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운동 활동가 송수헌

[행복한인터뷰]

'변절했다', '돌았다' 손가락질 받던 시절을 보내고
정신장애 당사자 운동에 매진하는 송수헌 한아름방송국 국장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고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


-이상 ‘오감도 제3호’

 

 

그는 ‘국장님’으로 통한다. TV 드라마에 나올 법한 국장 캐릭터 그대로 호방한 풍채에 매끄러운 중저음 목소리를 가진 중년 남성이다. 그의 일터는 한아름방송국.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제작과 운영에 참여하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다. 그는 2011년 창립부터 참여한 원년 멤버로 진행자나 제작자로 나서며 ‘보라돌이’라는 닉네임을 썼다. 정신장애인을 ‘미친놈’으로 간단히 낮잡아 부르는 세상이니 만큼 본래 이름 공개를 주저했다.


3년여 방송 생활,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올해부터는 본명인 ‘송수헌’으로 활동한다. 얼굴이 나오는 ‘보이는 라디오’ 방송을 계획 중이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자신을 세우기도 한다. 인권과 복지 사각지대에 방치된 정신장애인의 처지를 알리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1인 시위 현장에 나선다. 지난 9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5년 뒤 10년 뒤엔 뭐 할 거냐? 나의 지인이 며칠 전 물었다… 난 소시민의 꿈을 안고 시위현장에서 도망쳤다가 그 자책감에 수십 년을 끔찍하게 살아왔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것도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배고플 것도 없다! 매주 목요일 1인 시위 내 차례임에도 당사자들 신청이 밀려서 오늘과 다음 주 쉬란다. 그래, 이 맛이지. 변화. 그리고 두려움 없는 사랑!’

 

▲한아름방송국에서 팟캐스트 녹음 중인 송수헌 씨.

 

# 김귀정의 죽음, 조울증


조울증 병력 24년 송수헌. 최초 발병은 고 김귀정의 죽음과 닿아 있다. 성균관대 불문과 학생이던 김귀정은 1991년 5월 25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숨졌다. 그에게는 같은 학교 같은 조직에서 활동하던 미더운 동기의 죽음이었다. 열흘 뒤 고 김귀정의 시신을 요구하는 정부 측에 맞서 그는 서울 중구 백병원 부근에서 수 겹의 백골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시위에 나온 일행은 지쳐서 구호도 잦아들었고 백골단이 뱉어대는 가래침 같은 쌍욕만 코앞에서 어지럽게 웅웅거렸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때부터 혼란이 들어왔어요.”


송수헌이 기억하는 통증은 ‘혼란’이다. 88년 대학에 들어간 이후 온갖 시위, 점거 농성, 삭발, 단식을 감행하며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그다. 행동은 선두에 있었으나 마음은 늘 조금 비켜서 있었다. 중1 때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고생고생하며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가 발목을 잡았다. 운동권이 되어 감옥을 들락거리는 불안정한 삶을 살 것인가, 어머니를 봉양하는 안정적인 삶을 택할 것인가, 고심 끝에 총학생회장 출마를 포기하는 것으로 학생운동을 정리했으나 “한 학기만 더 싸워 달라”는 조직의 요청에 시한부 투쟁에 나섰는데, 동료가 죽었고 다시 선봉에 설 수밖에 없었다. 몸에서 회오리치는 ‘혼란’, 즉 싸움하는 나와 싸움하지 아니하는 나의 오랜 뒤척임은 그를 결국 주저앉혔다. 


“여기서 잡히면 100% 구속인데 별의 별 생각이 다 났어요. 어차피 이럴 거면 총학회장 선거에 나갈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결국 쇠파이프를 스르르 한쪽에 내려놓고 골목으로 도망쳐 나왔죠.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나 싶어 몸을 돌렸더니 백골단이 ‘이 새끼 장난하나’ 쌍욕을 하고.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그길로 나도 모르게 학교에 갔어요. 휴일 텅 빈 교정을 왜 갔을까. 아마 ‘마지막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거 같아요. 그때가 1991년 6월 6일이에요.”
 

