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공동체, 누가 왜 무엇을 읽는가

[올드걸의시집]

1.

“완전 다른 시집이야. 혼자 읽을 때와는 다른 시집이라니까” 시세미나 끝나고 나오는 길, 한 친구가 들떠서 중얼거렸다. 나도 그랬다.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세미나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달랐다. 낮이 밤으로 바뀌는 동안 여럿이 모여 시를 읽고 나면 어둡던 시집은 환해지고 모난 가슴은 둥글게 부푼다. 마른 장작 같이 뻣뻣하던 시집이 분홍빛 솜사탕처럼 끈끈하게 몸에 엉긴다. 좀처럼 속내를 보여주지 않던 그 쌀쌀맞은 시집이 갑자기 얼마나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지. 마치 등 돌리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미소 짓는 것처럼 그만 설움이 일시에 녹아버리곤 했다. 그러니까 시세미나로 인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나는’(한용운)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다. 2011년 10월 15일부터 폭염 작열하던 2012년 8월 4일에도, 매주 토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그랬다. 그렇게 가을에서 겨울, 겨울에서 봄, 봄에서 여름까지 서른일곱 권의 시집과 네 번의 계절을 보냈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 기형도

2.

시세미나를 만든 계기는 글쓰기수업이다. 언어감각을 기르고 수사법을 배우기 위해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교재로 넣었다. 좋은 시를 한 편 고르고 느낌을 한 쪽 적어오라고 했다. 수업시간이 되었고 20여 명이 저마다 삶의 경험에 비추어 ‘시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느리게 촘촘히 흐르던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수줍고 소박한 그 말들이 그저 겨웠다. 그날 밤 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미처 말해주지 않은 ‘영원히 닫힌 빈방’의 시적진실을 보아버린 것 같았다. 수년간 하도 읽어서 귀퉁이가 닳아버린 시집이었건만 부끄럽게도 처음 발견하는 시구도 있었다. 거기에는 내 편협한 삶이 가닿지 못해 놓쳐버린 구절들만 있는 게 아니라 합당한 언어를 찾지 못한 나의 감정도 잠복해있었다. 그 낯선 혼란, 묘한 흥분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함께 시를 읽은 동료들도 ‘수능 끝나고 처음 시를 읽은 감격’과 ‘감수성 주체’로 거듭난 설렘을 터놓았다. 바로 이거다! 말이 회복되면 삶도 회복될 것 같았다. 한번 가보고 싶었다. 시에게로. 시를 관통한 나에게로.

시는 가장 혁명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계시인데,

그 이유는 원초적인 말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옥타비오 파스

3.

‘만인을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부제를 차용하여 만인을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시간으로 세미나를 잡았다. 토요일 오후 6시. (잠재적) 임노동자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그 감질 나는 ‘가처분 시간’은 가족과 보내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거나 취미 혹은 친교활동을 하거나 하릴없이 빈둥거리거나 크고 작은 집회 참가에 쓰인다. 자본을 욕망하든 자본에 저항하든, 이 꽉 짜인 코드시스템의 한복판에서 버젓이 시를 읽고 팠다. 교양이나 취미가 아니라 가장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 시를 읽을 동지를 구한 것이다. 예상보다 호응이 컸다. 내가 아끼는 시를 모은 시즌1 ‘올드걸의 시집’과 여성의 시인들 작품으로 추린 시즌2 ‘여자의 시집’은 매주 열댓 명이 모이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위기는 시즌3 ‘미래파의 시집’에서 찾아왔다. 난해한 표현과 시제와 인칭을 이탈한 시어들. 그 불친절함과 난해함을 견디지 못하고 시벗들이 하나 둘 세미나를 떠났다. 미래파를 시작하면서 최악의 경우 나 홀로 일인세미나를 할 각오로 임했지만 막상 토요일 6시 즈음 결석통보문자가 쌓이는 날이면 몹시도 서글펐다. 급기야 두 개 붙였던 책상을 치우고 책상 하나에 다섯 명이 세미나를 할 때는, 휴관일 날 해 떨어진 고궁의 담벼락처럼, 나는 쓸쓸했다.

시의 감수성은 잘 살아가는 사람의 감수성이 아니라,

늘 지워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사람의 감수성이다. – 황현산

4.

이 시대에 누가 시를 읽는가. 일주일에 시집 한 권 읽는 일이 읽지 않은 것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읽는다. 초면에 학번과 전공과 주민증을 공개하지 않고도 서로를 알아가는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이 읽는다. 돈 얘기, 집 얘기, 자식 얘기, 교육 얘기, 연예인 얘기, 스펙 얘기가 아닌 시담(詩談)만으로 다 큰 어른들이 서너 시간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일에 적응하는 이들이 읽는다. 시집 어딘가에 숨겨진 진실 하나 찾아내어 확대하고 비틀어보는 놀이에 도취된 사람들이 읽는다. 그리고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애인이 없어 토요일이 헐렁한 사람들이 읽는다. 정리하자면, 이 세상에 섞이지 못하는 이단아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밖에서 끊긴 길을 안에서 다시 이으려고 읽는다. 현재 시세미나는 파도처럼 들고 나는 이들 속에서 나름의 단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어딜 가나 주인 아니면 노예의 자리에 끼워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만난 수평적 인연들. 문학 전공자, 국어교사, 공공미술가, 소설가 지망생, 전시기획자, 비정규직 노동자, 생협활동가, 데이트생활자 등이 시적공동체라는 뿌듯함으로 함께 한다. 8월 11일부터 시즌4 심연의 시집을 읽을 예정이다.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 이성복

5.

시가 왜 좋은지 조금씩 배워가면서 나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황현산의 말대로 ‘시는 소란한 현실 위에 걸리게 될 예쁘고 평화로운 액자도 아니었고, 삶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찾아가는 망명지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음악과 커피도 해준다. 시는 대체 불가능한 그 무엇. ‘잘 표현된 불행’이다. 사람은 고통을 못 참는 게 아니라 이유 없는 고통을 못 참는다. 이별을 당하고 나서 왜 헤어졌는지 이유나 알자고 매달리는 절규에는 거짓이 없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하더라도 그 아픔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위로가 된다. 세상에는 시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불행이 있고, 그 불행의 자리는 누추하다. 그것을 가지런히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그걸 시가 해준다. 그렇게 어둠의 뿌리까지 내려간 불행의 자리는 타자가 들어서는 순수의 자리가 된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삶의 윤리이기도 하다. 시가 어려운 이유는 ‘시의 비유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내밀하기 때문’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을 기억한다. 누군가 ‘삶의 총체’에서 비롯된 불행이 그리 쉽게 이해된다는 것은 임의로 단순화시켜버리는 폭력일 것이다. 지금 나는 『백석 시집』을 붙들고 있다. 단어 하나 하나 넘어가기가 어렵다. 한 번도 쉬운 시집은 없었다. 한 사람의 사유와 감각의 속도와 결을 맞추는 일은 참 고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낯선 시와 교섭하며 낡은 나를 넘어뜨리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이 순조롭다면 또 가능하다면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이룰 수는 없었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말대로 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시로 인해 늘 많은 것을 배운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새로운 절망이 있을지 모르지

 

* 시세미나 소개+단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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