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 교수 - 혁명가의 성폭력? 예쁜 개한테 물렸다!

[행복한인터뷰]

 

 

 

몸은 세계를 떠안는다. 현경의 몸은 우주를 업은 듯 가볍게 춤춘다. 이유가 있다. 약한 것들의 ‘신’을 연구하는 신학자로, 참된 존재의 ‘길’을 묻는 수행자로 100곳이 넘는 나라에 머무르고 거주했다. 마르크스주의자부터 인디언 추장까지 그야말로 인류를 만나고 다녔다. 마치 돌아가는 지구본처럼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표정이 이는 이유도 국경, 종교, 계급, 나이, 학문, 예술의 경계에 부딪히고 그것을 횡단하며 자유로이 살아온 까닭이리라.

현경은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 종신교수이자 불교법사이다. 일명, 기독인불자다. 신학을 퍼포먼스와 제의로 표현하는 ‘신학적 예술가’이자 여성·환경·평화를 접목시킨 ‘에코페미니스트’로 불리며 생명을 살리는 ‘살림이스트’를 자처한다. 화려한 사회적 명성의 반대편에 고독한 실존의 이름도 갖고 있다. 보수 기독교계에서 ‘마녀’ ‘혼합주의자’로 지탄받았고 대학 사회에서는 엄숙한 학문 질서를 교란시키는 ‘직녀’(찍힌 여자) 교수였다. 유학생 시절 니카라과 평화대회에 갔다가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난폭하든 고귀하든 이 모든 경험의 잔치를 치르면서 새로운 삶의 질서로 건너간 현경은, 세계를 무대로 내 안의 여신을 발견하는 “신(神)나는” 삶을 설파한다.

“어릴 때는 못생겼다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그런데 뉴욕, 히말라야, 니카라과에 가니까 저를 보고 예쁘다, 섹시하다고 하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아, 사람 팔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 장소 문제구나!”

‘와하하’ 웃음이 터진다. 이날의 무대는 SBS <지식나눔 콘서트- 아이러브[人]> 녹화장이다. 현경은 빨간 장미 꽃다발을 들고 나와 관객에게 뿌리고는 ‘스스로 행복한 여신이 되는 방법’을 주제로 2시간 남짓 열정적으로 강연했다. 강연 뒤 진행자가 방청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도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남자와 여자 중 무엇이 되고 싶은가. 며칠 뒤,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현경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나한테 물어봤으면 우주인으로 태어나고 싶다거나 남자·여자 성기가 다 달린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남자 하고 싶으면 남자 하고 여자 하고 싶으면 여자 하겠다고요. 그랬으면 편집에서 잘렸겠지만요. (웃음)”

발칙한 소녀이거나 초월한 현자 같은 말투다. 애초 금기의 언어, 위험한 발상이란 그에게 없다. 자기 경험에 대한 성찰과 자아에 대한 상상이 있을 뿐이다. 성폭력 피해 경험도 거리낌 없이 터놓는다. 2001년 펴내 이미 수만 부가 팔린 스테디셀러 <미래에서 온 편지>(열림원)에도 다 들어 있는 얘기라며 그는 덤덤히 기억을 불러왔다.

#니카라과 평화대회, 혁명을 보다

현경은 1975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 들어갔다. 얼마 뒤 계엄령이 내려졌고 학교에는 무기한 휴교가 선포됐다. 학교 주변에는 무장 군인이 배치됐다. 삼엄한 시절, 현경은 뚝방 빈민촌과 성매매 집결지에서 야학교사로, 청계피복노조에서 오락교사로 일했다. 신의 존재를, 삶의 온전성을 회의했다. 신이 계시다면 이런 가난과 비참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지들을 숨겨주었다가 미행과 도청, 모진 고문을 당했다. 어릴 때부터 써온 일기장을 몽땅 빼앗겼다. 박정희가 살해당한 뒤 전두환 정권이 무력으로 들어서고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시대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환멸과 공포와 상실이 가득했다. 삶이 극도로 위축된 현경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장원 교수의 소개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공장에 위장 취업하는 게 아니라 ‘제국주의 심장부’로 유학을 가는 일은 운동권에서 배반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교는 ‘지구시민’을 강조하는 열린 학교였다. 목회학 석사를 하는 동안 인도와 중남미 나라들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니카라과에서는 산디니스타 혁명군이 소모사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혁명의 성공을 전세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국제평화대회가 열렸다. 현경은 교수·학생 몇 명과 함께 참가했다. 혁명 각료의 절반이 가톨릭 신부였다. 한국에서 처참한 패배만 보았던 그는 해방신학이 현실로 역사화된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에 감격과 환희로 들떴다. 그때 혁명 과정을 주도한 똑똑하고 잘생기고 카리스마 넘치는 혁명의 교사가 나타났다.