송수헌은 그길로 집에 가서 6개월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누구보다 왕성하고 활달하게 많은 일을 해내던 그의 칩거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친구와 선후배가 찾아오면 ‘그때 이랬지’ ‘그때 좋았지’라며 오로지 과거만 반복했다. 현재와 미래가 없는 사람이 된 그를 보며 누군가 그건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이라고 했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정신과 치료를 마음먹고 일부러 집과 반대편 방향으로 전철을 탔다. 길거리 병원 간판을 보고 공중전화를 걸어서 상담 좀 받고 싶다고 했더니 간호사가 “30분에 3만원입니다”라며 툭 끊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1만원뿐, 치료 기회를 놓쳤다.


‘나는 죽을 것’이라며 날마다 몸부림치면서도, 새벽기도를 다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는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을 보냈다. 보다 못한 친구가 일자리를 알아봐주었다. 신문사 광고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몸이 가벼워졌고 남다른 실적을 올리자 자신감이 차올랐다. “경조증 상태였던 거 같다.” 특유의 조직력과 추진력으로 맡은 일을 척척 해낸 그는 하는 일마다 많은 돈을 벌고 그 많은 돈을 썼고 그 사이 군복무를 마치고 11학기 만에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송수헌이 ‘변절했다’, ‘돌았다’로 소문이 나면서 연락들이 끊기더라고요. 영어학습지에 과외를 접목시키면서 많은 소득을 올렸거든요. 그 돈으로 친구들 만나면 비싼 술을 사고 그랬죠. 그런데 돈을 아무리 벌어도 채워지지 않는 게 항상 있었어요. 자꾸 외로워지니까 순간이라도 잊으려고 술을 찾았던 거 같아요.”

 

▲지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송수헌 씨.

 

# 강제입원, 병에 대한 자기인식  


조울증은 감정 조절에 문제가 생기는 병으로 양극성정동장애라고도 한다. 술과는 상극이다. 그 역시 술을 마시면 목소리가 커지고 감정이 과잉되는 흥분 상태에 빠졌다. 술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부대끼다가 “기독교에 꽂혔다.” 성경책 삼독하고, 그래도 유물론자가 유신론자가 될 수는 없어서 관련 서적 100여 권을 탐독했다는 그. 교회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어느 날 부부싸움을 하다가 이혼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일이 커지자 양가 가족이 모여 들었다.  


“그 자리에 경찰관인 사촌형이 나타나 결정타를 날렸죠. ‘나랑 같이 일하는 동료가 조울증인데 그동안 작은엄마(송수헌의 모) 얘기를 들어보니 수헌이 술쳐먹고 하는 짓이 조울증이다’. 잠시 후 응급이송단이 출동했어요.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다짜고짜 손발을 똘똘 말고 번쩍 들어서 침대에 몸을 묶더라고요.”


서울 청량리 정신병원에 첫 입원을 했다. 의사와의 인터뷰는 아내만 허용됐고 당사자에게는 발언 기회조차 없었다. 보호사 2명이 와서 양쪽에서 팔짱 끼고 철문 열고 올라갔다. 병실에 딱 들어가니까 간호사가 ‘어이구 어떻게 왔어요’라며 유치원생 취급했다. ‘그렇게 딱해 보여요. 제가? 저는 이 시간에도 잠 못 자는 간호사님이 딱하네요.’ 그랬더니 몸을 묶고 코끼리 주사를 놓았다. 눈 떠보니까 다음 날 낮이었다. 한 달 반 만에 병원을 나왔다. 


그후 지금까지 네 차례 강제 입퇴원을 반복했다. 한 번의 자의입원을 제외하고 세 번은 어머니의 신고에 의해서 병원에 끌려갔다. 왜 어머니가 아들을 병원에 넣는 걸까. 


