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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雨日 풍경 / 최승자

 

떨어지는

소리,

위에

떨어지는

눈물.

 

말라가던 빨래들이

다시 젖기 시작하고

 

누군가 베란다 위에서

그 모든 기억의 추억의 토사물을

한꺼번에 게워내기 시작한다.

 

 

- 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최승자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세상을 등지고 포항의 정신병원을 출입하던 그녀에게 한 기자가 "시를 쓰던 당신이 왜 폐인이 됐는가" 묻자 답한 말이다. 토요일 시세미나을 위해 최승자의 세번째 시집 <기억의 집>을 꼼꼼히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절망의 와중에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사람. 그녀가 성냥개비처럼 삐쩍 마르고 일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게 마음 아팠는데, 점점 존경스러운 마음,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녀는 비록 굶고 병들었지만 자기 본래적인 모습을 지키며 사는구나, 배운대로 살아가구 있구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뉴스에서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여성의 뒤를 쫓아 들어가 성폭행하고 살인한 사건을 봤다. 범인이 성폭행 전과자라며 전자발찌의 무용성을 논했다. 나는 유치원에 간 사이 엄마가 사라져버린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허름한 연립주택가이던데 그리 경제적 여유가 있어보이지는 않았으니 더 걱정이다.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여학생이 주인의 성폭행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건도 나왔다. 죽고 죽이고. 피도 눈물도 없이. 뺏고 뺏기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혀를 차고 돌아서면 잊는다. 말로는 세상이 흉흉하다, 미친세상이다, 얘기하지만 다 살아간다. 눈 감고 외면 하고 망각하고. 나도 그런다. 일상에 지장 없을 만큼만 기억하고 분노한다. 온통 약자를 짓밟고 뭉개면서 유지되는 부조리한 이 세상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아파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 최승자만이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나가떨어짐으로써, 온전히 살고 있구나. 모두가 긍정을 말하고 희망에 기대고 불안을 팔아서 자기 밥그릇을 챙기고 있는데, 최승자는 형형한 눈으로 말짱한 정신으로 직시한다.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지는 용기는 어디서 오는가.

 

'지난해 겨울, 대산문학상 시상식이 있던 날, 뒤풀이를 끝내고 포항으로 다시 내려가는 최승자를 배웅하며, 나는 그 갸날픈 어깨에 얹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만 같아 힘주어 붙잡을 수 없었다. 이 욕망의 거리에서, 아무 것도 쌓아둔 것이 없고 아무 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마침내 그 슬픈 어깨를 얻는다고 해야할까. 끌어안기조차 어려운 이 어깨,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기대야할 어깨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 황현산 <잘표현된 불행> 중에서

 

 

최승자의 네번째 시집 <내 무덤, 푸르고>를 읽는다.

말라가던 빨래들이 다시 젖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