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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시세미나 1주년 기념 윤동주문학관에서

 

 

 

지지난주 10월 둘째주 토요일이 시세미나 1주년이었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가 소영씨가 말해줘서 알았다. 소영은 1년동안 나랑 유일하게 같이 시를 읽은 친구다. 생물학적 나이차이가 무려 20살. 하지만 영적 나이차이는 0살이다. 속 깊고 영민하고 문학에 대한 공부가 깊어서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척척 말해주는 고마운 이다. 아쉽게도 사진에는 없다. 시세미나 하기 전에 시간되는 사람 넷이서 서촌에서 만나서 윤동주문학관에 들렀다. 열린우물에서 사진찍고 닫힌 우물에서 시인의 일생을 담은 짧은 영상물을 보았다. 윤동주는 스물여덟에 죽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며 세상의 가장 미약한 생명까지 품은 사람. 지극한 완성형 인간. 이 세상은 태어난 순서대로가 아니라 자기정리가 되는 차례대로 떠나는 건가 싶었다. 찬찬히 둘러보고 언덕길 산책하고 그리고 1주년 기념세미나를 적선동 어느 작은 2층 카페에서 했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열명 남짓 모여서 도란도란 읽었다. 윤동주는 왜 얼굴빛부터 시편들까지 이리 반듯하고 착해빠진 모범생일까. 엄결한 정신성이 느껴지는 시들. 나는 <참회록>이 좋았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시 세미나를 마치고 광화문까지 참새처럼 떼 지어 걸었다. 집에 가려다가 심야형 인간이 된 효주가 정신이 깨어난다며 '좀 놀다가자'고 꼬드겨서 그럼 서시같은 맑고 깊은 와인 한잔 마시기로 하고 와인바를 찾아갔는데 성곡미술관 앞 '타인의 취향'에 갔다가 메뉴판 보고 화들짝 놀라서 테이블에 납작하게 엎드려서 낮은 목소리로 회의했다. "비싸." "너무 비싸 나가자." "물 마시고 화장실까지 다녀왔는데? 미안하다" "그래도 너무 비싸. 안주도 비싸." 그렇게 웅성웅성 떠들다가 나왔다. 와인한병이 죄다 십만원이 넘으니 우리같은 무지랭이들은 감당이 안 되는 거다. 더 걸어서 '신문로LP BAR'에 갔는데 역시나 거기도 비싸서 국산맥주 한캔씩 시켜놓고 음악만 왕창 들었다. "좋은 스피커로 들으니까 미치겠다"며 음악에 취한 시간. 우리를 귀엽게 보신 주인아저씨가 무료로 병맥주 2병을 선물해주시고 마지막에는 여행스케치의 '별이진다네'로 마음을 별들로 가득하게 채워주셨다. 지금생각하니, 우리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신 걸 아셨던 걸까.

 

아무튼 나는 월요일부터 출근을 앞두고 있었기에 이제 밤에 음주가무를 즐기며 맘편히 노는 것도 마지막이다 싶어서 목요일부터 야금야금 술자리에 참석했던지라 피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런데 또 그 심야에 홍대를 가자고 해서 홍대로 택시타고 가서 오뎅바에서 사케를 마시고 '여기 겨울에 눈내리면 정말 운치있다'며 윤동주 시 <눈오는 지도>를 마음껏 그려보고 나무 창틀 사이로 놀이터를 내다보며 오뎅 두 냄비를 비웠다. 그간 쌓인 내 모든 괴로움을 토요일 밤거리에 다 버리고 오자는 생각으로 걸어서 합정역까지 가서는 할증 풀리고 귀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리고 다시 월요일, 화요일 총 7회차 출근했다. 디자이너랑 사진가랑 취재원이랑 주간님이랑 클라이언트랑 의견조율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만나서 전화로 메일로, 하루종일 교차로에서 교통정리하다가 들어오는 기분이다. 내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니까 약간 재밌지만 조금 피곤하다. 오늘은 집에 오자마자 이불에 쓰러져서 30분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밥 먹고 포도 먹고 과자 먹고 그리고 뭐 마무리할 원고 한 편 썼다. 목이 따끔거리고 눈이 침침하다. 책 못 읽은지가 언젠가. 내일 오전에는 글쓰기 강의 하고 출근이다. 11월 중순까지는 하던 일 병행하기로 하고 취직했고, 그정도의 자율성은 보장해주는 직장인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눈치가 보인다. 지난주에는 바닐라라떼 들고 다급하게 걸어가다가 음료수 쏟고 그 액체에 미끄러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가 생겼다. 빨간 피딱지가 앉은 무릎을 보고는 좀 처연하고 웃겼다. 밥벌이의 억척스러움.

 

지금은 과도기다. 구애인과 헤어지고 새연애 시작했는데 옛날남자 정리 안 된 것처럼, 예전에 하던 일이 마무리가 안 돼서 양쪽 모두에게 미안하고 난처하다. 글쓰기강좌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소소한 일들. 점차 페이드 아웃 시켜야할 일들. 아니 사람들. 인연은 맺는 것보다 끊는 게 백배 어렵다. 아름답게 시작하고 말끔하게 끊으려는 욕심이 개입돼서 더 그럴 거다. 그런데 끊을 수 있으면 연이 아니겠지. 비틀어진 인연이든 매끄러운 인연이든 인연은 안고 가는 거 같다. 그 인연의 무게가 나를 휘청이게 하는 삶의 무게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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