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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같은 위도 위에서 / 황지우

지금 신문사에 있거나

지금도 대학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잘 들어라,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잘 먹음과 잘 삶이 다 혐의점이다

그렇다고 자학적으로 죄송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발 좀 그래라)

그 속죄를 위해

<악으로>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위해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말도

나는, 간신히, 한다

간신히하는 이 말도

지금 대학에 있거나

지금도 신문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못 한다 안 한다

그래도 폴란드 사태는 신문에 난다.

바르샤바, 그다니스크, 크라코프, 포즈난

난 그 위도를 모른다 우리가

그래도 한 줄에 같이 있다는 생각,

그 한줄의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마루벽의 수은주가 자꾸

추운 지방으로 더 내려간다.

자꾸 그곳으로 가라고 나에게 지시하는 것 같다

산다는 것은 뭔가 바스락거리는 것인데

나도 바스락거리고 싶은데

내 손이 내 가슴을

치는 시늉을 한다, 시늉만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하느님, 정말 불쌍합니다)

 

- 황지우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정시에 출근하는 직장생활이 이렇게 에너지가 쓰이는 일인지 몰랐던 게 부끄럽다. 미안하기도 하다. 대상은 없지만 그냥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아침6시에 일어나서 밥차리고 애들 등교시키면서 나도 출근 준비해서 나간다.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든 꽃수레를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조금 돌아서 버스정류장에 간다. 마침 쌀쌀한 바람이 부는 지라 둘이 손을 꼭 잡고 걷는데 10분이 채 안 되는 그 시간이 주머니난로처럼 따뜻함으로 꽉 찬다. 버스가 5분 안에 오면 돈이라도 주운 기분이 되고 13분만에 온 날은 하루치 기운이 다 빠진다. 출근시간 잘 지키려고 종종걸음으로 사무실 도착. 무선주전자에 물부터 끓인다. 커피를 하도 진하게 내려 마시니 주간님이 말한다. '오늘도 변함없이 사약 한 사발을 내려주시네요.'

 

그동안 1박2일 전남순천부터 구례, 남원을 돌며 판소리 여행취재를 다녀왔고, 지난 목금에는 안동고택에 다녀왔다. 틈틈이 인터뷰를 3건 했다. 일주일 안에 경상도로 전라도로 차에 타서 부릉부릉 댕겨왔더니 꼭 통돌이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느낌이다. 정신 어지럽다. 나는 생전가야 차에서 잠드는 법이 없는데 꾸벅꾸벅 졸다가 깨면 휴게소이곤 했다. 취재는 그렇게 했는데 원고는 한 편도 못 써서 지금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다음주부터 써야한다. 나야 워낙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일이 크게 힘들지는 않는데 취재주기를 직접 조절할 수 없어서 당황스럽다. 내 방 책상이 아닌 사무실에서 원고를 쓴다는 것은 또 어떤 기분일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지난주에는 병원을 두 군데나 갔다. 애 낳을 때 빼고 병원에 거의 안가는 걸 고려하면 나한테는 상당히 위협적인 상황이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 집에 오면 무조건 잔다. 아이처럼 10시도 안 돼서 눕는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다가 당기고 있노라면 꼭 기계같다. 다음날 쓰기 위해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처럼 나도 빨간불이 들어온 몸에 힘을 모은다. 초록불이 되기 위해 잔다. 지금 바람이나 목적은 하나다. 성공적인 존재변이. 일이 밀려오는 속도에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글쓰기수업을 병행하느라 힘든 것일 뿐 일 자체가 부담스러운 양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우려도 든다. 주간님은 이상적인 에디터의 상을 갖고 있고 내가 원더우먼처럼 그것들을 척척 해주길 바라는 거 같다. 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겠지만 나에게 맞는 에디터의 상을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 서로 다른 감각의 결을 어떻게 맞추느냐가 관건이다.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글을 쓰지 않고 싶었는데, 꼭 그러고 싶었는데 나는 지금 기업의 VIP매거진을 만들고 있다. 기업임원들과 전문직 남성들이 보는 책이다. 대체로 권위적이고 마초적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기에 내가 싫어하는 집단인데 딱 걸렸다. 예전같았으면 실망하고 따졌을 크고작은 가부장적 혐의점에 눈 감는다. 바스락바스락 거리지도 않고 납작 엎드려 일하는 내 꼴이 불쌍하기도 하다. 군소리 말고 편집일을 배워서 다른 좋은 책 만들어야지, 지금은 그렇게 궁색한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다. 현실의 부조리한 체계를 인식하면서도 결국 그것에 안착하는 자가 되어버릴까봐 겁난다. 어제 잠시 연구실에 들렀는데 그가 그랬다. 어떻게든 살아남으세요. 살아남는다는 말이 그렇게 적절할 수가 없다. 예전에 택시타면 있었던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가, 새삼 삶의 슬로건으로 와닿는 요즘이다. 오늘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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