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 겨울휴관

[올드걸의시집]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

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

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

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

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

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

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

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

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

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

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 김이듬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지성사)

 

 

 

 

글에 술 얘기가 잦았다. 술을 자주 마셔서가 아니라 술이 감각을 자꾸 자극해서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발견을, 술이 돕는다. 그렇다고 사유의 마중물로 술을 활용하기엔 육체적 한계와 시간적 제약과 심리적 저항이 크다. 습관화된 술자리가 주는 무료함, 술이 술을 마시는 강박증을 원치 않는다. 술은 신체유연제. 방심의 상태로의 초대. 냉동 초콜릿 같이 단단한 자아가 실온보관 초콜릿 정도로 부드러워지는 시간. 딱 거기까지다. 항시적인 쾌락의 방편으로 책을 즐기다가 지루하면 한 잔 생각난다. 금욕적인 신체로 최적화한 다음에라야 찬 소주의 목넘김에 자극이 오고 마주한 사람의 얘기도 귀히 들린다. 언젠가 조그만 아이비 화분 살 때 주인으로부터 흙에 수분이 바짝 마른 다음에 물을 주라는 조언을 들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내 몸에 술 주는 방법이랑 비슷하군.

 

술에 대한 절반의 사랑. 이는 성장환경에서 기인한다. 아버지가 술 드시면 자식들과 마누라에게 잔소리가 장황했고 더러 무례했다. 갈 지 자로 걷는 중년남자의 벌건 얼굴 중언부언은 아름답지 않았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음주습관인지 모른다. 아버지와는 세대도 기질도 다르지만 사회생활 하는 남자의 자의식을 가진 남편 역시 침착하고 지속적으로 술을 벗 삼는다. 여타 남자지인들도 예외 없었다. 술 없는 친교활동은 불가능해보였다. 그걸 보면서 남자에게 술은 해방기제가 아닌 억압기제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사회적 개인들 결속의 장. 술자리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자기 위치 측정이 안 되는 거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며 살고 어디로 가는지. 술은 인생 마라톤을 위해 고용한 페이스메이커. 무리에서 낙오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리기 위해, 고단한 그 길이 외롭지 않기 위해 마시는 듯도 보였다. 가엾고 얄궂다. 남편을 보면 그랬다. 그토록 어울리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생의 위기 국면에 자신의 고민이나 선택을 지지하거나 교정해주는 친구는 없어 보였다. 아니, 남편이 고민의 안건으로 상정하지 않는다는 게 맞겠다.

 

얼마 전 끝난 글쓰기 수업에서 뒤풀이가 자주 열렸다. 몇 가지 요인이 작동했다. 학인들의 높은 무직자 비율(출근부담 없음). 과제를 끝낸 홀가분함. 초여름의 선선한 저녁공기 등. 술보다는 말 혹은 정에 대한 갈망이 컸으리라. 주로는 연애담을 안주 삼았다. 스무 살 이후 공백 없이 연애사건을 경험한 소설가 지망생 여성이 추억의 봉인을 풀었다. 심리소설 같은 내밀한 감정묘사에 우리는 몰입했다. 남자 두 명도 여자들 틈에 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웃음이 났다. ‘나는 폭탄주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쓰겠다던 공직자 사회에 몸담고 있는 삼십대 남자학인에게 물었다. 남자들도 술 마실 때 이런 얘기 단체로 해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홍상수 영화만 봐도, 남자들은 여자랑 만남 몇 번 만에 관계를 가졌는가는 말해도 층층이 형성된 감정의 겹을 들추지는 않을 거 같았다.

 

집에서 식사시간이 다가오면 아들은 묻곤 한다. ‘엄마 저녁 메뉴 뭐에요?’ 딸아이는 메뉴와 더불어 묻는다. ‘엄마 오늘 저녁은 우리 네 식구 같이 먹어?’ 아들에게 최고의 만찬은 삼겹살이나 차돌박이 정식이라면, 딸아이는 네 식구가 먹는 고기밥상이다. 식탁에 네 식구가 모여 밥을 먹으면 싱글벙글 우리 가족 다 모였다고 흥분한다. 이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남편은 그래도 가부장지수가 낮은 편이다. 아들은 내가 수컷으로 키우지 않기 위해 피아노를 시키고 시도 읽어주고 엽서도 쓰게 하는 등 감수성 훈련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도 남성적 유전자의 본래적 속성을 어찌하지는 못하는가 보다. 딸아이는 자기 친구의 소소한 고민까지 물어 와서 나한테 미주알고주알 들려주는데 아들은 너네는 무슨 고민 얘기하니?’ 물으면 고민 같은 거 없어요한다. 이 확연한 차이를 파악하고는 피식 웃는다.

 

어릴 때 엄마랑 보던 연속극에서 고시패스하면 뒷바라지 하던 여자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남자들의 행태가 믿어지지 않았다. 인생을 살고 남자를 알고 나니 이제는 알 수 있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가르침을 TV바깥에서도 무시로 확인한다. 프로이트와 융과 슈필라인 이야기를 극화한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를 봤는데, 작품의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이라는 남자 때문에 불쾌했다. 여자주인공 슈필라인은 융을 향한 사랑을 세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한다. 융은 슈필라인을 사랑하지만 정신분석학자로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부자 아내엠마를 택하고 현실에 안착한다. 융은 슈필라인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도 사랑한 적 없다고 차갑게 말한다. 분노에 떨던 슈필라인이 융과의 관계를 외부에 퍼뜨리는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자 융의 입지는 조금도 위협받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생의 터럭 한 올 다치지 않고 사는 남자들. 이 부조리함. 공적으로 유통되는 뻔뻔한 남성성에 분개한 나는 시립미술관 근처 찻집에서 멍하니 앉았다가 왔다.

 

아버지-남편-아들-지인-영화-문학을 접하면서 어설프게나마 남자라는 종의 연구년으로 20여 세월을 보냈다. 관계-과정중심보다 목표-성과위주로 사고하는 남자들의 감각과 욕망. 내가 남자동료들과 관계 맺으면 절망하는 지점도 항상 같은 자리다.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주저앉은 적이 없는 그 남성성의 지대. 그곳 아닌 어디에 몸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서성인다. 남자들의 변화를 기다리느니 바위가 살로 변하는 걸 바라자. 남자는 술과 같아서 맹목적으로 관계했다가는 몰락한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데 그렇게 그들을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싶으니 문득 쓸쓸한 일이다. 장마가 끝나가는 토요일. 낮에는 공동체에서 이탈(당)한 친구를 만났고, 저녁 시 세미나에서는 어느 여자 선생의 남자친구 배신담을 시리즈로 들었다. 이런 날은 잠금해제. 어찌어찌하여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셨다. 아이패드로 유투브에 들어가 음악을 골라 들으며 비닐 천막 끝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만지작거리며 다짐했다.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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