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네 번 바뀌었습니다. 다양한 제목과 모양의 책이 오십 권 넘게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위클리수유너머 <선생님책꽂이>에는 창간부터 세 분 선생님이 책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달맞이 박혜숙(아동문학평론가) 풍경지기 박혜숙(국어교사) 김대경(국어교사)입니다. 둘은 이름이 같고 또 둘은 직업이 같습니다. 우연히 짝을 이뤘습니다. 그래서 편집팀에서 가끔 혼선을 빚기도 합니다. ‘이번에 어느 박혜숙 선생님이지?’ ‘저번에 김대경샘 학교 아이들 얘긴가?’ 이럽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무처럼 글에도 결이 있으니, 세 분에게서 느껴지는 글의 파장이 다른 듯 닮아있는 까닭입니다.
어쩌면 예정된 인연입니다. 그들은 반평생 읽어온 책, 갈망한 삶이 놀랍도록 비슷했습니다. 책과 씨름하며 열심히 산다고 살다가 어느 날 다다른 방황의 지점이 일치하고, 삶에 파고든 권력-장치의 불가능성에 좌절하는 대목이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겐 산삼이나 다름없는 책 몇 권 읽고서 기운차려 희망을 얘기하고 의욕을 부리는 모습이 어찌나 닮았는지요.
달맞이, 풍경지기, 김대경 선생님을 보면서 유명한 그 문구가 떠오르더군요. 가난한 자를 먹여 살리는 것이 성스러운 일이라면, 그들이 왜 가난한지 묻는 것은 혁명이라고요.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고귀한 일이라면, 그들을 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묻는 것은 혁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주 위클리수유너머에는 문학소녀가 자라나 책으로 나를 바꾸고 세상을 가꾸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길 위로 나선 삼인삼색 풍경이 그려지시나요? 정답처럼 주어진 진리의 땅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유목의지가 인생길을 소풍길로 만들어가더군요.
앞으로도 가만히, 그리고 오래 바라봐주세요. <선생님책꽂이>에서 쑥쑥 뻗어나간 가지가, 나지막이 움튼 연둣빛 새싹이 새날 새날을 열어갑니다.
- 57호 편집자의 말 (* 위클리수유너머에서 선생님 세 분 인터뷰한 글입니다)
교실에서 – ‘1,2점 때문에 인생 달라지는데’
어느 해 중간고사 시험기간 때 일이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두꺼운 문제집을 푼다. 학원 숙제란다. 문제집엔 중간고사 해당 단원 전국고등학교기출문제가 빽빽하다. 기함할 노릇이다. 시험범위 교과서 분량은 고작 이삼십 쪽인데 문제집이 책으로 한 권이라니!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니 ‘꼬고 또 꼬고’ 문제 질이 낮았다. 아이들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휴, 선생님 토나 올 것 같아요.”
시험문제는 수업시간에 배운 데서만 내니까 문제집 풀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아이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습관’을 바꿀 순 없다. 아이들은 초등 때부터 학원을 다닌다. 헌데 정작 성적은 고만고만하다. 상위권 학생은 안달복달이다. 가채점표가 나가면 달려와 묻고 따진다. ‘1, 2점 때문에 내 인생이 달라진다’ 울먹인다. 바늘 끝처럼 예민한 아이들. 바늘 끝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각박한 강남아이들. 사제지간 정은 메마르고 온통 입시에 매몰된 현실에서, 교육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하는가.
김대경은 고민스럽다. 교직생활 10년이 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상황은 나빠지고 적응에 숨 가빴다. “강남 소재 학교에서 내 정체성을 못 찾고 있었다.” 겸사겸사 지난해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남편의 직장문제로 올해까지 연장해야 했다. 예기치 못한 시간. 학교현장에서 물적 심적 거리가 확보됐다. 생의 전환기에 찾아온 샘물 같은 시간이다. 두 가지를 계획했다. 공교육문제 더 깊이 고민하기. 그리고 권장도서목록모임 열심히 해보기.
