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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김소월과 낭만주의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되는 삶은 요즘 나의 고민과 맞닿는 주제다. 사고가 얼키설키 꼬였을 때, 마음이 싱숭생숭 어지러울 때 왜 글을 쓰게 되는가. 그것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해서 미적인 배치를 이루고자 하는 본능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헝클어진 것은 아름답지 않으니까 그것을 머리 빗듯이 차분하게 식별 가능하게 정돈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무심결에 아름다우고자 하는 생의 본능이 글을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소월은 시를 썼다. 집없음, 길없음, 님없음의 불우한 상황을 몇 개의 단순한 시어로 골라내어 악보처럼 율동감 있게 구성했다. 소월시를 읽는데 익숙한 노랫말이 많아서 반가웠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진달래꽃>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못잊어>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개여울>. 세미나 때 시를 읊고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들었다. 소월의 시는 운율과 리듬이 그 자체로 내장되어 있어 노래로 만들어도 시적인 느낌이 훼손되지 않았고, 심지어 낭독만 해도 시가 노래처럼 착착 감기었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소월의 이 유명한 시는, 사랑하면 보이는 것들 혹은 사랑 그 이후에 오는 것들에 관한 시다. 예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안 보이던 게 보이는 일이 사랑의 작용이다. 평범하고 단순한 시어들로 구성된 짧은 시. 정성들여 한 글자 한 글자 발음하여 낭독하고 나니, 어느 새 입 안에 그리움이 고였다. 악보처럼 작곡된 그리움. 이것이 시다! 나는 말했고 그녀는 존 레논의 ‘oh my love’를 흥얼거렸다. 존 레논이 그의 아내인 오노요코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을 노래로 만든 곡으로, 이런 가사가 있다. “My eyes are wide open...”

 

 

 

소월과 낭만주의

예전에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말들로 10개의 카드를 만들고 하나씩 버리면서 최종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지 알아보는 게임 비슷한 걸 했었다. 둥글게 앉아 자기 순서가 돌아오면 하나씩 재빨리 버려야하는데 나는 마지막에 로맨티스트카드가 남았다. 내가 한 짓인데 당황스러웠다. 글쎄다. 내가 정의하는 낭만이 뭘까 생각해 보니 어떤 그리움’ ‘어떤 떠돎이다. 길찾가 님찾기다. 항시 길과 님을 그리워하는 소월 시가 그래서 와 닿았나보다. 유종호는 소월의 자신의 존재를 근거 짓는 동경의 총체적 집합이라고 했다. 낭만주의는 성숙의 거절을 고집하는 경향이라고도 했다. 님을 찾으면 자신의 존재이유가 사라지므로 님은 부재의 상태로만 현존하는 거다. 애매하고 희부옇던 낭만의 실체를 그것에 얽매인 나를 알게 해준 몇 개의 문장들을 정리해 보면,

 

- 임과 집과 길이 없는 것의 한을 되풀이 노래한 그의 시는 이러한 것의 결여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늘 손짓할 것이다.

 

- 시 전체를 휘감는 유랑과 행려의식, 집없음의 의식. 이러한 상실감을 궁극적으로 배태시킨 것은 바로 님 부재, 님 상실의 모티프이다. 최하림은 진달래꽃에 실린 시 127편 가운데 님에 관한 것이 68, 집에 관한 시가 13, 길에 관한 시가 19편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고 동시적인 경우가 더욱 크다.

 

- 님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용운의 님만큼이나 김소월의 님은 연구자들에 의해 논란이 됐다. 김소월의 님은 조국으로 확대된 님일 수도 있으나 자신의 존재를 근거 짓는 동경의 총체적 집합으로 보고자 한다.

 

- 낭만주의는 충족되지 않는 사랑에 근거해서 작동한다. “성숙의 거절을 고집하는 낭만적 경향의 작품들...사랑이 충족되면 그리움도 사라진다. 그래서 가겠다는 사람도 붙잡지 않는다. 가겠다는 사람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그를 붙잡아 두는 최상의 방법임을 깨닫게 한다.