“요즘 말로 상남자예요. 투철한 역사의식, 날카로운 분석…, 스토리텔링은 압도적이었어요. 니카라과에서 있었던 일을 강의로 들으면서 눈물, 콧물을 흘렸죠. 한국인들은 스승에게 깍듯하잖아요. 자연스럽게 선생님에게 음료수까지 갖다드리며 챙겼는데, 그러는 사람이 한국 학생인 나밖에 없었어요. 그는 남미 사람이니까 내 행동을 호감의 표시로 이해했을 수도 있어요.”

그 혁명가도 낯선 나라에서 온 학생운동 출신의 현경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의 반독재 투쟁, 반미 투쟁에 대해 틈만 나면 물었다. 서로 한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들으며 완벽한 교감이 오갔다. 그 혁명가는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보이며 자기의 아내와 딸들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아내가 혁명에 대해 쓴 여성 관련 자료를 줄 테니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고마운 마음을 안고 약속 시간에 방으로 갔다. 혁명가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현경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지금 소리를 지르면 옆방에 있는 미국·유럽 사람들이 달려와서 이 사건을 알게 되겠지. 니카라과 혁명은 가짜 혁명이라고 비웃을 거야. 어린 학생을 성폭행한 혁명가의 혁명이 무슨 혁명이냐고. 그러니까 이 남자가 아니라 미 제국주의를 타도한 니카라과 혁명을 보호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면 안 돼.’

현경이 따졌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네가 너무 섹시하니까.” 내 방에 들어온 것은 너도 의도가 있었던 거다, 만약 몰랐다면 남녀 간의 언어를 모르는 거다, 혁명을 하겠다는 여자가 뭘 그렇게 성을 중시하느냐, 서로 이렇게 통하는데 왜 섹스를 안 하느냐며 외려 당당했다.

“지금 같으면 당장 기자회견을 했을 테지만 그때는 자책이 심했죠. 춤추자고 했을 때 괜히 추었나? 내가 꼬리를 쳤나? 너무 파인 옷을 입었나? 선생님을 너무 존경했나? 남편한테도 학교에도 어디에도 말을 못했어요. 네가 꼬리를 쳐서 그랬지, 외국에서 어떻게 행동했느냐. 이럴 때 항상 여자를 추궁하잖아요. 그 모든 게 이유가 되죠.”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뒤, 현경은 니카라과에서 온 여성학자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니카라과 혁명정부의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의 딸이 자기 아버지가 11살 때부터 10년간 성폭력을 했다고 양심선언을 하고 아버지를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경은 자신의 피해와 그 딸의 피해, 니카라과 혁명정부의 몰락 사이에 필연성이 있다고 해석한다. 아무리 미국의 공세가 집요했다고 해도, 일상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반복되는 혁명의 말로는 자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 보스턴 여성신학센터, 몸을 씻다

“품종 좋고 예쁜 개한테 물렸다. 너무 예뻐서 쓰다듬었더니 물었다.” 지금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러나 스물다섯의 현경은 피해 경험을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와 정서적 힘이 없었다. 다른 괴로움까지 더해졌다. 미국 이민사회의 한인교회는 한국 교회보다 더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다. 어릴 때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의 경동교회에서 자란 현경으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학생운동의 선배이자 동지였던 남편은 한국의 변혁운동에 큰 회의를 느끼고 점점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깊은 우울감에 빠져서 1년간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예일대학의 레티 러셀 교수가 클레어몬트대학에 ‘파트너십과 페미니스트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왔다. 강의를 들으면서 가슴에 꽉 막혀 있던 것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교수에게 남성 중심의 기독교에서 느끼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분노’를 터놓았고 보스턴에 있는 여성신학센터(Women’s Theological Center)를 소개받았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페미니스트 실험학교다.