권장도서모임에서 – ‘성장통엔 성장도서로 치유를’
김대경은 국어교사다. 책과 인연이 깊다.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모임 연구단체인 권장도서목록모임 대표를 5년 째 맡고 있다. 십년 전, 전교조 지역모임에서 독서사례를 발표한 인연으로 모임에 합류했다. 좋은 책이 있는 곳에는 필시 좋은 사람이 있게 마련. 물 좋고 정자 좋은 그곳에서, 그는 동료들과 책 이야기 학교 이야기를 나누면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책과 교육의 만남’에 고무된 그는 교원대에서 2년 간 독서교육과정까지 마쳤다.
그 시절만 떠올려도 마음에 무지개 뜨는가. “독서교육이 너무 재밌더라”며 표정이 활짝 갠다. 책은 그를 웃게 한다. 물론 울리기도 한다. 그간 모임에서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면 좋은 책들’ 화두를 내걸고 만화추천목록을 만들었다. 아무리 책이 좋아도 의무적으로 읽어내기는 힘든 노릇. 또한 학교일에 허덕이는 동료교사와 모임운영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표직을 계속 맡은 이유는 ‘가슴 뛰는 일’ 이기 때문이다. 웃기거나 울리거나. 어쨌든 책은 사유의 지평을 뒤흔드니까.
“요즘은 추천도서모임에서 성장도서 추천목록을 정하거든요. 원래는 학교도서관에 비치하면 좋은 책이지만, 부모와 교사가 같이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읽으면서 많이 배워요. 성장통 이야기가 나오면 아이가 그래서 그랬구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요. 예전에 학교 선도부에 성장도서를 비치해놓고 아이들을 읽게 했거든요. 단편이라 분량이 적으니까 아이들이 금세 빠져들어요. 자기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어 치유효과도 있고요. 녀석들이 2시간을 꼼짝 안하고 보더라고요.”
학교에서 – 맛있는 책은 나눠 읽어야
책 좋아하는 선생님, 김대경은 책 인심이 후하다. 휴직기간인 요즘엔 이웃에게 재밌게 본 책을 빌려준다. 마치 맛있는 떡을 이웃에게 돌리고 부침개 한 장이라도 옆집에 전하듯이, 영혼의 양식인 책을 나누고야 만다. 항시 곳간이 알차다. 학교에 있을 때 교무실 책상과 캐비닛에 참고서와 문제집 대신 다양한 주제의 책을 꽂아두고 다른 선생님과 학생에게 빌려 주었다. ‘쉬는 시간마다 종종 내 자리로 달려와 책을 빌려가서는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한참 수다를 떠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힘이 솟았다’
그 뿐 아니다. 학교에서 월 1회 독서소식지를 직접 만들어 동료 교사들에게 배포했다. 내용은 교사독서모임 후기, 읽은 책의 간략한 소감, 읽을 만한 글, 자녀에게 권하는 책, 간단한 독서 퀴즈 등 책 관련 얘기와 정보를 담았다. 힘들기는커녕 그에겐 학교생활의 가장 신나는 일로 꼽는다. 크고 작은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좋은 책은 돌려봐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먼지 나는 일상에 촉촉이 단비가 되어주는 책이 현대인에게 꼭 필요하다는 믿음도 커졌다.
이렇게 교육현장에 책의 씨앗을 뿌리는 그의 노력과 달리, 최근 학교에는 엉뚱한 독서기류가 형성됐다. 요즘 학교에 책이 부족하진 않다. 독서교육은 그 어느 때보다 과열이다. 입학사정관제도가 도입되면서 독서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상황이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학생의 독서이력철을 관리하는 전담학원이 생겨버렸다. 궁여지책으로 교사가 생활기록부에 직접 기록하는 방법으로 부작용을 막았다. 독서가 또 하나의 중요과목이 되어버린 현실. 아이들은 책을 곱씹기보다 영어 수학 공부하듯 정보를 통째로 삼킨다. 독서마저 표준화된 시험이 된 것이다.
