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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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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오는데 / 도종환 '거리에 흔들리며 남아...' 휠체어에 실려서 잠깐만이라도 꼭 한 번 바깥세상을 보고 싶노라고 그렇게 당신이 마지막 보고 간 이 세상 거리에도 다시 봄이 오고 있네 내 영혼 깊은 상처로 박혀 있는 당신을 기억하며 살다 나 또한 그 상처와 함께 세상을 뜨고 나면 이 세상엔 우리들의 사랑도 흔적없이 지워져 다시 눈 내리고 바람만이 불겠지 봄 오고 언 땅이 풀리면 새들만 돌아오겠지 당신이 마지막 보고 간 짧은 이 세상 거리에 흔들리며 남아 이 봄은 또 어떻게 살까 생각하듯 사람들 중에 몇몇도 또 그렇게 있다가 가겠지 - 도종환 시집 징그럽다. 감당못할 봄. 빛이 터지고 존재가 열리는 봄.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고의 화신, 위인전에 나오는 천재처럼 버거운 봄. 어디 하나 나무랄 곳 없는 봄. 찬란하고 화려하고 충만하면서도 소박한 봄. 다소곳..
농담 / 이문재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이문재 시집 일산 엠비씨 드림센터에 갔다. 크고 멋진 건물 1층에 악세사리처럼 예쁜 카페 '커피프린스'가 있었다. 의자 하나하나 컵 하나하나가 다 잡지에서 꺼낸 것처럼 예뻤다. 채광창에 쏟아지는 빛살이 탐스럽게 쏟아져 눈이 부셨다. 발 아래 강물이 흐르는 선상카페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여기서 얼마전에 태지가 공연을 했었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페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인터뷰이를 기다리면서 ..
달의 몰락 / 유하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 아래 집안 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시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 밖으로 나간다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그 쓸모 없음에 대한 사랑이 나를 시 쓰게 한다 그로므로 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호의보다는 날 전혀 읽어내지 ..
낙화암 벼랑위의 태양의 바라의 춤 / 김승희 울고 있구나, 불아, 너는 왜 항상 벼랑 위에 서 있니? 말해봐, 촛불아, 바람은 부는데...... 가장 푸른 자오선을 목에 걸고 여자들이 벼랑 위에 서 있다. 말해봐, 불아, 누가 나를 벼랑으로 부르는지..... 어둠이 가득찬 내 척추의 흰뼈에 누가 자꾸만 한덩어리 촛불을 당기는지...... 오늘, 여기에선, 가장 숨죽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상여소리 바라 소리 피리소리 요령소리...... 오늘, 여기에서, 벼랑은 태양의 갈기를 달고..... 해는 하늘에도 있고 강물에도 있어서 천지의 맞닿음이여, 바라의 부딪침이여......햇덩어리 물덩어리 마음 덩어리들이 부딪쳐..... 피 톨속에 피어나는 일만 덩이의 바라의 태양꽃들을 너는 보았느냐..... 목숨이여...... 핏속으로 부풀면서 터지는 희디흰 두견의 ..
바다가 내게 / 문병란 '인간은 외로운 고아' 내 생의 고독한 정오에 세 번째의 절망을 만났을 때 나는 남몰래 바닷가에 갔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빈 바닷가 머리 풀고 흐느껴 우는 안타까운 파도의 울음소리 인간은 왜 비루하고 외로운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울려야 하고 마침내 못다한 가슴을 안고 우리는 왜 서로 헤어져야 하는가. 작은 몸뚱이 하나 감출 수 없는 어느 절벽 끝에 서면 인간은 외로운 고아. 바다는 모로 누워 잠들지 못하는 가슴을 안고 한밤내 운다. 너를 울린 곡절도, 사랑의 업보도 한데 섞어 눈물 지으면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허허 물아쳐 웃어 버리는 바다. 사랑은 고도에 깜박이는 등불로 조용히 흔들리다 조개껍질 속에 고이는 한줌 노을 같은 종언인가. 몽뚱이보다 무거운 절망을 안고 어느 절벽 끝에 서면 내 가슴속에 돌아와 허옇게 부..
20년 후에, 芝에게 / 최승자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라'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江)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고정희 '따뜻한 세상 한번'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을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그림자 멀리멀리 얼음짱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
지평선 / 김혜순 '상처만이 상처와 스민다' 누가 쪼개 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 놓았나 윗 눈꺼풀과 아랫 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성차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 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 김혜순 시집 감탄할 수도, 존경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무능력. 니체의 멋진 말이다. 한 신체의 감응력이 곧 능력이라고 스피노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슬퍼할 수 있음이 능력이라면, 시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