그곳은 커리큘럼을 교수와 학생이 같이 짠다. 일주일에 16시간을 감옥이나 난민수용소, 여성들을 위한 정신병원, 성폭력 피해여성이나 매 맞는 여성을 위한 쉼터에서 일하고 그 경험으로 여성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왜 여자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치유는 무엇이고 성령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런 공부를 마치고 예술가들과 여성들을 위한 제례를 만든다.

미국의 어느 섬에서 한 여성이 밤에 산책하다가 괴한에게 흉기로 위협받으며 성폭력을 당했다. 그 뒤 삶이 망가졌다. 밤길을 다니지 못하고 남자와 섹스도,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자기가 더럽혀졌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사이코테라피로도 고해성사로도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여성을 위해 제례를 준비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어느 밤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공원에 다 같이 가서는 그 친구를 폭포에 세웠다. 몸을 정성스레 씻어주었다. 죄의식, 수치심, 모멸감을 다 물에 떠내려 보냈다. 그러고는 여성들이 둥글게 손잡고 보름달 아래서 강강술래를 했다. 여신의 축제였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죠. 거기서도 나는 내 경험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를 치유하면서 저도 치유가 됐어요.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성폭력을 당한 여자들이 얼마나 벗어나기 어려운지 알게 되었지요.”

여성신학센터에는 미국 최고의 여성신학계 거장들이 와서 쌍방향 수업을 진행했다. 아는 것의 힘, 인식의 기쁨은 날로 컸다. 현경은 ‘데이트 성폭력’ ‘부부 성폭력’이란 개념을 처음 배웠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고 10년을 사귀었어도, 같이 호텔방에 갔어도, 옷을 벗었어도, 여자가 싫은데 하는 건 성폭력이라는 거였다. 이전에 없던 개념이었다. 이론이 없으면 세상을 읽을 눈이 없다. 페미니즘 이론은 세상을 새롭게 읽게 하는 눈이었다.

현경은 여성이 성폭력으로부터 치유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꼽았다. 첫째, 이론. 해석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둘째, 자매.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전문가. 성폭력만 전담하는 상담가들과 대화하는 게 참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영성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일까, 큰 그림을 그려보는 거죠. 이게 꼭 나쁜 의미만 있나. 나는 성폭력을 경험한 뒤 성에 대해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걸 당할까, 즉 다른 여성들 마음을 이해하게 됐어요. 또 하나는 우울증의 바닥을 치고 올라오면서 내가 훨씬 더 강해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어요. 나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 항상 나쁜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현경은 여성신학센터에서 “세포 하나하나까지 페미니스트로 바뀐 것 같은” 경험을 거쳐 여성신학자로서의 삶을 결심한다. ‘아시아의 여성해방신학’이라는 연구계획안을 세웠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10여 년간의 파란만장 유학생활을 마쳤다. 그 긴 시간, 현경이 서양신학을 공부하며 마주한 것은 남성적 백인신학의 끝이었다. 신학마저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 제국주의, 남성우월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기존 신학에 인종적·문화적·종교적 다양성을 선사해 신학의 지평을 확장하겠다는 뜻을 품고 1989년 5월, 모교인 이화여대 조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세계교회협의회, 초혼제를 벌이다

난폭하든 고귀하든 모든 경험의 잔치를 치르며 새로운 삶의 질서를 넘나든 현경의 이름 뒤에는 기독인불자, 신학적 예술가, 에코페미니스트, 살림이스트, 마녀, 혼합주의자, 직녀(찍힌 여자) 등 온갖 혼종적이고 때로는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아무려나 현경은 세계를 무대로 내 안의 여신을 발견하는 ‘신나는 삶’을 설파한다. 한겨레 박승화

 

현경은 젊고 독창적인 여성신학자로 주목받으며 국내외에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세계학술대회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실험적 강의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대에서 교수로 조용히 잘 지낼 수 있는데 그 사건이 벌어졌다”.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7차 세계대회 주제 강연자로 참석했다. 주제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옵서소!’ 여성, 아시아, 제3세계 민중의 입장에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내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1년간 발표를 준비했다.

