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 / 황지우

[올드걸의시집]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면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어떤 방향을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열대어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마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 생을 '쇼부'칠 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그날 기분은 아침부터 흐림이었다. 이유는 그냥이다. 존재를 둘러싼 제반 조건이 그러하도록 총체적으로 응결된 상태, 그냥. 식탁에 쭈그리고 앉아서 노트북을 멍하니 바라본다. 한줄 한줄 받아쓰기 하는 아이처럼 신경을 모은 채, 내가 부르고 내가 받아 적으며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 지루함에서 나를 끄집어내듯 전화벨이 울렸다. 그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세미나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그 사이 아르바이트도 그만 두고 온전히 단편 하나를 써보려 한다고 했다. 조지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자처했던 것처럼 온갖 육체노동을 섭렵하는 그다. 그에게 노동르포 글쓰기를 준비하면서 몇 가지 자문을 구했었다. 노동체험이 글로 번역되는 어려움이나 쾌감 같은 요소들. 그 물음이 자극이 되었고 덕분에 글을 써볼 마음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에게는 작업계획 공표였지만 나에게는 단기이별 통보였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사람이 들고 나는 일에는 아직도 감정관리가 서툴다. 알았다, 좋겠다, 잘해라 얼버무리고는 전화기를 얼른 닫았다. 입술을 앙 다물면서 존재의 중심을 잡았다. 그 흔들림은 단지 늘 친숙하던 친구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오는 공허감이 아니었다.

 

밑도 끝도 없이 어떤 절박함이 바위처럼 눈앞에 드러났다. 어떤 욕망이 내면을 휘저었다. 정확히 대칭으로 그와 존재를 바꿔치기하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있는지 모를 만큼 부러움의 파도와 서러움의 파도가 번갈아 나를 덮쳐왔다. 그가 그렇게 했다. 혼자 한 달 간 모든 관계로부터 놓여나 오롯이 글만 쓸 수 있는 상황을, 그의 전화를 받기 전에는 나는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음을, 꿈조차 되지 못했음을 인지했고, 동시에 나의 존재조건을 자각했다. 왜 내 생은 그런 솔루션 자체가 불가능했을까. 30일의 자유와 고독이 봉쇄된 삶을 내가 살고 있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처럼 눈물이 삐죽 솟았다. 오밤중도 아니고 오전에 눈물이 나니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주변을 밤으로 만들었다. 어둠으로 도피해야 했다. 욕망에 비틀거리는 내 꼴을 보기 싫었다. 병원침대에 누운 것처럼 온몸이 긴장되었다. 김승욱의 <야행>의 여자를, 한 장면을, 떠올렸다.

 

가령, 그 여자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하고 싶어 하는 포로를 상상한다. 그는 철조망의 한 곳이 허술한 것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것을 발견하자 그는 자기가 이 수용소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탈출 욕망이 철조망의 빈틈을 보면서 발생한다는 것. 나의 경우라면 유유히 담을 넘어가는 그의 긴 다리를 보면서 나의 담장의 드높음을 인식하고는 이 수용소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나는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그런데 넘어보기도 전에 넘어지다 다친 것처럼 주저 앉아 울고 있다. 주체에 도사린 타자는 늘 이토록  낯설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나이기에. 다시 또 벨이 울렸다. 액정화면을 보니 그녀다. 망설이다가 받았다. 그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얄궂고 서럽고 삐지는 복합감정을 띄엄띄엄 조각내어 터놓았다. 거의 일러바치는 분위기였다. '나도 한달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글 쓰고 싶어...'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어찌하지 못하고 괜히 그를 탓했다. 내가 이러는 심정을 그는 모를 거라 했다. 남자는 여자를 모른다는 의미로 확장했다. 아는 게 더 이상하다. 나도 몰랐던 내 감정이거늘 그가 무슨 수로 알까. 자본에 의탁하지 않고 살고 싶은 대로 일상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능력자이다. 어떤 목표에 눈 돌리지 않으면서 존재에 칩거하는 그는, 죄인이 아니다.

 

한바탕 소낙비처럼 지나간 욕망의 난동, 우울의 파동. 슬픔의 상스러움을 초래한 나는, 칠판 지우듯 감정을 지우고 또 살았다. 살면 살아진다. 살려면,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내면의 풍파가 가라앉고 그도 돌아왔다. 늘 그랬듯이 흐린 미소만 지었다. 소설 잘 썼는지 묻고, 잘 안 써졌다고 답하고. 형식적인 말만 오갔다. 며칠 후 전화로 얘기했다. 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작업에 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 것도 아니고 취직한 것도 아니고. 현재도 없고 앞날도 없는 자기가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하다는 투의 넋두리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백만장자로 보이는 그가 자기는 거지라고 말하는 형국이었다.

 

다 가진 삶의 기준이 결혼, 직장, 아이인가. 그 나름도 실속 있는 삶이지만 단 하나 삶의 모델을 좇아 60억 인구가 한 방향으로 뛰어야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또 직장 다니면서 가정 꾸리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갑갑한 삶을 사는지, 그나마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리번거리지도 못하고 삶의 에너지를 다 써야한다는 팍팍한 현실을 상기시켰다. 일찍부터 타협하고 사는 노회한 젊음은 매력없으니, 진짜 소설을 쓰려거든 지금처럼 불안하게 살라고 말했다. 그도 알고 있을 원론적인 얘기를 건네고, 나도 알고 있는 원론적인 말들을 들었다. 수다는 공회전이 본질이다. 전화를 스르르 닫고는 남사스러워서 하지 못한 말은 문자로 띄웠다. 실은 그날 전화한 날, 나 눈물바람 했다고. 자기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삶이 누구에겐 부러워죽겠는 삶이기도 하다고. 쓸쓸한 고백, 아니 수줍은 자백. 황지우 말대로 삶을 한번 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다르게 살 것인가. 아파하고 아파하는 이를 알아보면서 이 아픔의 전승구조에 몸을 싣고 아마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같다. 그것밖에 힘이 없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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