가버렸는지, 꿈속에서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던 봄이 다시 오고
산과 들판, 뜨락에 갖가지 꽃이 피었는데도
내 마음에는 봄이 돌아오지 않는다.
풀잎도 꽃들도 안 보이고, 냇가의 얼음도
처마 밑의 고드름도 녹지 않는다.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
초점 잃은 눈동자, 그래도 아랑곳없는 사람들.
공장의 기계들은 잠을 자고, 집들이 흔들린다.
거리에서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은
가슴에 별빛을 끌어들이지만, 따스한 밥을 꿈꾸지만,
밥그릇을 사이에 둔 아귀다툼이 날로 드세진다.
벼랑에 선 사람들의 아우성과 그 아우성 사이로
여전히 찬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몰아친다.
봄이 왔는데도 봄은 오지 않는 이 세기말의
어둠 한가운데서 그래도 하염없이
봄을 기다린다. 그를 기다린다.

 

- 이태수 시집 <내 마음의 풍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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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오는데 / 도종환 '거리에 흔들리며 남아...'

[올드걸의시집]

 

 휠체어에 실려서 잠깐만이라도
 꼭 한 번 바깥세상을 보고 싶노라고
 그렇게 당신이 마지막 보고 간
 이 세상 거리에도
 다시 봄이 오고 있네
 내 영혼 깊은 상처로 박혀 있는
 당신을 기억하며 살다
 나 또한 그 상처와 함께 세상을 뜨고 나면
 이 세상엔 우리들의 사랑도 흔적없이 지워져
 다시 눈 내리고 바람만이 불겠지
 봄 오고 언 땅이 풀리면 새들만 돌아오겠지
 당신이 마지막 보고 간
 짧은 이 세상 거리에 흔들리며 남아
 이 봄은 또 어떻게 살까 생각하듯
 사람들 중에 몇몇도 또 그렇게 있다가 가겠지


 -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



징그럽다. 감당못할 봄. 빛이 터지고 존재가 열리는 봄.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고의 화신, 위인전에 나오는 천재처럼 버거운 봄. 어디 하나 나무랄 곳 없는 봄. 찬란하고 화려하고 충만하면서도 소박한 봄. 다소곳 예의바른 봄. 결핍의 결핍의 시간. 봄.봄이 온다고 부암동을 걷자던 친구와 봄의 골목길을 걷고, 봄이 온다고 봄을 느끼라는 숙제를 받아온 딸과 덕수궁 꽃놀이를 가고 봄이 온다고 모종을 심는다는 환경운동가와 흙도 밟았으되,  들뜨는 봄은 허공을 걷는 것 마냥 발 밑이 불안하다. 회복기의 환자가 병원 마당에 나온 것마냥 눈 부셔 눈 못 뜬다. 이 봄을 또 어떻게 살아갈까냔 말이다.  

세상 조명이 어둑어둑 한톤 낮아진 요 며칠은 좋더라. 눈물같은 봄비까지. 분무기로 아지랭이 피는 마음에 물이 뿌려진 듯, 만원 버스에서 자리를 잡은 듯, 예쁜 카페의 구석에 앉아 있는 것마냥 맘이 편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당진출장을 갔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7시가 되기 전 버스에 몸을 싣고 비오는 도심을 한바퀴 돌아 카페에 내렸다.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켜 까만 커피에 눈코입 빠뜨리고 놀았다. 우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걸음걸이의 템포를 감상하며 놀았다.  봄날의 체증이 좀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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