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다정함의 세계

[올드걸의시집]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다정함의 세계」

 

만득귀자. 늦게 얻은 귀한 자식이 있네. 예전에 어느 역술인이 사주를 풀면서 한자로 써주었다. 표현이 하도 예스러워 신선했다. ‘늦게’라는 시간은 주관적이다. 간절히 딸을 원하다가 첫 아이 낳고 6년 만에 가까스로 만났으니 내게 너무 늦은 자식인 건 맞다. 주변 엄마들을 보아도 둘째 아이에게는 매우 관대하다. 나 역시 만득귀자를 보노라면 거의 부처님 수준의 자비심이 발했다. 발이 녹고 무릎이 없어지는 다정함의 세계. 품에서 내놓기 싫어 여섯 살까지 젖을 먹였다. 지금도 배불리 먹이는 일을 지상과제로 삼고 궁둥이 두드려가며 시골엄마처럼 키운다. 그렇게 일구월심 십년이 지날 즈음, 칭찬을 받게 되었다. “엄마는 참 좋은 부모 구나~” “나도 엄마처럼 좋은 부모가 될게~” 일일 삼회정도, 딸아이는 연극적인 대사와 함께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표정의 자애로움이란 유치원 원장님 포스다. 한동안 아빠는 착하다면서 남편을 격려하더니 점점 나를 더 많이 칭찬했다. 내가 뭘 그리 잘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던 대로 틈틈이 과일을 깎아주고 끼니를 정성스레 챙겨주었을 뿐이다.

급기야 상장까지 받게 된 건 작년 11월이다. 그날 낮에 후배를 만났다. 맛난 음식을 좋아하는 미식가라서 고급한 한식집에서 고가의 전골을 먹었다. 내 배가 부르니까 저녁을 하기 귀찮았지만 기본반찬은 챙겨주었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생선을 구웠다. 삼치의 하얀 살이 보들보들 싱싱하고 간이 딱 맞아서 맛있었다. “엄마,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하더니 딸아이는 고양이처럼 한 마리를 뚝딱 먹어치웠다. 그렇게 맛있다니 아들도 먹일 겸 나는 생선을 한 입도 안 먹었다. 모성의 화신이라서가 아니라 낮에 먹은 고단백 음식이 소화가 되지 않아 그랬다. 그것도 모르고 칭찬에 눈 먼 딸이 묻는다. “오빠 주려고 엄마는 안 먹어?” “응.” “엄마는 참 자식을 아끼는구나” 토닥토닥. 매번 들어도 매번 웃기고 슬며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왜 이래. 나 좋은 부모야’ 으쓱했다. 저 지칠 줄 모르는 칭찬경영 마인드는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글을 쓰고 딸은 책상에서 무언가를 했다. 구몬 수학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겠지 했더니 잠시 후 나를 톡톡 친다. “엄마, 내가 상장을 줄게” 그 둥근 입술로 오물거리며 내미는 하얀 종이를 보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그냥 상도 아니고 ’11월 자식사랑상’ 이다. 나는 10월이나 9월과 다름없이 자식을 돌보았을 뿐인데 11월에 받았다. 마지막에 몇 학년 몇 반이 아니고 동호수와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이름 뒤에는 빨간 싸인펜으로 네모난 인장을 새겼는데 무려 ‘자식’이다. 막상 상을 받고 나니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알겠다’는 수상소감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수상의 기쁨으로 한 해를 마감하고 다시 봄이 됐다. 나는 11월과 다름없이 엄마의 본분에 충실했는데도 딸아이의 칭찬이 줄었다. 시상제도도 유명무실해졌다. 딸아이는 4학년이 되자 아동 티를 벗고 언뜻 소녀 태가 났다.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베란다로 나가 속닥거렸다. 밤이면 어김없이 엄마 언제 오느냐며 울먹울먹 전화하는 일도 줄었다. 해지도록 놀이터에서 노는 딸에게 언제 올 거냐고 이제는 내가 전화를 거는 처지가 됐다. 관계의 역전 속에서 가정의 달 5월을 맞았고 ‘어버이 날’ 카드에는 예의 그 칭찬메시지가 가득했다. 큰 상을 한 번 받았더니 카드형식은 시시했다. 나는 딸의 사랑을 간구하는 가엾은 엄마가 되어, 요새 왜 그거 ‘좋은부모상’ 안 주냐고 묻고 말았다. 물어보면서도 상이름이 그렇게 진부하지 않았는데 싶어 갸웃했는데 “아, 자식사랑상?”한다. 딸아이는 요즘 자기가 소홀했다며 곧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어제 귀가 길에 전화가 왔다. 준비물로 1.5리터 물병이 필요하니 사오란다. 알았다니까 “그럼 나는 그동안 자식사랑상을 준비할게” 한다. 현관문을 열자 딸아이가 돌고래처럼 솟구쳐 오른다. “엄마한테 상장을 안 준지 6개월이나 됐더라.” 삐뚤삐뚤 손 글씨 대신 의젓한 명조체로 만든 ‘5월 자식사랑상’이다. 위 어른은 6달 동안 항상 자식을 위해 많고 많은 노력을 하고, 항상 친절히 대했음으로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 위클리수유너머에 '올드걸의 시집' 매주 한 편 쓰는데, 지난주에는 일이 많고 글감도 빈곤하고 하여 예전에 딸에게 상 받은 글 편집하고 최근 일 덧붙여서 올렸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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