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올드걸의시집]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집, 문학과지성사

 

 

가을맞이 영어세미나를 시작했다. 푸코의 마지막 저서가 된 <진실의 용기>다. 강연록이라 구문이 어렵진 않다. 단어가 생소하지. 그 말에 속아서 용기를 내보았다. 세 번 세미나를 참여한 소감은 괴롭다는 것. 부끄럽다는 것. 어렵다는 것. 단어 찾느라 몇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한줄한줄 내 분량을 발표하면서 버벅거릴 때는 시간이 더디 흐르고 고개가 자꾸 수그러진다. 누구와도 눈 마주치고 싶지 않다. 오죽하면 정수샘이 그런다. 평소 나답지 않게 왜 이렇게 바짝 얼었느냐고. 안 얼게 생겼느냐고 했다. 영어를 자그만치 23년 만에 들춰보는 마당인데. 몹시 기분이 얄궂다. 생각해보니 내가 뭘 못하는 사람으로 어떤 자리에 놓인 게 참 오랜만이었다. 

 

니체 공부할 때도 막막하긴 했지만 모국어라서 두렵진 않았다. 제도교육도 그럭저럭 통과했고 회사생활도 하나하나 배워갔고 가사노동도 얼렁뚱땅 처리했다. 탁월한 요소도 없었지만 취약한 부분도 없이 살았다. 어른이 되면, 자신에게 불리한 입지는 선택적으로 피할 수 있다. 근데 난 지금 무리수를 두었다. 자발적으로 영어천민의 자리를 점했고, 견딘다. "인식에 이르는 길에 그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스스로 주입하면서 마음 다잡는다. 인식의 매력. 푸코가 던지는 사유의 말들이 아련하지만 복음처럼 다가온다. 첫 시간엔 그런 상상을 했다. 현재 상태 매우 엉망이나 한 십년 원서 붙들고 헤매고 배우면 나중에는 번역도 해보고 싶다고. 어떤 구체성도 없는 무근거한 바람이다.

 

나는 행하는 자로 산다. 금단의 땅에서 열매 구하겠다고 내동 서성인다. 이건 자기계발 담론이 부추기는 열정은 아니고 억척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불가피하다고 여길 뿐. 일부러 거러는 건 아니고 그렇게 살게 된다. 왜 그럴까. 나도 내가 궁금하여 생각해 보았다. 재작년인가. 사주명리학을 공부한 친구가 점을 봐줬다. 내가 자수성가형 인물이라고. (만세력으로 점 칠 때도 꼭 나왔던 점괘다. 부모덕이 없는 팔자라고) 그래서 공부를 해가면서 살아야한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인간은 단독자로 살 수 없다는 건 알겠다. 사람의 후원이 없으면 책의 지원으로 살아야한다는 건가. 셀프돌봄 하라는 뜻으로 접수했다. 그런데 말이 쉽지. 물적 토대가 갖춰진 중산층 지식인 여성처럼 책만 파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싱크대와 노트북과 밥벌이와 두아이를 오가며 틈틈이 공부하는 일은 진척도 느리고 몸뚱이도 축난다. 살기 위한 본능이 아니라면, 이 고난의 길을 왜 굳이 누가 택할까. 그런데 시련중독이 되었는지 어쩌자고 책상 앞에서가 가장 좋다.  

 

최승자는 이십대에 벼락같은 시를 써놓고 홀연 사라졌다. 행하지 않는 자로 살았다. "나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무위를 위하던 바틀비처럼 그랬다. 초월적 세계를 탐문하다가 죽기 직전까지 말라갔다. 재작년에 나온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시세미나에서 읽었다. '쉬임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시도 담배도 맛이 없다/ 세월이 하 짧아/ 시 한 편, 담배 한 대에 한 인생이 흘러간다'(<잠시 빛났던>) 정신병동에서 쓴 시들도 몇 편 있다. 시시한 삶에 발 딛은 나처럼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책상 앞에서>)고 고백한다.  한장 두장 넘기다보면 더듬더듬 흘러가는 시간들에 젖어든다. 그곳은 다른 세계다. 청송교도소처럼, 쉽게 볼 수 없고 접근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다. 자본의 질서로 돌아가는 복닥거림에 벗어나거나 등지거나. 장애가 있어서든 의욕이 없어서든. 행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의 나라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삶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영어 원서를 파는 것보다 덜 사는 것은 아닐 터다. 자연을 찬미하고 사색에 잠기는 가을만이 아니라 개 같고 매독같은 가을이 있듯이. 이 세상에는 지구본처럼 돌려볼 수 없는 '한 세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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