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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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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같은 바지 / 이오덕 '두껍고 푹신한 마음을' 10년쯤 전에 광화문 땅밑 교보문고로 들어가는 길에서 사 입은 누런 골덴바지, 그게 몇 해 전부터 무릎 쪽이 헤지고 엉덩이가 빵꾸날 지경이라 더 입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어 그대로 두었는데 서리가 하얗게 내린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라 마침 그날 찾아온 서울 ** 동 어느 골목에서 삯바느질하는 고호자 씨한테 부탁을 했다. 이 바지 좀 꿰매 주실 수 있을까요? 이 뒤쪽과 두 무릎 안쪽에 좀 큼직하고 두꺼운 천을 대어서 누벼 주시면 좋겠는데요, 더구나 무릎은 몇 해 전부너 늘 찬바람이 일어날 지경이니 푹신한 걸로 대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고씨가 보더니 그렇게 하겠다면서 가져가더니 일 주일 뒤 꿰맨 바지를 가져왔다. 날씨가 추운데 빨리 입으셔야지 싶어서요 하면서. 그걸 입어 보니 와아, 무플이 후끈후..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 함민복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함민복 시집 순천엘 갔다. 순할 順 하늘 天이란다. 깨끗하게 빨아 입은 광목한복 같은 정갈하고 기품 있는 도시 풍광에 반했다. 순천만을 보았다. 무연히 펼쳐진 갈대숲. 노래방 화면에서 나오는 그것처럼 비현실적일 정도로 끝도 없다. 안쪽으로 드리워진 뻘밭. 찰지고 진득진득하다. 뻘의 부드러운 속살 그리고 물살. 하늘하늘 바람결따라 일렁이는 물결이 깊고 위엄있다. 동해바다의 집채만한 파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고귀한 기운. 오후 5시 노..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 김광석, 눈물의 작은 새여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덥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정호승 시집, 작년 여름 어느 일요일 오후에 딸이 말한다. "엄마, 우리 오랜만에 김광석 음악 좀 듣자~ 그동안 너무 안들었어~" 난 뜨끔했다. 맞다. 김광석 음악을 그의 기일을 보내고나서 한번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 안 듣긴했는데 지금은 안돼. 낮부터 너무 슬프잖아.." 그랬더니 딸이 묻는다. "왜 슬퍼? 김광석이 죽어서?" "응..." 하지만 그가 죽..
하늘 / 박노해 '우리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 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학교로 돌아오려는 제자에게 / 나희덕 '학교에 다니고싶어요' 오랜만에 네 편지를 뜯는다, 한번도 너의 얼굴을 잊은 일은 없었지만은, 교실문을 여닫을 때마다 바람이 닫고 가는 문 뒤에 네가 서 있었다. 선생님, 저예요, 제가 왔어요. 저도 학교에 다시 다니고 싶어요, 또렷한 네 음성에 놀라 떨리는 손으로 수업을 시작하곤 했지. 한달간의 가출로 자퇴서를 쓰고 돌아섰던 너, 노동자들과 함께 보내던 날들이 그립다던 너에게 이제 편지를 쓴다. 너는 그릇에 넘치는 물, 화분 위로 끓어오르는 뿌리 굵은 나무, 그리하여 팍팍한 땅에 심겨지고자 하는 나무, 그러나 네가 돌아오려는 이곳은 넓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땅이란다. 단 한번도 너의 등을 떠나보낸 적은 없었지만 저 넓은 들판과 거친 물결 속으로 어느 새 너의 떠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바람 한 점 없는 이 교실에서는. 나희덕 시..
지하철에서4 / 최영미 '지하철은 실업자로 만원이다' 세 여인이 졸고 있다 한 여인의 머리가 한 여인의 어깨에 한 여인의 어깨가 한 여인의 가슴에 한 여인의 피곤이 또 한 여인의 시름에 기대 도레미 나란히 세 남자가 오고 있다 순대 속 같은 지하철 데친 듯 풀죽은 눈알들 헤집고 삶은 듯 늘어진 살덩이 타넘고 먼저, 거지가 손을 내민다 다음, 장님이 노래 부른다 그 뒤를 예언지의 숱 많은 머리 휴거를 준비하라 사람들아! 외치며 깨우며 돌아다니지만 세 여인이 졸고 있다 세 남자가 오고 있다 오전 11시 지하철은 실업자로 만원이다 최영미 시집 내 일상의 중요한 무대, 지하철. 900원에 상시적 이용 가능한 개인 독서실, 약속시간 지켜주는 충실한 애마 기능은 기본. 어쩌다 비라도 내리는 날 운좋으면 추억의 팝송까지 틀어주는 센스만점 음악감상실. 낮 시간대 한산한 ..
꽃잎 - 사랑노래9 / 김정환 '다시 열리는 열림' 일상은 내용이 끝내 형식보다 천박하지. 열리고 다시 열리는 새로운 열림을 여는 꽃잎. 깊이도 없이 열림의 열린 중첩이 깊이보다 깊은 그 앞에서는 우주도 애매하고 생애도 허망하고, 그게 영롱한 꽃잎 그리고 영롱은 뼈대가 끝내 응집보다 바삭하지, 열리고 다시 열리는 새로운 열림을 여는 꽃잎, 부피도 없이 열림의 열린 중첩이 부피보다 더 벅찬 그 앞에서는 남녀노소도 부모자식도 구분이 흩어지지만 결합이 영롱하고 흐린 삶이 가까스로 구체적이라 총체적인 꽃잎 울음이 카오스를 응집하고 웃음이 코스모스를 확대하는 꽃잎 아름다움은 필경 그런 새로움의 형식이다 열리는 시간을 영롱하게 하는 꽃잎과 꽃잎 사이 열리는 공간을 영롱하게 하는 꽃잎과 꽃잎 사이 사이와 사이 사이로 - 김정환 시집 혼자남은 어느 밤 영화가 그립다. ..
긍정적인 밥 / 함민복 -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 만큼' 가난한 사람은 많지만 밥 굶는 사람은 없다고들 하는데 그래도 그들을 생각하면 심히 걱정스러웠다. 시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다. 시집은 정말 안 팔리는 책이다. 책값도 헐하다. 활동가들도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어떻게 3,4인 가족이 먹고 살까. 몇 년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회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알아보았는데 대체로 그들은 혼자 사는 경우가 많고 가족이 있더라도 적게 벌어 적게 쓰는 검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활동가나 시인들도 그 그룹의 상위1%는 풍족하겠지만서도. 암튼 그즈음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을 읽었다. 그 뒤로는 서점에 갈 때마다 '시집'을 한 권 두 권 사들이고 있다. 별바당 콩다방 커피값에 천원짜리 한두장만 보태면 살 수 있다. 특히 가을 접어들면서부터는 시 읽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