“독서를 지도해야할 교사가 가장 책을 안 읽어요. 바빠서 못 읽어요. 학교평가, 교사 평가제도다 뭐다 해서 일이 너무 많아요. 특히 2~3년 사이 특목고 자사고가 대거 생기면서 선생님들이 전부 ‘고3담임’ 된 기분이라고 해요. 교사모임 선생님들도 학교가 반 정도 자사고로 전환되면서 늦게까지 일하고요. 교사가 책을 읽으면 독서 교육이 절로 될 텐데 안타깝죠. 이 상황을 타개하기가 혼자서는 힘들고 문제점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연대해야 하는데, 지금은 연대하기도 힘들어요. 젊은 선생님들은 연애할 시간도 없다고 할 정도니까요.”
가정에서 – ‘아깝다 학원비’
연애도 연대도 힘든 척박한 현실에서 한 발 물러선 지금, 김대경은 ‘책으로 뭘 해볼까’란 화두를 품고 제 갈 길을 간다. 다양한 시도 중이다. 대상은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과 주변 아이들이다. 이미 학교에서 ‘학원과 성적의 무관함’을 깊이 깨달은 지라 아들에겐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지난 겨울방학엔 “예비 중1특강을 안 듣고 어딜 가느냐”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이들과 남편이 있는 제주도로 내려갔다. 중학교 교과서를 구해서 수학을 하루에 한 단원 씩 풀고 <살아있는 한국사교과서> 소리 내 읽기를 시도했다.
“잘 되었다. 하루 종일 놀고, 한 시간 공부하니까(웃음).” 근데 가정에서 독서 모임을 꾸려서 해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웬만한 전문가들이 아니면 시작도 하기 전에 낭패를 입을 수 있다. 그럼에도 좋은 메뉴얼이 있다면 나도 해볼 수는 있는 일. 오랫동안 독서관련 교육에 종사한 백화연 교사가 쓴 <책으로 크는 아이들>을 교재로 삼았다.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알차서 큰 부담 없이 따라해 볼 만하다. 김대경은 새 학기부터 시댁에서 매주 모이는 조카들과 한 시간씩 가정학습을 하려한다. 일단 시험 삼아 해보고 잘 되면 저소득층 공부방 아이들과 공부하는 기회로 넓혀볼 참이다.
“솔직히 저도 사교육을 안 시키고 버티면서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럴 때는 <아깝다 학원비> 이런 책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죠(웃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다 보면 공부 못해도 참한 아이들은 살아남는 거 같은데, 집에서 계속 공부만 시키는 아이들은 성격이 안 좋아요. 사물함이나 유리 깨고 선생님에게 대들고. 그렇게 말썽 피우는 아이의 부모는 상담 와서도 성적 얘기만 한다가 가죠.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내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게 사회를 위해서 중요하구나, 내 아이가 잘 크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남의 아이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책 숲에서 – 사람과 사람을 엮어주는 책 찾아서
내 아이만 잘 크는 것은 바랄 수는 있으나 이룰 수는 없는 꿈이다. 세계는 다 연결돼 있으니까. 그래서 김대경은 아이들과 책을 통해 이런 공부를 하고자 소망한다. ‘다른 사람의 심정을 미루어 생각할 줄 알고, 자신이 배운 지식을 통해 다른 상황으로 확대하여 상상할 줄 알고, 세상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정직하고 구체적으로 발언할 줄 아는 마음, 그 마음을 얻는 것’
또한 언젠가 유럽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장면과 같은 ‘책과 사람’이 무르익는 풍경을 그려본다. 커다란 통유리로 햇살이 쏟아지고 그 노란 눈부심 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여유로운 표정들. 책은 읽는 사람의 깊고 형형한 눈매들. 카프카의 말대로 ‘한 권의 책은 우리 자신 속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책이 아니다. 그래서 김대경 권장도서목록모임 대표는 오늘도 우리 아이들을 위한 ‘좋은 책’ 찾으며 조용한 반란을 꿈꾼다.