 

- 소월의 시는 이별과 만남이라는 사랑의 보편적인 정서에 밀접하게 연관됐다. 이성의 대상으로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육친, 친구, 이웃, 민족 등 보편성을 띤 것. 님 상실 모티프로 야기되는 그리움과 유랑의 정서로 이루어졌다.

 

- 소월은 사랑시만 썼는가. ‘저항시인의 전형적인 초상이 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은 소월에 관해서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슬픔과 포한이 식민지적 상황의 발로라고 말해 왔다. 이것은 결코 거짓되거나 헛된 지적은 아니나 별 쓸모없는 일반론이다...‘내가 기른 소월을 구술한 소월의 숙모는 <내가 아는 대로 본 대로의 소월은 한갓 연애에 미친 천한 시인은 아니었다>고 했다.’

 

- 소월시 중 많은 것이 임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임은 대개의 경우 떨어져 있거나 헤어져 있거나 잃어버렸거나 앞으로의 상실이 예정되고 있다. 소월의 임은 어디까지나 손닿지 않는 곳에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고 따라서 그가 노래한 사랑은 호응과 완성의 환희를 앓지 못하며 충족 속에서 여물어 보지 못한 사랑이다.

 

- 소월이 지칠 줄 모르고 사랑을 노래했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좁았다거나 평생 고질로 상사병을 앓았다기보다는 적어도 시작에 열중한 시기에 있어서 그가 사랑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했음을 뜻한다.

 

- 소월이 지칠 줄 모르고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규명해야 할 것은 그 사랑의 대상이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호사적 궁금증의 해소가 아니라 그에 있어서의 낭만적 사랑의 의미의 규명이다.

 

- 낭만적 사랑은 두 사람을 가르고 있는 사회적 특권이나 신분상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런 장애에 도전하는 사랑이 진실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한편 낭만적 사랑은 한 사람의 정신적 관능적 사랑의 충동이 오직 한 사람에 의해서만 충족된다고 믿는다... 낭만적 사랑의 교리를 배운 사람은 따라서 어디에선가 기다리고 있을 이 배당된 오직 한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 낭만적 사랑은 그 대상과의 오랜 접촉이 없을 때 무르익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사랑의 대상의 성질과는 관계없이 사랑을 갖기 이전의 경험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낭만적사랑은 과거지향적이고 상실과 그리움을 강조한다.

 

- 억압적인 옛 가족제도 아래서 1919년을 전후한 시기에 개명한 조혼세대들이 자유연애와 낭만적 사랑의 이념에서 촉발된 우울한 자기발견과 자기해방에의 충동은 소월의 낭만적 사랑의 시의 원천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사랑의 시가 현실 속의 어떤 구체적 이성을 대상으로 했느냐는 부질없는 의문과 관계없이 그것은 자유연애와 낭만적 사랑의 이념을 처음으로 접한 당시 조혼세대의 에로스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소월의 문화사적 의미는 그가 낭만적 사랑의 이념을 정서적으로 완전히 합법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짐멜은 비밀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견의 하나라고 했지만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한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주 떳떳한 일임을 정서적으로 합법화했다는 것은 성적 타부가 많았던 전환기의 사회에서는 큰 구실이었을 것이다.

 

 

 

유종호가 쓴 논문 <길없음, 집없음, 님없음>을 찬찬히 읽고 자기분석을 해보니, 나의 낭만추구는 제도와 관습에 묶인 에로스의 방출 방법인 거 같다. 쿤테라의 말대로라면,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삶을 작곡하는 본능이기도 하겠지. 아무튼 나의 정서적 합법화를 위해 노력하고프다. 소월처럼. 기다림의 설레임을 벌써 놓치긴 싫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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