“술에 절어 사는 아들이 못마땅하니까 어머니가 잔소리하고, 그러면 저는 내가 한두 살이냐고 대들고, 내 목소리가 커지면 어머니는 조용히 나가서 신고 전화를 했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공포에 휩싸였을 것이다. 알코올 의존성이 높은 남성이 있는 집안에서 여성들이 흔히 겪는 고통이다. 어머니에게 당신과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지는 병원 말고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입원 치료 결정은 의사의 전권이다. 한번은 병원에 강제로 끌려갔지만 당직 의사가 돌려보내주기도 했다. 이 사람은 입원 시킬 근거가 없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입원의 가장 큰 단점은 내 생활이 뚝 끊기고 완전 날아가는 거예요. 정말 비참해요. 사람을 똘똘 감고 상소리 하고. 한번은 입원 과정에서 몸에 상처를 입어서 고소했어요. 엄청 두들겨 맞고 며칠 지나도 분이 안 풀리는 거야.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어서 경찰서에 고소했죠.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보내졌고 몇 달 후 검사가 연락이 왔어요. 검사가 나보다 한참 젊은 사람이었는데 서류를 보더니 ‘이 새끼 또라이네. 병원 왔다갔다 했네’ 하더라고요. 응급이송단 사람들이 나 팬 거 하고, 내가 병원 들락거린 게 무슨 상관이야. 진단서랑 사진이랑 증거자료 다 첨부됐는데도 소용없었어요.”


아픈 사람은 즉 아프지 아니하는 사람이고 아프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다는 것. 이 실존의 역동을 세상은 헤아리지 않았다. 한 사람을 사물처럼 고정된 존재로, 원래부터 “또라이”며 앞으로도 “뻔한 놈”으로 규정한다. 그럴수록 송수헌은 자신의 질환을 부정했다. 병원에서는 환자였지만 훨씬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직장인으로 지냈다. 수입화장품 회사에서 착실히 월급 받고 일상을 영위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병을 자신의 삶으로 인정하게 된 건 2003년이다. 각 병동에서 조울증 환자 50~60명을 모아놓고 의사가 정신장애에 대해 강의를 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의학적 사실들,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주입된 레퍼토리지였만 새삼 “그 말들이 가슴에 꽂혔다.” 


병식(병에 대한 자기인식)이 생기자 술도 절제하고 약도 잘 먹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영업일을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술을 더 먹는다고 판단했다. 육체노동으로 진로를 바꾸자! 퇴원 후 구멍가게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다. 개척교회 다니면서 배송업무를 몇 년 하고 월급도 올라가고 7~8년을 한 번도 입원을 안 하고 잘 살았다. 조울증 약은 계속 먹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 약이 보약인 줄 안다.” 


# 정신장애인 팟캐스트, 당사자 운동


‘사람의 마음에는 늘 추진력이 되면서 동시에 문제가 되는 힘이 있다’고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의 저자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은 말했다. 병을 안고 살아가는 그에게 병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송파정신보건센터 사회복지사가 그에게 정신장애인들과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해보자고 제안한 것. 이런저런 팟캐스트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2014년 한국정신장애연대가 연 '광기발랄' 콘서트. 당시 송수헌 국장(사진 가장 오른쪽)을 비롯한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은 정신장애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들어 팟캐스트로 전달했다.

 

“모처럼 열정이 살아났다.” 그는 평일에 쉴 수 있는 마트로 직장을 옮겨가며 매주 정해진 요일에 미디어 교육을 받았다. 방송 대본 쓰기, 방송 기법, 장비 운영법 등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2011년 11월 23일 한아름방송국이 문을 열었고 시사 토크, 고민 상담, 음악 감상 등 프로그램을 짜서 한창 재미있게 방송을 하는데 예산이 삭감돼 방송국이 문 닫을 위기가 왔다. 그가 방송국장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월급이 25만원. 가족들과 상의했더니 뜻밖에 ‘의미 있는 일을 하라’며 지지해주었다.
 

자신을 아는 일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마이크 앞에 앉아서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점차 자신(의 병)을 알아갔다. 자신의 언어로 존재하기를 시도했다. 2013년 4월, 그 해 봄엔 다른 세상이 열렸다. 담당 사회복지사를 따라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 논의 및 정책 제안을 위한 정정당당(‘정’신장애인의 ‘정’당한 권리 ‘당’사자가 ‘당’당하게 말하다) 공청회에 참여한 것. 


“그전에도 정신장애운동, 인권이라는 키워드를 인터넷으로 많이 쳐봤거든요.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어요. 신체장애인은 많은데 정신장애인들은 왜 인권단체가 없을까. 응급이송단 같은 것들 바뀌어야 할 게 많은데 이런 생각을 항상 했죠. 그런데 거기서 정신장애 인권단체를 소개 받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 알았죠. 정신장애 운동은 이미 시작되었구나. 내가 생각한 대로 정신장애에 대해 할 일은 정말 많구나.”


