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공부론> 읽고

[글쓰기의 최전선]

타자의 타자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면 이해의 실패는 본질적이다. 따라서 이해 가능성의결핍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의해 제기되는 묘사의 문제 중심에 있다. 타자를 타자로 유지하기 위해 그것은 지식이나 경험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지식은 언제나 나의 지식이고 경험은 언제나 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오직 그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한에서만 만나지며, 따라서 곧바로 그 대상의 타자성은 감소된다.

 

- 콜린 데이비스 <엠마누엘 레비나스-타자를 향한 욕망>

 

 

우리가 타인,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수시로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타인과 타자가 구별 없이 쓰이는데 어떻게 다를까요. 수업시간에 스치듯이 얘기했는데요.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보완하기 위해 일부 옮겨드립니다. 타인은 다른 사람. 실존의 개념이죠. 타자는 나 아닌 모든 것. 자연, 사물을 아우르는 관계의 개념입니다. 타자가 더 포괄적이고 무한적이죠. 타인은 지구 총 인구에서 나를 뺀 모든 사람으로 유한적이라면, 타자는 무한 증식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처음에 철학 책 몇 권 읽고 났더니 잣대만 강해져서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 되어버린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뭐는 어떻다 이건 저렇다 어설프게 가치평가를 하는 거죠. 가까운 사람의 일침이 결정적이었지요. “니체 읽더니 더 이상해졌다.”-.- 책을 읽을수록 인식과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야하는데 어쩐 일인가 싶어 부끄럽고, 또 놀랐지요. ‘내 안에 갇히는 지도 모르겠다, 나의 동일성을 강화하는 독서가 된다면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겠구나, 나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공부가 되도록 해야겠다. 무릇 공부가 흔들고 휘젓고 깨는 작업이 되도록 하자다짐을 했습니다.

 

물론 일상에 파묻혀 지내면 금방 까먹습니다. 그래도 가끔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나은 것 같아요. 다른 것, 타자는 처음부터 이해의 실패, 몰이해의 형식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소통이란 게 가능한 것인가. 한참 회의했을 때, ‘내가 변한 만큼이 소통이다라는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통은 내가 말한 것을 내가 듣는 형식이 아닌, 내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이것이 제가 이해한 타자성의 발견이고 소통이 가능하다면 그것입니다.

 

김영민의 <공부론>은 그런 제게 좋은 자극으로 가득한 책이었고요. 이번에 수업 교재로 쓰면서 다시 읽으니 새록새록 새로워요. 여러분의 엄청난 정동 - 누구는 눈물 흘리고, 누구는 울분 떠뜨리고, 누구는 상찬하고, 누구는 낙담하고. 다양한 반응을 목도하고 있자니 정말 괜찮은 책이었구나 싶어요. 한 가지 반응으로 수렴되었다면, 우리가 같이 모여서 공부하는 의미는 조금 퇴색되었겠지요. 앞으로도 더 자기 느낌을 말하고 육성을 드러내고, 그리고 더 귀 기울이고 그렇게 공부해요. 제가 모 시인 인터뷰했다고 (자랑)했죠? ^^ 그 분이 마흔을 이렇게 표현하시더군요. 청춘이 등 뒤에서 문을 닫는 나이. 종강이 등 뒤에서 문을 닫으려 합니다. 아쉬움에 자꾸 뒤돌아보게 돼요. 남은 두 시간도 서로의 인연에 최선을 다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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