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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휴면기- 허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

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

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

도 아니었다.

 

염소 새깨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

며 시 앞에 섰다.

 

- <휴면기>,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직장인이 된다는 건 매일 같은 시간에 출퇴근 하는 일이다. 물론 퇴근이 불규칙한 경우가 더 많다. 노동력을 파는 게 아니라 일상을 통째로 넘기는 일이다. 12월이 다가온다. 4월부터 지금까지 8개월간 받은 월급을 계산해보았다. 그 금액에 내 마흔넷이 그렇게 거래되었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손에 쥐어진 돈이 크지 않아서 더 그렇고, 그 초라한 월급 외엔 또 남은 게 없다는 사실이 황망하다. 집을 이사하고 빚이 생겨서 매월 일정액을 갚아야 한다. 큰 돈보단 고정급이 필요해서 회사에 들어간 거니까 내몫이다. 일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온갖 일을 시도하고 축제를 치러내기도 했지만 그 만족은 금새 빠져나갔다. 미미하다. 내 삶의 위기는 월급이 적다는 게 아니라 읽고 쓰는 삶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퇴근 후 책 읽고 글 쓰고 싶었는데 야무진 꿈이었다. 대체로 비실거리다가 잔다. 아니, 잠이 든다.   

 

매주 화요일에 연구실 회의도 자주 가지 못한다. 어제도 불참했다. 원래는 행신동에서 외부 미팅이 있었고, 그걸 끝내고 갈 참이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 끝나니 7시. 그 때 연구실에 가면 8시, 회의하고 집에 올 길을 헤아리니 오밤중. 회의 하고 나면 진이 빠져 기운이 바닥난다. 또 민망하게 못간다고 단톡방에 남겼다. 병권샘은 못 본지 오래됐다며 담주에는 꼭 오라고 하고, 나는 '직장인에 육아인에 집이 해방촌이 아닌 사람은 연구실 활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스럽다'며 '밤 되면 눕고만 싶다'는 신세한탄 문자를 보냈다. 정수샘은 요새 '미생'을 본다며 '직딩의 고단함'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미생을 하기 전에 정수샘은 내가 힘들다고 하면 "그래요?" 하면서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곤 했었다. 알아주니 고맙고 서럽다.

 

시를 읽는 삶. 시에 감응하여 글을 쓰는 삶. 시를 읽고 남루한 일상의 위로 받고 삶을 추스리던 시기가 있었고 무언가 열심히 올라오는 상념을 털어놓으면 가벼운 마음에 또 살아갈 힘을 얻곤했다. 그런데 그게 시시했다. 맨날 칭얼대는 어린애가 된 거 같아, 염소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거 같아 부끄럽고. 언제부턴가, 아마 시세미나가 끝나고부터 일 것이다. 시도 드문드문 읽고 글도 잘 안 쓰게 되었다. 시도 삶도 뻔하고 시시하고. 헌데 그 뻔하고 시시하단 자각조차 시가 아니면 하지 못했다. 시가 빠져나간 삶은 급속도로 퇴락했다. 시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시가 아무것도 아닌 내 삶의 근거이자 이유였단 말인가.  고백하자면 내가 다시 몸부림을 치게 된 건 시 때문이다. 요즘 나는 다시 시를 읽는다. 오래 끊었던 술을 마시는 것처럼 빨리 취한다. 심수봉 노래같이 바로 자극이 오는 허연의 시도 읽고, 유희경이라는 낯선 시인의 시집도 읽는다. 몸부림이 시작됐다. 이 시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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