송수헌이 말하는 당사자 운동의 핵심은 이렇다. 최소한의 약 처방, 상담치료 병행,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인식 개선, 삶의 질 향상 같은 것들. 특히 약 처방에 대해선 할말이 많다.


“제가 강제입원 당하기 전까지 병원 신세 안 졌던 건강한 사람이었어요. 증세라고 하면 술을 많이 마시고 과도한 자신감이 생기고 씀씀이가 커지는 정도. 소위 조증이죠. 근데 약물이 투입된 순간부터 조증이 오면 감당이 안 돼요. 조현증(정신분열증)에서 보이는 관계 망상, 피해 망상, 과대 망상이 찾아와요. 어느 때는 뜨든 가라앉든 그러는 내가 보여요. 그러면 술을 아예 안 먹고 잠을 오래 자요. 나 스스로 조절을 하죠. 너무 끔찍하니까. 약이라는 게 안 나오는 호르몬을 쥐어짜고 나오는 호르몬은 막는 거잖아요. 약물이 무서워요. 그런데 정부는 우리 말을 듣지 않죠. 입원 중심, 약물 중심 치료가 이뤄지는데 그걸 깨고 싶어요.”


그는 대안을 꺼낸다. 정부 부담금이 입원치료시 100원이면 외래치료는 20원이면 된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입원치료인가. 80원이 누구의 이익으로 귀속되는가. 퇴원을 시켜서 주거 안정과 직업훈련으로 사회 복귀 시키면 초기비용은 들겠지만 80원으로 충당하면 된다. 이걸 당사자의 힘으로 따 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9월 송수헌 씨가 광화문에서 정신장애인 복지지원법 제정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하는 모습.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싸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변했다. 본인이 정신장애인으로 살면서도 “내가 나약해 빠져가지고 이런 병에 걸렸어”라며 자학했다. 그런데 당사자 운동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의 발병 사례를 접하며 누구든 터질 수 있지 특별난 사람만 걸리는 병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드라마나 예능프로는 비하하고 뉴스나 시사프로는 모함하면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킨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즉 정신장애인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임을 알리기 위해, 그는 방송 모니터링도 하고 1인 시위도 하고 지인들에게도 드러낸다. “나 조울증이야.” 간신히 입을 떼었을 때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는데 네가 직접 말해줘서 고마워’라고 반응해주는 사람이 가장 고마웠다.  


2003년 병식이 생겼을 때 장애 등록을 했다. 당사자 운동에 의욕이 넘치다가도 경제적 문제에 부딪치면 한숨이 난다. 다 그만두고 직장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몇 번 하다가도 그 생각을 더 밀고 나가면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돈 쓰고 나면 남는 게 뭐 있지, 그 뒤에는 또 뭐지?” 하는 물음에 이른다. 어서 빨리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이 통과돼서 지자체 복지지원센터 당사자 활동가에게 급여가 나오기를 바란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도망쳤다가 이 병에 걸렸는데, 안정된 삶을 누리려다가 도망친 건데, 지금은 오히려 정신장애 활동을 하면서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다시 내 삶의 의미를 찾았다 싶어요.”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한 사람, 그러나 지금은 도피하지 않고 분투하고 있는 그 사람, 송수헌은 인터뷰 며칠 후 빠뜨린 말이 있다며 이런 전갈을 보내왔다. “나의 정신장애로 사회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돼서 행복하다고 꼭 써주세요.”


백 년 전, 자기 질병을 ‘감히’ 시적 대상으로 삼은 한 시인의 시는 아직도 낯설고 난해한 시로 이해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신장애라는 자기 질병을 ‘감히’ 사회운동으로 삼겠다는 한 사람의 말은 언제쯤 어떻게 세상에 가닿을 수 있을까. 

 

글쓴이 : 은유. 글 쓰는 사람.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등에서 글쓰기 수업을 연다. 성폭력·가정폭력피해여성, 마을공동체 구성원 등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기경험에 근거해 자기언어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글쓰기의 최전선』(2015), 『올드걸의 시집』(2012) 등을 펴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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