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제대하면 적어도 일주일, 아니 한 달은 마음껏 놀고 싶을 것 같다. 가난한 청춘에게는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대 다음날부터 등록금을 벌려고 아르바이트 자리로 직행, 이마트 냉동기 점검 작업하던 황승원 씨가 참변을 당했다. 사인은 가스중독이다. 일이 힘들면 그만두라는 엄마의 말에 ‘다른 업체에선 월급 150만원 받기 쉽지 않다’고 했단다. 아버지 사업실패로 고교진학을 못했고 검정고시 치르고 서울시립대에 들어갔다니 공부를 잘하고 착실했던 모양이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들. 그런 자식을 바라봐야 하는 엄마는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늘 아들에게 미안했다”는 엄마의 통곡이 나의 가슴을 친다.
오늘(7월4일) <한겨레> 1면 기사다. 요 며칠 시험기간이라 대낮부터 얼굴 맞대고 있는 아들에게 ‘너가 너무 고생을 모르고 철이 없어 걱정’이라며 잔소리 하다가 신문을 보았다. 부끄러웠다. 고생과 인격을 등가교환 할 수 있다는 발상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삶의 벼랑에서 한발 짝 떨어진 이들에게나 가능한 거래다. 고인의 형편처럼, 엄마는 식당과 공장 전전하며 월급 100만원 받아 자식 키우고 지금도 보증금 1500에 월세 20만원 반지하 단칸방에서 사는 이들에게 노동은 고된 밥벌이 수단이다. 니체도 말했다. 노동은 하나도 고귀하지 않으며 삶의 충동을 효과적으로 길들일 뿐이라고. 맞다. 초과 노동으로 고생해서 인격이 도야된다면 우리나라 저소득층은 전부 도인일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은커녕 추락하지나 않으면 다행 아닌가.
가난이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인 기사를 접할 때마다 혼란스럽다. 직시하기도 외면하기도 힘들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별일 없이 사는 게 민망하다. 그렇게 한나절 우울하다가 또 일상복귀다. 뭐 당장 무장봉기를 일으킬 수도 없고 매번 마음속 ‘봉기’에 그친다. 분노세포가 벌떼처럼 일어섰다가 가라앉기를 수차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만 막연히 앞세운다. 평소에 하도 화르륵 화르륵 열을 잘 내서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던 책 <분노하라>를 어제 교보에서 구입했다. 오늘 이런 비보를 접하려고 그랬던 걸까. 심란함이 가라앉질 않아서 포장용 띠지를 풀지도 않은 책을 주섬주섬 꺼내서 책장을 넘겼다.
93세 스테판 에셀. 사르트르와 공부했고, 레지스탕스 일원으로 활약했고, 유엔세계인권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하는 등 환경과 인권문제가 주력분야인 노장 사회운동가다. <분노하라>의 본문이 매우 짧다. 내용도 예측대로다. 분노하고 저항하고 참여하라는 외침이다. 이 책의 알맹이는 별첨 ‘한국어판 발간 기념 저자와의 인터뷰’다. 아름다운 세 개의 단어가 나를 흔들었다. 어머니. 분노. 시(詩)
먼저 어머니의 존재. 그의 어머니가 트뤼포의 영화 <쥴앤짐>의 실제모델이란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해서 셋이 사는 참 바람직한^^; 내용이다. 아주 감명 깊게 본 영화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한 가정환경부터 '문화 살롱'이고 '전복의 공간'이다.
‘어머니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멋진 신세계』를 쓴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 화가 막스 에른스트 등과 가까운 친구사이였고, 1920~30년대 파리의 패션잡지 기자로 일한 신여성으로 지성과 행복 양쪽 모두 결코 포기한 적 없는 분이었습니다...제가 세 살 때 어머니는 내 아버지 프란츠 에셀의 절친한 친구인 앙리 피에르 로셰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이 삼각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바탕으로 트뤼포는 훗날 걸작 영화 <쥘과 짐>을 만들었지요.
제 입장에서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와 산다는 것은 거슬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아버지도 그 사랑에 동의했으니까요...이 일은 일찍이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아주 깊은 곳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저는 세간의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과는 거리를 두게 된 것 같습니다. 결국 도덕이란 타인들과 사회가 만들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범에 순응하는 것일 터입니다. 윤리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 가야할 것, 즉 발명이며 창조(자기만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모태 자유인 저자는 말한다. 어머니는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니 항상 행복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그는 어머니에겐 자유와 행복과 윤리를 쟁취하는 삶의 기술을, 스승 같은 선배 사르트르에겐 참여를 통한 삶의 가치를 배웠던 셈이다. 인생에서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둘째 분노. 인간에게 분노하는 마음, 나누려는 마음이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음을 그는 전 생애로 증명한다. 100세를 앞둔 노령인데도 정정하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 그 강건함과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답변.
‘나의 비결은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죠. 또 하나의 비결은 기쁨입니다.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베풀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시(詩). 그가 시를 언급하는 대목은 가장 감동적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시적인 정서로 남는다니..
‘마음과 정신 양쪽을 다 계발하려면 평소에 시를 암송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시간을 꽤 많이 들여 시를 읽고 또 암송하곤 합니다. 암송하여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인 시 구절들의 아름다움. 이것도 나의 행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나의 내면 곳곳에 깃들어 있고, 살아오면서 최악의 순간에도 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갇혀있을 때도 셰익스피어, 괴테, 횔덜린의 시구에 담긴 운율의 힘을 빌려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어쩌면 이 생을 다 마치고 나면 우리의 모습은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시적인 정서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스테판 에셀. 그의 불로장생의 비밀, 영혼의 양식은 ‘시’였다. 그는 고백한다. 이제는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여러 편의 시 덕분에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이다. 영화<시>가 떠올랐다. 윤정희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윤리적인 결단,아름다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시 덕분이었다. 시를 읽고 외우고 마음을 닦으면 아름답게 살고 편안히 죽을 수 있다. 그들처럼.
<분노하라> 책 표지의 절반을 뒤덮는 글자가 이글이글 위압적이다. 내용은 더 없이 흥미롭고 감미롭고 친절하구만. 아래 여백에 부재를 달아주고 싶다. 자유하라. 베풀어라. 참여하라. 저항하라. 시읽어라...그래야 분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