큰 줄기를 잡았다. 첫째, 아시아 신학. 조상으로부터 받아온 전통 영성, 즉 불교·무속·도교를 버리지 않고 그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성숙한 기독교를 알려주겠다. 둘째, 페미니스트 신학. 여성의 몸을 비하하는 가난한 정신의 신학에 도전하겠다. 셋째, 민중 신학. 엘리트 교회 지도자가 만드는 신학이 아니라 매일매일 고통받는 제3세계 민중의 입장에서 신학을 써보겠다.

내용은 형식을 창조했다. 먼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땅을 축복하는 제례로 강연을 시작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남녀들의 한 많은 영을 불러 해원하는 초혼제를 지냈다. 한국 젊은이 20명이 풍물을 쳤다. 그동안 연구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신학 이해를 이야기식으로 풀어서 강연하고, 마지막으로 살풀이를 하며 큰 광목을 몸으로 찢고 나아갔다. 중간에 한국 여성을 만나서 포옹하고 성령의 해방적 힘을 보여주는 춤을 추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정적인 하나가 남았다. 서양에서 성령은 서양 남자들의 모습으로 표상된다. 현경은 중국 관세음보살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자궁으로부터 느끼는 성령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나는 식민지 신학은 하지 않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해서 기독교를 세웠는데, 그건 정통이고 토속과 불교에 세운 신학은 이단인가. 기독교 제국주의지. 너희가 2천 년 동안 여자한테 잠잠하라고 했지만 너희는 앞으로 200년 동안 잠잠하고 우리 말 좀 들어라. 그랬더니 교회가 발칵 뒤집혔죠.”

기독교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강연으로 거론되는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슈피겔> <르몽드> 등 세계 유수 언론에 기사로 실렸다. 한국 언론도 떠들썩했다. 보수 교단에서 나온 신문은 ‘마녀, 혼합주의자, 이단’ 등 갖은 저주와 비판을 쏟아냈다. 아무려나 신학자 현경은 날개를 달았다.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강연과 세미나를 다녔다. 이화여대 총장실에는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어떤 근본주의자는 ‘무당의 딸은 무당에게로, 교회는 교회에게’라고 쓰인 전단지를 교회마다 돌리며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무당을 잡아 죽이랬다고 부추겼다. 현경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학교에 휴직계를 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초빙교수로 가서 1년간 ‘종교와 여성’ 분야를 가르쳤다. 그리고 1996년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은 160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종신교수로 현경을 초청했다.

#유니온 신학대학, 법사가 되고 신학을 하다

사람 팔자 장소 문제라고는 하나, 다른 장소에 삶을 들여놓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팔자를 바꾸는 건 운명을 바꾸는 일.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2년여를 보냈다. 심신이 깨어나는 만큼 지쳐갔다. 30대에 잇따라 일어난 존재 변신에 현기증을 느꼈다. 커다란 쉼표가 필요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땅, 히말라야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21세기는 히말라야에서 맞으리라는 막연한 계획으로 안식년을 받아놓고 이전 1년간 독일, 프랑스, 우간다, 쿠바, 스위스 등의 세계 여성들과 열심히 교류했다.

1998년 짐바브웨에 세계 각국에서 온 3천 명이 넘는 여성들이 모였다. 여성 10여 명이 앞으로 나와 자신들이 교회에서 겪은 갖은 폭력에 대해 고백했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받아왔던 억압과 폭력은 인종, 계급, 신앙 노선과 관계없이 어디에나 존재했다. 캐나다에서 온 여성은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당했던 친족성폭력에 대해 고백했다. 현경은 치유예배를 이끌었다.

