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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아름다운 적(敵) / 강정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 맨발

로 걷는 많은 꽃들을 피워야 한다 부풀어오르는 공기

를 뜯으면 뜯을수록 너는 더욱 선명한 나의 적이 된

다 유일한 대안, 유일한 결론, 유일한 삶이 된다 공

기처럼 나는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내가 아

름다운 적인 너에게 내 큰 입을 내민다 내 입이 닿았

기 때문에 너는 아름답다 네 입과 닿았기 때문에 추

해진 나를 너는 더욱 추하게 하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의 아름다운 음악이 네가 만든 추함마저 아름

답게 하라 나는 너를 모른다 알면 알수록 네가 추해

진다 너도 나를 몰라라 숱한 꽃들이 자기 이름마저

지울 만큼 부풀어 너를 보는 나의 추함을 지운다 너

의 아름다움에 칼을 쑤시는 내 아름다운 음악을 맨발

로 더듬는다 더듬으며 보이지 않는 한끝으로 나를 내

몬다 너와 부딪치니 내 아름다운 음악마저 추하다 죽

어라, 죽어라, 너를 벗어던진 나여, 한번도 제 소리

로는 빛나지 못하는, 입술을 닫은, 도저한 직유의 세

계여

 

 

- 강정 시집 <처형극장>, 문학과지성사

 

 

요즘 내가 하는 일이란 '헤드라인체'로 쓰인 공문서를 보고 상황과 내용을 파악해서 산문으로 풀어내는 일이다. 건조한 공무원의 언어를 부드럽고 박진감 넘치는 내러티브 기법으로 번역해야한다. 팩트에 기반하되 상상력이 발휘되어서는 안 되고 문학적인 요소는 가미되면 좋지만 사실관계는 명확해야 한다. 뭘 어떡해야 하지. 난감한 노릇이다. 그 전에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유사한 일을 했다. 퀵 서비스로 문서와 브로셔가 한 가득 들어있는 서류 봉투를 받아서, 읽고 또 읽고 내용을 파악하고 서사를 만들어서 원고지 50매 정도로 줄여서 쓰는 일이다. 이번 일은 그것과 좀 다르다. 일단 참조 자료가 훨씬 부실하다. 그러다보니 암호해독 수준이고 밀밭에서 칼국수 끓여내야 하는 격이다. 그 작업이 한 달 정도 반복되었고, 지난 주에는 뒷목부터 욱시근거렸다. 그나마 사무실 사람들이 뜻이 맞고 분위기가 단란해서 다행이긴 하다. '살다보니 별 일을 다하는구나.' '집필노동자, 직업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구나.' 푸념 끝에 자괴감이 엄습했다. 온종일 메마른 어휘들을 끼워맞추고 마른행주 짜듯이 글을 쥐어 짜면서 시간을 보내는 내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자아존중감 급하락. 스트레스 급상승. 그 속내에는 나는 더 고상한 글을 써야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작동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글쓰기 수업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 수업과, 시세미나 시즌5를 시작했다. 책을 더 꼼꼼히 읽고 강의 준비 더 하고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느낀 것을 글로 쓰고 싶었다. 요즘은 단편적인 글 쓸 기운마저 없다. 나 혼자라면 적게 벌어서 적게 쓰고 살 수 있을 텐데, 결혼하고 아이낳고 생활인 모드로 세팅이 되어버리고 물리적으로 나이까지 먹으니까 불가능해져 버렸다. 언제나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한다. 내가 이 얘기하면 주변에서 꼭 그런다.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글 쓰는 사람들의 사례. 카프카도 그랬다. 조앤 롤링도 아이 키우면서 글 썼다. 박완서는 마흔에 데뷔했다. 등등. 회사 다니는 사람한테 이건희되는 건 어렵지 않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글 쓰는 사람들에겐 상위 1%의 사례를 꼭 적용시킨다. 마흔 넘어 아이 둘 키우고 돈 벌면서 살림도 하고 글 쓰는 건 때때로 신체가 해체되는 일이다. 한없이 아름다운 나의 아이들이 때로 나를 흡혈하는 적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적. 아름다운 딸. 그 적으로 인해 나는 자주 구석으로 내 몰린다. 으깨진다. 이 아름다운 가학과 피학의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