“여성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1천 번도 더 살해된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주는 폭언으로, 폭력으로, 그리고 미워하는 눈빛과 보디랭귀지로 우리의 영혼과 감성과 지성은 살해된다.” 예배를 통해 아픔과 부서짐을 치유와 변혁의 힘으로 바꾸는 과정을 진행했다. 마지막에 여성들이 같이 신나게 춤을 추면서 서로의 상처를 만지며 축복해주었다.

현경은 ‘많은 여자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아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긴장, ‘나를 비우고 싶다’는 열망을 안고 히말라야로 향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한 수도원에서 날마다 명상하고 손가락이 얼얼하도록 글을 썼다. 이후에도 불교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놓지 않았다. 뉴욕의 숭산 스님을 만나고는 가르침에 매료돼 1년간 머리 깎고 안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2008년에는 대선사 전통의 미국 관음선원에서 불교법사 자격을 받았다.

“학생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예수님과 결혼하고, 부처님과 잠자시나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죠. 나는 숨어서 하지 않는다. 셋이서 같이 산다. 하하. 그건 농담이지만, 나는 불자 기독교인이에요. 21세기 코드라고 생각해요. 유대인불교. 힌두크리스천. 이슬람신비주의 같은 종교의 이중 국적자가 많아요. 틱낫한 스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불교도와 기독교인이 결혼해서 아이를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키우라고 권하죠. 불교라는 뿌리와 기독교라는 뿌리가 합쳐져 더 큰 나무가 되면 더 큰 그늘과 더 큰 열매가 열려요. 두 종교가 접목해서 더 큰 지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철학자 니체는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사상에 정통했다. 그랬기에 삶에 복무하지 않고 삶을 억압하는 기독교(목사)의 타락을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맥락에서 쓴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불교에 대한 호감을 슬쩍 표현한다. ‘불교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면서 고통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현경도 기독교 논리에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도덕감정의 사슬과 고통의 고리를 불교를 통해 끊어버리고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기독교와 불교를 아우르며 좀더 너른 가슴을 가진 신학자로서 자아의 윤곽을 그려간다. 그렇게 힘을 키워 남북여성 평화통일 모임 ‘조각보’ 공동대표를 맡고 ‘종교 간 세계평화위원회’ 자문위원을 맡는 등 더 많은 타인의 고통-해방에 관여한다.

최근 현경이 연구하는 학문적 주제는 신비주의와 사회혁명이다. 역사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사회변혁 운동으로 연결된 사례 등을 통해 어떻게 해서 내면의 변화가 사회질서 시스템의 변화로 연결됐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지금 여기, 여성학과 남성학이 대화해야

마지막으로 현경에게 물었다. 과연 전세계에 구조화된 젠더폭력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현경은 여성운동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경우도 여성운동의 노력이 없었으면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의식의 변화, 수치의 대상에서 치유의 대상으로 재정의하는 것 등을 통해서 열린 지평이다.

“성폭력 문제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해야지 치유가 돼요. 남자들도 여자와 함께 싸워야 해요. 그래야 자기들도 잡놈이 되지 않아요. 남자도 성폭력 피해자가 됩니다. 남자가 남자를 폭행하는 경우도 있고 어린 남자가 권력 있는 여자에게 당하기도 하죠. 성이 인간의 너무 내밀한 문제라 큰 상처를 받으면 남녀 누구라도 벗어나기 어려워요. 성폭력은 여성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죠.”

‘모든 학문은 남성학이다’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든 학문은 남성학이 아니라 가부장적 학문이라며 현경은 ‘남성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모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가.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여성학을 하듯이 남성도 남성학을 해야 하고, 남성학을 통해 여성학과 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삶의 실험가는 언제나 삶의 유혹자로 나타난다는 니체의 말대로, 현경의 말은 유혹한다. 모든 경계에 걸터앉아 끊임없이 다름을 잇고 화두를 던진다. 새로운 생성을 재촉한다. 내 안의 여신을 깨우라고 말을 건넨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진리도, 가위눌리게 하는 선도 아니고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스무 살 쪽방촌에서 신에게 던진 최초의 물음, “신이란 무엇인가” 아니 “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화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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